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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발레 공연에 관객 야유 쏟아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러시아의 원시성에 녹인 유럽의 화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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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이전까지, 서양음악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은 언제나 멜로디와 화성(和聲), 노랫말이었고, 리듬은 ‘조연’에 그쳤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의 첫 소절부터 악보의 마디와 마디 사이를 구분해주던 ‘마딧줄(barline)’을 사실상 허물어버렸다. 강물을 막아주던 제방이 허물어지면 물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마딧줄이 사라진 악보에서, 리듬은 자유롭게 몸을 섞고 복잡다단하게 표정을 바꾼다.

 
오늘의 클래식
김성현 저 | 아트북스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한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꾸준한 혁명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 이곳에서 ‘음악적 혁명’이 발발한 시각은 정확히 1913년 5월 29일 오후 8시 45분이었다.

“관객들은 처음 2분 동안 조용했다. 그러다가 야유 소리가 꼭대기 좌석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 던졌지만 우리는 계속 연주했다. 공연이 끝날 무렵 경관들이 출동했다. 작곡가는 무대 뒤쪽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파리 거리를 쓸쓸하게 거닐었다.” _피에르 몽퇴(초연 당시의 지휘자)

작곡가는 내심 관객들의 박수를 기대하면서 관객석 앞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정작 공연이 끝난 뒤에는 쓸쓸한 표정으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했다.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남아 있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 초연 날의 기록이다.

발레의 내용은 태양신에게 바치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선택하고 제단 앞에서 태고의 의식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고전적 발레의 공식은 첫 장면부터 어김없이 깨어져 나갔다. 우리가 발레를 보러 갈 때 으레 기대하는 늘씬한 남녀 무용수의 중력과 싸우는 듯 공중을 향해 몸을 날리는 우아한 춤 동작 대신,〈봄의 제전〉의 무용수들은 러시아 전통 의상으로 몸을 전부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쳐다보며 슬라브적인 제의(祭儀)를 표현했다. 관객들이 입가에 손을 대고 춤을 추는 무용수들에게 “치통에 걸렸으면 치과에나 가라”고 고함쳤던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베를린의 청소년 250여 명? 사이먼 래틀의 지휘와 베를린 필의 연주에 맞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무용으로 공연했던 「리듬 이즈 잇!」

기대를 배반한 것은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폴 그리피스는『현대음악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당시 작업을 한마디로 ‘리듬 혁명’이라고 요약한다.

스트라빈스키 이전까지, 서양음악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은 언제나 멜로디와 화성(和聲), 노랫말이었고, 리듬은 ‘조연’에 그쳤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의 첫 소절부터 악보의 마디와 마디 사이를 구분해주던 ‘마딧줄(barline)’을 사실상 허물어버렸다. 강물을 막아주던 제방이 허물어지면 물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마딧줄이 사라진 악보에서, 리듬은 자유롭게 몸을 섞고 복잡다단하게 표정을 바꾼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예측 가능한 리듬의 반복이라는 관념을 제거해서 관객들에게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찔함을 선사한다”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원시적이고 폭발적인 리듬은〈봄의 제전〉을 지탱하고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다. 조화 대신 혼동이, 우아함 대신에 꿈틀거리는 에너지가 이 작품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혁명가지만, 그의 삶이나 음악은 혁명과 거리가 있다. 전통과 ‘단절’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수용’하면서 음악적 자산을 늘려나갔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나를 혁명가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관습을 깨뜨리는 사람에게 모두 혁명가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자기 할 말을 하기 위해 공인된 관례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예술가는 누구나 혁명가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모차르트 신화’ 이후의 서양 음악사는 온통 신동에 대한 격찬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혁명가의 유년 시절은 영재나 신동과 거리가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아홉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음악원 대신 법학원에 진학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청년기 처음 얼마 동안은 내 욕구와 포부가 계속 좌절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적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정식 제자가 되어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러시아 음악계에서 떠오르던 스타는 스트라빈스키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애제자였던 글라주노프는 일련의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음악계의 총아로 탄탄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1909년 ‘글린카 상’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작곡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이 상 역시 글라주노프와 라흐마니노프,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등이 앞서 수상한 뒤였다.

러시아 음악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상대적으로 ‘늦깎이’이자 ‘서자’였던 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드뷔시와 라벨 같은 프랑스 인상파부터 스승이 달가워하지 않았던 차이콥스키의 음악까지 맘껏 흡수할 수 있었다. 1910년대 러시아 발레를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상륙시킬 당시, 파리 청중의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의 원시성 속에 서유럽의 관현악 어법을 탄탄하게 녹여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세계는 초기의 ‘원시주의’와 중기의 ‘신(新)고전주의’, 후기의 ‘음렬(音列)주의’로 구분된다. 작곡가의 활동 무대에 따라 러시아와 프랑스, 미국 시기로 각? 불리기도 한다. 스트라빈스키는〈불새〉와〈페트루슈카〉〈봄의 제전〉을 통해 리듬 혁명을 주창한 뒤, 1920년대부터는 거꾸로 조반니 페르골레시 같은 바로크 작곡가의 작품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

발레음악〈풀치넬라〉와〈시편 교향곡〉같은 중기의 걸작이 ‘신고전주의’시기의 작품들이다. 작곡가는 “모든 질서는 절제를 요구한다. 그것이 자유에 장애가 된다는 견해는 잘못이다. 그와는 반대로 양식과 절제는 자유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방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기록했다.

스트라빈스키가 ‘리듬 혁명’을 주창했을 즈음, 오스트리아에서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구조적 질서인 조성(調性)을 허무는 ‘무조(無調)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가 리듬을 통해 서양 고전음악의 엔진 출력을 한껏 높이려고 했다면, 쇤베르크를 비롯해 알반 베르크와 베베른 등 이른바 ‘신(新) 빈 악파(樂派)’는 건물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건축하려 했다. 처음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역동성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갈수록 ‘신 빈 악파’의 이성적 방법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912년 쇤베르크의〈달에 홀린 피에로〉를 들은 뒤 “그의 창조적 천재성의 정수가 심도 깊게 함축돼 있다”고 순수하게 칭찬했던 스트라빈스키도 이 같은 전세 역전에 점차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40년부터 할리우드에 살고 있었고, 쇤베르크 역시 불과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살고 있었지만, 망명 시기에 두 사람은 결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51년 쇤베르크가 먼저 숨을 거두자, 예순여덟의 노장 스트라빈스키는 필생의 경쟁자였던 쇤베르크의 방법론을 받아들여〈칸타타〉와 「7중주」 같은 작품을 통해 음렬주의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보통 나이가 들수록 고집도 따라서 늘어난다는 걸 생각하면, 스트라빈스키가 지닌 유연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든아홉 살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110여 곡의 작품과 15곡의 편곡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를, 프랑스의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은 ‘카멜레온 음악가’ ‘1,001가지의 스타일을 지닌 남자’라고 불렀다. 그의 삶이나 음악에서 가장 위대한 대목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멈추려 하지 않았다는 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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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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