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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막걸리 마니아를 유혹하는 남해 다랭이 마을

소 쟁기질이, 허리 굽혀 모를 심는 농사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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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다랭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 위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마늘 수확을 마치고 물을 댄 논에는 한 뼘 크기의 모가 열에 맞춰 심겨 있었다. 몸빼 바지를 입은 마을 아낙 몇이 써레질을 끝낸 논에서 허리 굽혀 일을 하고 있었고, 또 몇은 집 앞 큰길에 나와 수확한 마늘을 손질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논을 스칠 때마다 물 댄 논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 | 시공사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옆 사람과 벌이는 신경전에 주먹을 불끈 쥐나요? 혹은, 오늘도 사수한테 어김없이 깨지고는 안주머니에 넣어 둔 사표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나요?”
이 책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자신을 다독이고 위안하는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의 ‘소도시’들이다. 그곳에서 푸근한 동네 사람들의 노변정담에 끼어 보고, 맛나는 지역 음식도 맛보고,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도 둘러보면서 여행자는 일상에서부터 가져온 묵직한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놓아 버린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 갑자기 찾아온 휴식같은 시간. 여행자는 길 위에서 새삼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는다.
그 바다 앞 논두렁에서


“옛날에요, 한 농부가 자기 논서 일을 하다가, 논이 몇 개인지 세알리고 세알렸는데 아무리 세알리도 하나가 모질라타 안 헙니까. 힘이 들어가지고 땀이나 닦을라꼬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었다 하데요.”

이 말을 하고는 김효용 씨가 막 웃었다. ‘배미’는 논을 새는 단위인데, 논 한 배미가 삿갓 아래 쏙 숨을 만큼 작은 크기라 ‘삿갓배미’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명을 하면서다.

“다랭이 마을 논은 모다 680개지요. 큰 논은 300평짜리도 있고예, 작은 건 3평쯤 돼요. 거그는 소도 못 들어가는 기라예. 사람이 직접 들어가 쟁기질도 하고 모도 심지예.”

그와 나는 다랭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 위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마늘 수확을 마치고 물을 댄 논에는 한 뼘 크기의 모가 열에 맞춰 심겨 있었다. 몸빼 바지를 입은 마을 아낙 몇이 써레질을 끝낸 논에서 허리 굽혀 일을 하고 있었고, 또 몇은 집 앞 큰길에 나와 수확한 마늘을 손질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논을 스칠 때마다 물 댄 논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어떤 바람에는 알싸한 마늘 냄새가 실려 있었고 또 어떤 바람에서는 신선한 거름 냄새,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냄새를 가진 바람들은 섞이지 않고 저마다 살아 따로따로 날아다녔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소박했지만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도시 살다 돌아온 것도 다 이 때문이라예. 어렸을 때 집에 누우면 들리는 양철 지붕 위로 또독또독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랑 다 자란 벼가 바람에 한들한들대는 모습이 자꾸 생각나 결국은 고향집으로 돌아왔지예.”

다랭이 마을의 살림을 맡고 있는 사무장 김효용 씨가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을 애인 보듯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구불구불 섬 모양대로 길을 낸 1024번 도로를 따라가면 남해 여행의 종점인 다랭이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앵강만을 끼고 도는 이 해안도로는 달리는 맛을 알게 해 준다.


그 길 위에서 만난 다랭이 마을. 크고 작은 108개의 논이 설흘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듯 등고선을 그리며 자리하고, 그 어여쁜 논들 사이로 마을은 숨은 듯 들어앉았다. 1년에 너덧 번쯤 내리는 싸래기 눈도 그나마 한 시간 남짓이면 모두 사라지고 없을 만큼 해 잘 드는 따스한 마을, 지천이 푸른 바다이면서도 거친 파도 탓에 배 닿을 곳을 만들 수 없어 모든 주민이 농사일을 한다는 바닷가 농촌 마을, 논밭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집들이 더없이 가깝게 붙어 지어진 마을, 들고 나는 일 없이 대대로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이라는 의리있는 마을… 덜렁 쉰여덟 가구가 사는 이 작은 마을에 담긴 이야기들은 평범치 않다.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저 논에서 일하는 건 무지 힘들어예.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얻기 위해 직각으로 석축을 했던 기라예. 층과 층 사이가 9m 높이인 곳도 있어예. 소도 한눈 팔면 떨어질 정도지예.”

이방인의 눈에 비친 더없이 멋들어진 소 쟁기질이, 허리 굽혀 모를 심는 농사꾼의 모습이 부러 꾸며낸 것이 아니다. 기계가 들어갈 수 없으니 하는 수 없다. 번거롭지만 힘센 황소에게 부탁하고, 힘들지만 사람 손이 가야 한다. 다랭이 논을 내려다보며 ‘이야, 경치 조오타!’ 하고 감탄했던 것이 떠올라 조금 민망해졌다. 아름다운 모습을 한 108개 층층 논에 숨겨진 수고로운 이야기 때문이었다.

날도 더운데 막걸리나 한 사발 하자며 김효용 씨가 우리를 이끌었다. 마을에는 농주를 빚는 집이 네 곳쯤 있는데, 집집마다 다 맛이 다르단다. 그 중 조막심 할머니네 막걸릿집으로 갔다. 겉으로 보기에도 지은 지 50년은 더 돼 보이는 조 할머니네 집 마당은 이미 출출한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할머니의 손녀가 막걸리와 반찬 몇 가지를 내왔다. 가파른 마을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더니 목이 마르다. 시원하게 꿀꺽. 향기로운 탁주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상큼한 꽃향기가 났는데 유자잎 냄새란다.

“내 예전에 인절미 만들 때, 콩고물에 유자잎을 말리 갈아 였거든. 근데 그기 억수 맛났다. 그래서 한번 막걸리에도 넣어 오래오래 삭혀 봤는데, 맛도 있고, 아무리 좝솨도 머리가 안 아픈 기라. 이건 약이데이. 쭉 마시그라.”


여든이 넘으신 조 할머니의 농익은 사투리만큼 진한 막걸리는 참 맛났다. 뜨끈하게 막 부쳐낸 부추전도 일품이다. 꿀떡꿀떡 잘도 마시는 모습이 마음에 드셨는지 할머니가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할머니, 막걸리 빚는 건 누구에게 배우셨어요?”

“예끼! 배우긴 누구한테 배우꼬. 낸 독학했다. 원래는 농사철에만 일꾼들 멕일라고 막걸리를 맹글었다. 청년회 머스마들이 하도 마을 손님들 올 때 대접해야 한다 해 싸서 담갔는데, 그게 그렇게 맛나다 하드라. 내 술 얻어 묵을라고 줄을 저만큼 섰다 아이가.”

다랭이 마을이 아름답다고 소문나기 전에도 마을 뒤 설흘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았다. 그 땐 마을에 식당 하나 변변히 없었는데,등산을 마친 사람들이 하도 아우성을 쳐 마을 청년회에서 조 할머니를 설득해 막걸릿집을 내게 한 것이다.

할머니의 막걸리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마을 이야기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일본군의 위안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에 다랭이 마을로 시집왔던 때를 잊지 못하신다고 했다.

“애고,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는 마을길이 하도 사나워 고생 마이 했다. 지금 맨키로 좋았겠나. 그래도 갱치 하나는 끝내줬다. 저 언덕 위에 서믄 바다가 벌~겠다. 얼라 머리통만 한 멍게가 가득했다. 마을 머구리(‘잠수부’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가 마이도 주버 왔다.”

조막심 할머니의 막걸리는 생각보다 도수가 셌다. 뱃속이 뜨끈해지며 얼굴이 벌게진다. 바짝 마른 여름날의 해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눈앞이 아롱거린다. 역시 막걸리는 주의를 요하는 술이다.

- 본문 中에서

여행자의 수.첩.


가.기.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빠져나와 남해 방면으로 내려오면 10분 거리에 남해대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 77번 국도로 남해읍까지 온 다음, 1024번 국도를 따라가면 다랭이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서울에서 5시간 정도 걸린다. 남해읍에서 하루에 열세 번 군내버스가 다랭이 마을까지 온다. 마을 안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할 수 없다. 마을 위쪽 관광안내소 주차장에 세우고 마을까지는 걸어 내려와야 한다.

먹.기.
막걸리와 간단한 식사거리를 파는 집이 네 군데쯤 있다. 조막심 할머니가 운영하는 시골할매막걸리(055-862-8381)가 제일 유명하다. 직접 기르는 유자나무 밭에서 한 잎 한 잎 정성들여 따온 유자잎을 잘 씻어 말린 뒤, 술 거를 때 함께 넣고 20일쯤 발효시킨 할머니표 유자잎막걸리가 전매특허(한 병에 5,000원). 집집마다 막걸리 맛이 다 다르다고 하니 마니아들은 도전해 볼 것.

머.물.기.
다랭이 마을 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민박집이 마을 곳곳에 있다. 대부분의 집에서 남해의 쪽빛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도 느낄 수 있다. 박영자 씨가 운영하는 긴돌담집(055-862-8222)에서 1박을 했는데, 황토집 특유의 편안함 덕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화장실과 샤워 시설, 주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불편함도 없었다. 마을에는 20여 개의 민박집이 있고 대부분 비슷한 가격대다. 민박집 정보는 다랭이 마을 홈페이지에서 얻을 수 있다.

해.보.기.
다랭이 마을은 2005년 국가 명승지 15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마을을 개척한 선조들이 지게를 지고 다녔던 옛 길인 지겟길이 복원됐다. 해안가 절벽에 복원된 2.5km 길이의 지겟길은 다랭이 마을 사람들이 지게에 흙과 나무, 거름 등을 지고 다니며 농토를 만들고 일구기 위해 낸 길이다. 설흘산 등산이 부담스럽다면 이른 아침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곳을 산책해 보자. 지리산 둘레길, 제주의 올레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길이 펼쳐진다. 또한 다랭이 마을에선 다양한 농어촌 체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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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10,8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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