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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천재 음악소녀 장덕 - 장덕 <님 떠난 후> (1986)

우리에겐 아마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장덕’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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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아마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장덕’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여성 싱어 송 라이터가 두드러지지 않았던 1980년대에 뛰어난 작곡실력으로 ‘천재소녀’라는 찬사를 받았었죠. 오빠 ‘장현’과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여러 히트곡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여성 ‘가수 겸 작편곡자 겸 프로듀서’였던 장덕. 2010년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해이죠. 이 의미를 되새기며 감상해보세요.

장덕 <님 떠난 후> (1986)

지금의 음악수요자들에게 장덕이란 이름은 기껏해야 이은하의 노래 「미소를 띠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리메이크되었을 때 그 작곡자가 장덕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것 외에는 딱히 두드러진 연관을 맺기 어려울 것이다. 스물여덟 살이 채 되지 않은 1990년 2월에 요절했으니 기억 범위가 넓지 못한 신세대들에게는 시차가 아득하다. 그때는 아직 신승훈도, 서태지와 아이들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음악 팬들이 장덕이라는 존재에 붙이는 감정의 편린은 ‘놀라움’이란 것이었다. 1977년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으로 출전한 MBC 국제가요제(1회)에서 작곡자가 지휘를 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곡을 쓴 겨우 고교 1학년 학생이 지휘자로 나섰을 때 시청자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게다가 중2에 그 곡을 썼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천재소녀’란 찬사를 보냈다.

곧바로 오빠 장현과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낸 1978년 앨범에서는 「순진한 아이」와 「꼬마인형」이 히트되었다. 2곡을 포함한 앨범 대부분의 곡을 쓰고 노랫말을 붙인 자 또한 장덕이었다. 지금도 결코 흔하지 않지만 당시에 ‘여성 작곡자’의 존재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여자의 터전은 어디까지나 가수였을 뿐이다. 그 주체가 다름 아닌 미성년 여자, 틴에이저 걸이라는 사실은 한층 일반의 쇼크를 불렀다.

장덕의 곡 재능, 언어 감수성, 보컬의 특성 그리고 브랜드파워를 축약하는 저장물이 1986년 6월에 녹음한 바로 이 앨범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당시 <가요 톱10>에 연속 5주간 1위를 차지한 빅 히트송 「님 떠난 후」가 있다. 돌이켜보면 결코 재능에 상응하는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장덕 음악인생의 하이라이트라 할만하다. 후속곡인 긴 제목의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도 격찬을 받으며 라디오전파를 수놓았다.

대중적 호응은 2곡에 머물렀지만 수록된 9곡(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을 빼고)에 걸쳐 구현된 장덕의 빼어난 멜로디 주조 술은 가히 천재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 꽤나 활동경력을 쌓은 시점이었지만 겨우 스물네 살의 나이.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귀에 잘 잡히는 이른바 캐치 멜로디(catchy melody) 창작에 대한 원초적 본능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님 떠난 후」를 비롯해 LP 앞면의 마지막 곡 「아무도」와 뒷면의 「비가 내려요」 「어느 날 갑자기」 등 어떤 곡에서든 코드 변화와 조 옮김의 기술을 통해 주요 선율을 확실히 부각하고 있다.

재킷에 아로새겨져 있듯이 애초 「님 떠난 후」와 「이팔청춘의 고백」을 각 면의 머리 곡으로 내세웠다. 「이팔청춘의 고백」의 경우 부담 없는 트로트 성향의 멜로디로 다세대에게 어필할 가능성이 엿보였지만 의외로 후속곡의 영광은 당시 주류 가요의 멜로디 패턴에 더 가까웠던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가 누렸다. 그 무렵 가요수요자들이 조금은 전통가요 스타일을 꺼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덕의 재기(才氣)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은 1980년대 발라드 확립에 견인차 역할을 한 편곡자이자 건반 연주자인 김명곤이다. 「사랑해줘요」가 말해주듯 빠른 템포로 시작해서 곧바로 무드를 잡아가는 전개 방식은 김명곤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소외」의 간주 부분에서도 그의 오르간 솔로는 빛을 발하며 「아무도」의 완성도가 유난히도 높게 들리는 것도 군데군데 긴장감을 구사하는 그의 편곡기술의 덕이다. 김명곤에 의해서 장덕의 곡이 한층 ‘예뻐진’ 것이다.

이 앨범이 장덕이라는 ‘아티스트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요소는 편곡의 결정적인 음우(陰佑)에 힘입은 곡보다도 어쩌면 가사일지 모른다. 남이 기획해준 것이 아닌,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전하는 아티스트의 독창성은 노랫말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덕의 약물과용에 따른 이른 죽음이 시사하는,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누를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다.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 평상심으로는 접근이 어려울 만큼, 누구도 치유해줄 수 없을 것 같은 짙은 고독과 쓸쓸함이 도처에 퍼져있다.

‘사랑했던 사람은/ 곁에 없지만/ 사랑했던 마음은 남아 있어요/ 홀로 남아 이렇게 생각해봐도 어쩌면은 그것은 잘된 일이야’ - 「님 떠난 후」

‘슬픈 이별은 정말 싫어요/ 그건 너무 외로워요’ - 「사랑해줘요」

‘외로이 앉아 있는 내 마음은/ 자꾸만 슬프게 했죠/ … 자꾸만 느껴지는 소외감 속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네 - 「소외」

‘하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나에겐 애인이 없었어요/ 나에겐 친구도 없었어요/ 나에겐 사랑해줄 사람도/ 내 곁엔 무엇이 남아있나/ 그저 외로운 인생/ 그저 외로운 인생’ - 「아무도」

‘지금 내 맘에 당신은 가고/ 혼자 돼버린/ 나의 볼에도 비가 내려요’ - 「비가 내려요」


어릴 적 부모의 이혼 그리고 가수로 데뷔했을 때도 뮤지션의 예술 혼을 미디어의 질서에 부속시켜버리는 음악계의 억압적 질서, 그것과의 불가피한 충돌에서 장덕에게 돌아오는 것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장기에서부터 또 이후의 경험을 통해서도 세상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상큼하고 밝은 사운드 속에서도 불가피한 어둠의 정서는 사그라질 수 없는 것이었고 당연히 그의 슬픈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그에게 포착된 것은 ‘사랑’이 아닌 ‘이별’이었고 ‘함께’가 아닌 ‘홀로’였다.

음악은 유일하게 흔들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의 웅크린 자아를 바라보는 거울이었을지 모른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음악이었다. 장덕의 언어는 비록 모호한 체념과 사실성의 배제라는 점에서 지극히 1980년대적이긴 했지만, 10대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상업적) 감각을 드러내는 한편 정체성을 찾으려는 진실한 몸부림을 담았다는 점에서 시공을 넘는 치열한 예술성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난 지금까지 너무 다른 곳에서/ 방황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돌아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잊었던 거예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지금껏 나는 어디서 헤매고 있었을 까요/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애를 써 봐도/ 도무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 「어느 날 갑자기」 중에서

그는 ‘예정된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앨범이 나온 지 4년 만에 치사량의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7개월 후에는 오빠 장현 마저 설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연속의 가혹한 운명을 잔인하게도 국내 음악계는 쉬 잊어버렸다. 사후의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만이 그의 죽음에 행해진 걸맞은 우리의 예의였다.

1980년대를 특징 지어준 ‘에코’ 녹음 사운드가 전편을 덮고 있어 케케묵은 느낌을 준다. 어느 면에서나 지금 음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살을 붙이고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저 옛날의 앨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한 천재의 음악세계에 대한 우리의 망각을 벌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유산이라고 할 기록물이다. 출중하지만 무게중심이 낮은 틴 세대감각과 함께 그 불길한 정서가 공존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이적이다. 우리는 더러 경이를 경이로 바라보지 않는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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