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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도시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그들이 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뺨에 서쪽을 빛내다』 장석남, 『좀비들』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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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조탁(彫琢)한 시인의 말결이 시집에 녹아있다. 그는 불 꺼진 방에서 혹은 불 꺼진 마음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고, 죽어있는 어떤 것은 살아남은 자를 괴롭힌다.

상처를 조탁(彫琢)한 시인의 말결이 시집에 녹아있다. 그는 불 꺼진 방에서 혹은 불 꺼진 마음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고, 죽어있는 어떤 것은 살아남은 자를 괴롭힌다. (기어코)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p.58)”. 어디에서 한번은 마주친 느낌이다. 마치 어제처럼, 마치 그제처럼. 어쩌면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를 살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 이 차선과 저 차선의 사이. 고작 몇 발걸음이면 당도할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철옹성 같이 단단한 은행문 앞을 서성이는 대학생을, 시인은 “출장안마 가던 아가씨 눈물”을, 눈 내리는 어느 날, “그렁그렁 바라(p.66)” 보았을 뿐이다.

지난 9월 29일. 홍대 KT&G 상상마당 라이브 홀에서 북콘서트가 열렸다.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와 소설『좀비들』의 장석남 시인과 김중혁 소설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 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11월」中


시인이 낭송하는 「11월」은 새벽과 아침을 나누는 경계처럼 목소리에 성에가 끼었다. 조금만 있으면 도시에서는 분주히 차들이 오가고, 초등학생 아이 하나가 그 옆을 쫄랑쫄랑 지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1987년 스물두 살 때 경향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2005년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 지성사) 이후 5년만에 작품 발표였다.

“왜 하필이면 뺨이고 서쪽일까? 사랑에 빠지면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만. 잘 못 살았을 때도 느낀다. 내 나이도 미래를 보면 반쯤 남았나는 생각도 든다. 이제 황혼이나 노을에 비춰볼 나이가 됐다. 그래서 그런 부끄러움을 되돌아 봤다.”

장석남 시인은 영감을 어디에서 얻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시인은 운명론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손금을 자주 들여다본다. 어쩔 때는 그 손금을 고치고도 싶었다. 내 시의 영감은 일상생활에서다.” 고 말했다.

이날, 장석남 시인과 함께한 초대가수는 라즈베리필드였다. 유명 아이돌 가수 였다가 인디밴드로 변신(?)한 소이의 솔직담백한 시에 관한 이야기,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이뤄졌다. 시를 쓰는 작업과 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유사한 것이 있다. 자신도 어릴 적 시를 써보고, 공연 때 그 시를 낭송해보기도 했지만, 시란, 삶을 언어화 한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 그녀가 들려주는 장석남 시인의 「오막살이 집 한 채」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고, 떨렸다.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할 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오막살이 집 한 채」 전문


장석남 북 콘서트를 이룬 그 책.


여섯 권의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뺨에 서쪽을 빛내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젖은 눈』,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좁게는 한 시인의 20여년의 세월이 담긴 흔적이고(등단 후를 기준으로), 넓게는 시인이 벌어놓은 행간의 세계이다. 독자는 그가 벌어 둔 공간으로, 어쩌면 미처 시인도 읽지 못한 세계로 풍덩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느 수술대에서 독자는 자신의 상흔을 꿰매고 있을까.

“04.12.24”, “05.10.17.”
언뜻 보기에는 인터넷 아이피 번호 같다. 여섯 권의 시집 중 『젖은 눈』『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에 부과된 군 검토필 날짜이다. 근작 『뺨에 서쪽을 빛내다』를 보면 「시를 다 지우다」는 시가 있다. 여기 잠깐 옮겨 보면,

새벽빛도
홑겹만 남고

시인으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다
언제 스민 건가?
먹물 스민 손톱을 보며
그믐달처럼 웃는다

공복 창자의 이랑마다
무슨 꽃씨를 뿌릴까
무슨 망아지를 풀어볼까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
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
시를 지우고

시의 자리에 앉아 어라,
아침이 와서
함께 덜덜 떨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꺼지고, 먼동이 터오기 전의 골목길은 한결 푸르다. 야간 택시 기사는 그 먼 밤의 거리를 돌아, 남들이 하루를 시작 할 때 자신은 하루를 상납금과 함께 끝마친다. 시인의 자리에 시가 있고 시의 국경과 시의 마을이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는 각기 자신의 자리가 있고 자신의 국경과 자신의 마을이 있다. 내겐 무엇일까? 먹물 스민 손톱과 운전대를 잡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마시는 운전기사의 손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우리가 소중하다고 하는 것, 결국 따지고 보면 삶 앞에서는 어라, 아침이 왔네 하면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시를 다 지웠다. 상처를 다 지웠다. 그러나 정말 다 지워진 것일까? 근작을 읽고 다시 옛 장석남 시집을 더듬기 위해 내가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이렇듯 지워지지 않는 검토필 자국이 찍힌 두 시집이었다.

내가 밤늦도록 붙잡고 있었으나
끝내는 지워져버리고 만
몇몇 내 마음속 시구(詩句)들,
그 설렘의 따스한 물무늬들을 위한

여기 호젓하고 고요한 주소지의
안타까운 묘비명들

                        『젖은 눈』-「민들레」


개가 짖는다
처음엔 두부장수를 짖고
오토바이를 짖고 이어서
발소리들도 짖는다
밤새 개가 짖는다
들이닥친 봄밤이 낯선 모양이다
앵두꽃과
쑥스러운 상주처럼 비켜서서 피어 있는 목련을 짖고 또
늦게 피는 복사꽃을 짖는 게로구나
개가 짖는다
개가 짖을 때
개가 봄밤을 짖을 때
나도 그 개 짖는 소리쟀
정 가운데 앉아보자
단정히, 매우 드문 일이지만
단정을 자아하고라도 단정히 앉아보자

나는 한없이 작게 흔들리다가
갑자기 열린 문 앞의 촛불처럼 바람에 휘몰리면서
그만 휙, 단 1초도 견디지 못하고
무명실 같은 연기를 등에 꽂고
사라질 것만 같다
나는 내가 한없이 낯설고
나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고
나는 내가 한없이 가엾다
앵두꽃보다도 작은 지혜도 없이
앵두꽃보다도 작은 미련도 없이
부끄러움마저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채,
단 1초도 견디지 못한 채,

                 「봄밤에」


홑씨처럼 가볍게 날아간 것. 그것은 삶에서 내게 주어진 이름이다. 죽음에서 시작되는 이름이 바로 묘비명이다. 그것은 삶에서 얻은 이름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긴 하지만, 모든 신생아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는 이름과는 다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날 것 그대로의 안타까움과 따뜻함이 호젓이 쌍을 이루는 잔잔한 물결무늬로 남는 삶을 살아 본 사람의 것이다.

짖는다. 짖고, 짖고 짖는다. 가만히 시의 리듬을 들어보면,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비록 시어에서는 ‘개’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은 흡사 나 일수도 아니면 사랑하는 ‘그대’ 일 수도 있다. 내가 그대를 부르고, 그대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볼 수 없는 허상이기 때문에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 두부장수, 오토바이, 수많은 발 소리들, 이 모든 것은 집 안에 묶여 있는 ‘개’에게는 대문 소리이다. 언제나 낯익지만, 언제나 낯선 타인인 그대에게 단 1초도 견디지 못한 한 없이 부끄러운 사랑이 있다.

잠깐의 인터미션 시간도 없이, 북 콘서트는 열기를 몰아 소설가 김중혁을 불렀다.


나는 예전부터 죽음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내가 죽는다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한때는 모든게 부질없게 여겨졌다. 관계란, 사랑이란, 집착이란, 실망이란,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았고, 끝이 뻔히 보이는 길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일에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처음과 끝은 중요한게 아닐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도미노로서 이곳에 서 있을 뿐이다. (김중혁, 『좀비들』, p.375~376)

김중혁의 첫 장편 『좀비들』이 선을 보인 이 날의 자리는, 작가만큼 그 것을 기다리는 독자에게도 가슴 설레는 자리였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는 그와 근작『좀비들』의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렸다. 오늘 그와 함께한 초청 가수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였다.

개인적으로도 오랜 지기인 그들은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소설 『좀비들』을 말했다.

일단 그들의 낭독을 우리도 들어보자. 책은 164 페이지다.

“태어난 날 앞에 별을 그리는 건 우주에서 이 땅에 별로 떨어졌다는 거예요. 죽은 날 앞에 더하기를 그리는 건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좀비들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뜻이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비라는 존재가 멋지게 느껴지는 데요.”

“가끔 아주 가끔. 아침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때 뽀얀 도시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문득 그들이 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가 김중혁이 들려주는 말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군중 속에 각 개인은 모두 어떤 삶의 목적 내지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도시 속에 군중은,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 시대>에 나오는 첫 오프닝 씬 양떼들처럼 먹이만을 쫒아 살아가는 시스템의 부품 같다.

김중혁의 소설은 재미있다. 이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뭘까? 당연히 이야기를 이끄는 캐릭터의 힘일 것이다. 삶을 감정을 수치로만 계산하고 재단하는 주인공. 그런 그가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슈퍼맨처럼 활약해하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면서도 극한 상황에서는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몸을 날리는 뚱보 130. 베일에 쌓여 소설 중 후반까지 독자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홍이안 모녀. 우리는 그 무엇 하나 놓쳐서는 안된다.

김중혁 작가는 자신을 대중 작가라고 말한다. 좀비와 관련된 영화를 많이 보셨나요?라는 사회자의 질문이 있었다. 그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자신의 힘은 대중적 요소에서 나온다고 했다.

“장편 소설을 쓰다 보니까. 장편과 단편이 다른 게 단편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스치는 세계이다. 장편은 큰 세계이다. 결국은 우리가 죽어 있는 것은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숨을 쉬고 안 쉬고로 나눌 수는 없는 것 같다. 대충 만든 캐릭터도 있다. 절박한 인간이 없다. 죽자 살자 달려 들지 않고. 피를 토하거나 그런 인물도 없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해도 태평하다. 작가인 내가 그런 것 같다. 소설 주인공을 힘든 상황에 놓이게 만들고 싶지 않고, 그렇더라도 그것이 농담 같았으면 좋겠다.”


“농담 같았으면 좋겠다.” 는 말이 시종일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말초감각만을 건드리는 여타의 대중 문학과 다르게 김중혁의 문학세계는 위트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시 물어보면,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에 호응하고 감동을 받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혹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집 정리를 하고 다시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고, 하는 등의 생활이 그렇다.

삶에 있어 진지함은 어쩌면 단 한순간. 그런 극적인 순간이 진지한게 아니라, 이렇듯 낱알을 살아가는 모습 하나, 하나가 모여 진지함을 만드는 것 아닐까.

한가위가 지나갈 때쯤이면 찾아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둠벙’ 이라는 말이다. 둠벙은 저수지나 못등을 가리키는 충청 전라의 방언이다. 바짓단에 뭍은 흙을 툭툭 털면서 ‘둠벙에서 맥 감고 오니라’ 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한 번도 토방 마루에서 엉덩이를 가볍게 놀린 적이 없었다.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엉기적 일어나 대문을 열고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오 분이면 다녀올 거리를, 사금파리처럼 볕이 반짝이는 나뭇가지를 처다 보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땟 국물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는 밭에 해온 옥수수며, 밤을 양껏 삶아 놓으셨다.

어쩌면 이날 만난 장석남 시인과 김중혁 소설가는 ‘지나갈 것의 상처’ 와 ‘지나온 것의 원인’ 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것에 정상이 무엇이다고 정의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가고 있고, 언젠가는 그 가는 걸음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내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사라진 낡은 단어 ‘둠벙’ 이 있는 것처럼 시인 장석남은 살아갈 부끄러움이 ‘떨림’으로 우리에게 전해졌고, 소설가 김중혁은 우리가 이 삶을 극복해야 하는 의지가 ‘도미노’ 라는 말해 녹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날의 북 콘서트가 내 삶의 일직선에 작은 사건이었고. 이윽고 이것은 다른 내 삶의 한 부분에 원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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