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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밤이란 대지 자체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그림자였다.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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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한 발 앞서 목상이 적어놓았다던 그 문장을 찾아냈다. 읽어주는 건 아니겠지, 설마. 다행히도 목상은 그 문장이 적힌 쪽을 펴서 내밀었다. 묘은 언니가 먼저 읽더니 그래, 바로 그거야, 말했다.

9

“그림자?”

“이상할까요?”

지레 겁먹었다. 견지 형은 잠깐, 시선을 먼 데 두었다.

“아니…… 괜찮은데. 어떤 그림자를 그릴 건데?”

“뭐…… 사람도 있고, 나무 그림자도 있고.”

내가 머뭇거리는 것이 신통치 않았는지 견지 형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물체는 그림자만 보고도 뭔지 알지만 어떤 것은 알 수 없잖아. 둘 다 그려보고, 너도 까먹을 것 같은 건 적어둬. 그리고 그림자가 가까이 있으면 진하고 멀리 떨어지면 흐리잖아. 햇빛이 강할수록 진하고. 그런 차이도 재미있을 것 같고……. 그리고 그림자 드로잉 알아? 프로필 그리는 거. 이렇게, 그림자로 비친 옆모습 그리는 거 알지? 그런 식으로 아예 종이를 깔고 그 위에 그림자를 지게 해서 라인을 따라 그린다든지.”

바쁘게 스케치북 위에 단어들을 받아적으면서 견지 형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견지 형은 받아쓸 시간을 주듯 잠깐 멈추었다. 바쁘게 되짚어가며 받아적느라 견지 형이 한 말을 흘려들었다.

“……빛을 알아야 그림자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 빛이요?”

물었을 때 견지 형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색깔…… 그림자 색깔이 뭘까?”

“파랑?”

내 대답에 견지 형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림자는 어두운 파랑 같다. 나무 그늘 아래 걸으면 땅을 덮고 흔들리는 그림자는 투명한 파랑. 견지 형은 재미있어했다.

“좋아, 그런데 그 파랑이 바탕 색깔과 어떻게 어우러지고, 변하는지도 봐. 그리고…….”

“잠깐, 거기까지만요.”

말을 잘랐다.

“형이 다 말하면 따라하는 거 같아져서 재미없잖아요. 하다가 막히면 그때 물어볼게요.”

“컸다, 초우.”

견지 형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림자라. 뭔가 괜찮은 문장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묘은 언니는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목상도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뒤적였다.

“나도 본 거 같아. 적어놨는데, 그 문장.”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한 발 앞서 목상이 적어놓았다던 그 문장을 찾아냈다.
읽어주는 건 아니겠지, 설마. 다행히도 목상은 그 문장이 적힌 쪽을 펴서 내밀었다. 묘은 언니가 먼저 읽더니 그래, 바로 그거야,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밤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밤이란 대지 자체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그림자였다.’

높은 탑을 올라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등 뒤는 이미 어두운데 앞으로는 태양이 계속 보이고, 산이 땅끝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지구를 생각해봐. 지구는 우주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지. 그 그림자는 끝없이 뻗어가겠지. 받아주는 배경이 있어야 그림자도 멈출 수 있는 거잖아.”

“언니. 너무 멀리 나가고 있어요.”

내가 중얼거리자 목상이 큭큭 웃었다.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처음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그림자가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리려 하면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림자는 너무 빨리 변하고 쉽게 흔들렸다. 바람 한 줄기에 나뭇잎들이 바르르 떨리면 그림자는 산산조각 났다. 몰입해서 그리다보면 스케치북 위의 그림자와 바닥의 그림자는 이미 달라져 있곤 했다.

투명한 것의 그림자를 그리는 일,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의 그림자를 그리는 일도 어려웠다.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서 바닥 재질을 표현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그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밤의 그림자는 훨씬 재미있었다. 계림 언니가 수성 잉크를 칠한 종이에 락스로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검푸른 그림자 색 위로 주황 노랑 선. 밤 위에 빛을 그리는 법이었다. 밤의 그림자는 낮보다 복잡하고 섬세했다. 등불들이 많아서 광원이 많으니까 방향도 짙기도 제각기인 그림자들이 겹쳤다.

연필로 검게 칠한 기름종이를 작게 잘라 그림자 모양으로 붙여보기도 하고 휴지에 잉크를 묻혀 찍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림자는 형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자가 없다면 색도 형태도 분명할 수가 없다. 그림자 없는 세상은 지나치게 밝고 눈부실 것이다.

칠월 말에는 다들 백 장 프로젝트의 감을 잡은 듯했다. 아운이는 색깔을 그린다고 했고 경하는 손을 선택했다. 나도 손 생각했었는데! 반가워하려다 못했다. 주영이는 의자였다. 강강이는 빵이라고 해서 너다워, 귀여워 그러고 웃다가 그려놓은 것을 본 다음에는 반성했다.

태현이는 나뭇잎을 그린다며 주머니 가득 나뭇잎이며 풀잎을 뜯어 담아왔는데, 작업실 창가에 걸터앉아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창 너머의 플라타너스 잎을 그리다가 위험한 짓을 한다고 윤샘에게 잔뜩 야단맞았다. 규성이는 1부터 100까지, 숫자를 그리는데 간판이나 버스 번호처럼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그린다고 했고 목상은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다고 했다.

묘은 언니는 백 장 프로젝트를 사진으로 찍는다고 했다. 취미로 작업실에 나오는 묘은 언니만은 백 장을 모두 사진으로 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게 훨씬 쉽겠다! 말했다가 구박만 받았다.

“그래서 뭘 찍을 건데요?”

“녹.”

“녹?”

못 알아듣고 되묻는 내게 묘은 언니는 카메라를 내밀었다. 녹슨 자물쇠. 트럭 바퀴. 철문. 맨홀…… 녹슨 것들. 우와, 멋지다 호들갑을 떨었더니 카메라 떨어뜨리지나 말라고 했다.

“백 장 현상하려면 그게 얼마야. 그리는 건 돈도 거의 안 들고 얼마나 좋냐?”

“모르시는 말씀. 재료비 꽤 들어요.”

“한 번 구입하면 오래 쓰잖아, 종이는 별로 비싸지도 않고.”

“좋은 거 사려면 비싼데.”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재료를 쓸 필요가 있어?”

쿡 찔러놓고서, 묘은 언니는 작업실 안에서도 녹을 찾는다고 온통 뒤지고 다녔다.
이환은 무엇을 그리는지 끝까지 말을 안 하려고 했다.

“왜 그래요, 내가 따라할까봐? 안 따라해요. 나 그림자 그리기로 했다니까? 벌써 시작했는데.”

“나중에 봐, 나중에.”

“앗, 혹시 나 따라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림자 그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 안 해주는 거고?”

“아이 참, 아니라니까.”

이환은 웃더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말하면서 슬쩍 스케치북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커다란 스케치북을 채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누워 있고 웅크리고 있는 지저분한 얼굴과 더러운 옷. 술병과 빈 박스와 구겨진 이불들. 길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생각도 못한 일이어서, 겨우,

“안 무서워요? 그리지 말라고 안 그러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내가 당황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환은 종이 가장자리를 구깃구깃 접으며 마지못해 말했다.

“거기 학수 아저씨라고 계시는데…… 그분이랑 얘기를 하다보니까, 원래 그림 그리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냥 와서 그려도 된다고 해서.”

“그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이 불편했다. 사람이잖아요, 살아온 인생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정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려도 되는 거예요?

“보기 좋으라고 그리는 거 아냐.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하지만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해보고 싶어.”

이환은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도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그림은 결국 자기가 그리는 것이다. 선택도 책임도 이환의 몫인 거니까, 나도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환 자신도 자기가 이걸 왜 그리고 있는지는 모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그림자 그림 위에 손을 올렸다. 물감이 말라 살짝 우그러진 종이가 간지러웠다. 나는 왜 그림자를 택한 것일까? 그리다보면 답을 찾고, 왜 그리고 있는지 알게 될까. 꽤 많이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세보니까 스물세 장이었다. 언제 백 장을 다 그리나 싶어서 한숨을 쉬는데 견지 형이 와서 쓱쓱 훑어보았다.

“많이 돌아다니긴 했구나.”

일단은 칭찬이었다.

“백 장이 쉬운 게 아니야. 중간에 지겨워 미칠 것 같은 때가 올 거야. 그걸 넘느냐 못 넘느냐지. 끝까지 가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더 쉽게 넘을 수 있게 돼. 특히 초우 너는 지금 참을성을 배워야 할 때지. 백 장 그리면서 많이 참아봐.”

“이미 참고 있는데요.”

대답했더니 아직 멀었다며 혀를 찼다. 견지 형은 다시 내 그림을 죽 보면서 말을 이었다.

“초우야, 하나의 그림 안에 리듬이 있듯이 네가 그리는 그림들 사이에도 리듬이 있어. 어떨 때는 멈춰서 오래 시간을 끌어야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달려 날아가야 해. 어떤 그림에 하루를 투자했다면 어떤 그림은 십오 분 만에 그리는 거지. 빨리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성의 없거나 나쁜 건 아니야. 오래 그린 그림이 꼭 좋은 그림이 아닌 것처럼.”

그릴 거 웬만큼 다 그려서 이젠 뭘 그려도 반복일 것 같다고 말하니 견지 형은 시점을 바꿔보라고 말했다.

“높은 데를 가거나 무릎을 굽히는 연습이 필요해. 같은 것이라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니까.”

“시선의 높이를 바꿔보라고요?”

견지 형은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뭔가를 볼 때 그게 널 보면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본 적 있어? 벽 틈에, 민들레가 피잖아. 너는 그걸 내려다보고. 근데 그 민들레가 널 보면 어떻게 보일까. 네 뒤로는 어떤 배경이 보일까.”

순식간에 상상이 되었다. 나는 무척 거대해 보이겠지. 내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겠지.

“우리는 보는 장소를 정하고, 보고, 그리지. 내가 지금 보는 것은 나밖에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도리어 나를 보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장소를 보면서 저기 있음 정말 좋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보이는 것들이 온통 추악하고 괴로울지도 몰라. 반대로 저기 있으면 너무 힘들겠다 생각한 장소가 최고의 풍경을 제공하는 장소일 수도 있고. 그건 자기밖에 모르지.”

견지 형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지금 보는 것은 나밖에 보지 못한다는 말은 분명히 이해했다. 남들이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 그들은 결국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벽 아래 핀 강아지풀을 보았다. 해질녘 서향 벽에 새겨진 강아지풀의 날카로운 그림자. 아름다웠다. 아무 생각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스케치북을 펴고 연필을 집어 강아지풀과 그 뒤의 그림자를 그렸다. 하얀 종이 위에,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강아지풀이, 그 날카롭고 얇고 분명한 그림자가 그려졌다. 마음에 새겨지는 것처럼 그것을 그렸다.

다 그리고 났을 때는 그 시간이 통째로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느새 해는 건물 아래로 숨어 어둠이 내려온 탓에 강아지풀 그림자는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 잃어버린 무언가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스케치북에 강아지풀의 그림자가 담겨 있었다. 그건 그 순간 그곳에 있었던 나만이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목상의 칠월이 가고 태현이의 팔월이 왔다. 태현이가 선명한 빨강과 하양으로 그린 달력을 거는데 규성이가 삐딱하게 서서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시비 걸려고 저러나, 또 싸우는 거 아냐 조마조마해하는데 규성이가 말했다.

“잘 만들었네.”

그러더니 태현이의 반응도 보지 않고 홱 돌아 걸어가버렸다. 의자에 올라선 태현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규성이 뒷모습을 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 웃는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걸 알고 태현이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작업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다보면 좋든 싫든 결국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서로의 그림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강점과 약점들을 알게 되고 버릇도 보인다. 성장하고 있거나 멈춰 있는 것에 대한 감각.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보다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초우 언니 이젠 비뚤어지지 않네요.”

주영이가 말을 걸었을 때 정말 기분 좋았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좋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주영이는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왜 내가 말해서 더 좋은 건데요?”

“너 잘하잖아.”

휴우, 주영이는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잘하는 걸까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음료수를 사주겠다고 같이 나왔다. 날이 너무 후텁지근하다고 투덜거린 말이 씨가 된 건지, 편의점까지 갈 때는 하늘이 어둡고 무겁기만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칠 때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겠다 싶어서 편의점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공모전…… 봐둔 거 몇 개 있는데, 할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주영이는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고민을 들어줄 마음을 먹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림에 있어서는 내가 주영이보다 훨씬 후배인 건데.

“견지 형하고 상담해봐, 그럼.”

가볍게 말했는데 주영이는 아니요, 됐어요, 그랬다.

“견지 형은, 저 안 좋아해요.”

웃어넘기려다가 표정이 심각해서 나도 심각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견지 형은, 창의적이고 자유롭고 그런 거 좋아하는데 전 안 그렇잖아요.”

똑 부러지게 말하고 난 주영이는,

“그래도 언니는, 견지 형 스타일이니까.”

“뭐? 그런 거 따질래, 진짜. 그렇게 치면 너는 완전 윤샘 스타일이잖아. 윤샘이 날 얼마나 골칫거리로 생각하는데.”

과장되게 한탄을 하자 주영이가 웃었다.

“그래도 물어는 봐. 야, 네가 돈 내고 여기 다니는 거지 견지 형이 널 거둬다가 그림 시키는 입장은 아니잖아. 응?”

일부러 세게 말해놓고 나니 갑갑해졌다.

“난 계속 그림 그릴지 아닐지도 아직 모르겠어.”

“언니 미대 안 갈 거예요?”

주영이가 놀랐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공식적으로는 분명히 일반부이고, 입시 생각은 없다고 처음에 말했었다. 하지만 윤샘도 그렇고, 다들 내가 당연히 입시를 한다고 생각한다. 견지 형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마음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일까?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 싫은데. 분명해지고 싶다. 언제든 발뺄 수 있는 것처럼 물러설 길을 만들어놓는 건 싫다.

그림을 정말 해보겠노라고 결정한다면, 지금처럼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을까. 말하지 못했던 건우 오빠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싶었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오빠를, 그때를 알아간다.

“아직 잘 모르겠어. 아 진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

누가 넌 괜찮은 애야, 잘하고 있어 말해준다면 괜찮을까. 내가 누군가의 옆에 서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좋은 것이겠다. 진짜로 괜찮은 사람 옆에서, 거짓말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감탄할 수 있는 사람 옆에서…… 유경하 같은.

“언니, 왜 그래요?”

주영이가 놀라며 넘어진 내 캔커피를 바로 세웠다. 뭐야…… 나 진짜 미쳤다.

“하늘이 밝아지는데요. 비가 그칠 건가봐요.”

주영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몸을 꼭 짜서 비를 내리고 가뿐해진 하얗고 밝은 구름이 빠르게 움직여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나는 그냥, 비가 계속 내렸음 싶기도 했다.


견지 형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기대하라고 말했던 세 번째 프로젝트의 정체가 밝혀졌다.
늦게 끝날 거니까 미리 부모님께 말씀 드리라는 말과 함께 나눠준 통신문에는 연주자 그리기, 라고 씌어 있었다. 재즈클럽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그리러 간다는 얘기였다. 일반부 강사로 알바를 하는 수정 언니의 남자친구의 형이 하는 재즈밴드라고 했다. 대학 보낸 보람이 있다고, 견지 형은 기뻐했다.

“내 오랜 숙원이었어. 재즈 좋아해?”

견지 형이 싱글벙글 웃으며 묻자 묘은 언니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마음을 열어, 만날 깨고 부수는 그런 음악만 듣지 말고.”

견지 형이 혀를 찼다.

“누드크로키도 하는데 왜 이건 못하게 하는데!”

고등학생 이상만 데려간다는 말에 강강이가 삐졌다.

“너무 애기들이 가면 물 흐려서 안 돼.”

“몰라! 미워!”

“태현이랑 둘이 어디 놀러 가든지.”

“싫어!”

태현이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아하하. 귀여워. 싱글싱글 웃고 있다가 묘은 언니로부터 징그럽게 웃는다는 말을 들었다. 내 웃음이 어디가 어때서!

연주는 밤에 시작한다고 해서 작업실에서 함께 모여 느지막이 출발했다. 대학가 뒷골목 지하였다. 견지 형이 앞섰다.

“우리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허락받았다니깐.”

견지 형은 지하계단을 앞서 내려갔다. 바 안은 아주 어두웠다. 담배 냄새와 뭔가 달큰한 냄새가 났다.

견지 형은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 사람이 우리를 무대 왼쪽 탁자로 인도했다. 탁자에 놓인 예약석 표시를 치워줘서 자리에 앉았다. 한참 있은 뒤에야 눈이 어둠에 익었다. 나무를 짜 맞춰 만든 탁자와 나무 벽. 붉고 파란 가죽을 대고 징을 박아 만든 오래된 의자. 낮은 무대 위에는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악기들. 피아노, 드럼, 콘트라베이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시키고, 견지 형과 정샘이 간단히 방향을 잡아주는 말을 들었다.

“한 사람씩만 그리지 말고 연결해서 하나의 풍경으로도 그려봐.”

“디테일을 잡아. 강조하고 싶은 곳으로 힘을 모으고.”

가벼운 정장 차림의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트럼펫과 클라리넷까지 있다. 긴장되었다. 드럼이 딱딱 박자를 맞춘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시작.
팍, 불꽃이 튀는 것처럼 음들이 튀어나왔다. 손을 놓고 입까지 벌리고 그 음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휘익, 누군가 날카롭지 않게 휘파람을 불고,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빠밤, 빠─

이런 음악이 세상에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막, 춤을 추고 싶었다. 손이 춤추듯 움직였다. 잘되든 잘되지 않든 종이를 계속 넘기면서 흐름을 쫓았다. 음. 리듬.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나는 사람과 악기를 그리고 움직임을 그렸다. 사실은 음악을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로 음악을 그린 건지도 몰랐다.

중간에 이십 분 쉬는 시간이 있었다. 견지 형은 아이들의 스케치북을 휙휙 넘겨가며 그림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틀어놓은 음악에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형은 안 그려요?”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옆에 서 있던 묘은 언니가 고개를 들어 견지 형을 보았다. 견지 형은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다가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대답한 건가? 그리지 않는다고? 견지 형의 몸짓이 뜻하는 바를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안 그린다는 게 아니라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곧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연주자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며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업실 아이들?나의 동료들을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앞쪽 탁자에는 이환과 경하와 규성이가 앉았다. 내 옆에는 아운이가 있고 그 건너편이 주영이. 그 뒤가 목상. 제일 뒤에 앉은 묘은 언니를 흘낏 뒤돌아보았더니 그림은 그리지 않고 몰입한 얼굴로 연주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있었다.

에어컨 때문에 맨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데, 아운이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따스한 온기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내 옆에 나처럼 집중하고 있는, 나처럼 그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벅찼다.

끝나고 나와서 걷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 이상해.넘쳐. 견지 형이든 누구든 붙들고서 너무 재밌었다, 좋았다, 또 하자, 그래야 할 텐데 말이 안 나온다.

스케치북을 넣은 가방만 꼭 끌어안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것은 몰랐을 테지. 이런 마음은, 이렇게 꽉 찬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이렇게 가득 넘칠 수 있다는 것은 몰랐을 거야. 건우 오빠도 이런 것을 봤을까? 그렸을까?

지하철파 버스파로 갈리고 여럿이 버스를 탔는데 하나둘 내리고 경하와 나만 남았다. 사람이 없어서 버스는 비어 있다. 굳이 옆자리에 앉을 건 없어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인석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재밌었지.”

경하가 물었다. 응. 정말로. 너무 좋아서,

“이대로 딱, 박제해놨음 좋겠다.”

“재즈밴드를?”

화들짝 놀란다.

“내가 무슨 엽기살인범인 줄 아니, 지금 이 시간이랄까, 내 기분이랄까…….”

말하다보니 창피해져서 목소리가 점점 줄었는데도 경하는 아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붕 떠 있던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퐁퐁 튀어대는 마음을 하나씩 잡아서 차곡차곡 내려쌓는 기분이었다.

“또 갔으면 좋겠다.”

경하가 말했다. 나도 그랬다. 다 같이, 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이 끊기자 경하 얼굴을 돌아볼 일이 없어졌다. 그냥, 옆에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그 온도로 존재감으로 아는 게 당연하지만 지금 경하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아는 건, 좀 달랐다.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너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반짝거린다는 것을 알아. 너 때문에,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로 마음이 설레고 있어. 그냥 오래도록 버스를 타고 싶었다.

다음 날 다들 그림 그린 것을 가져와서 늘어놓고 같이 보았다.

“초우, 좋다. 잘했네.”

오랜만에 칭찬을 받았다. 내가 봐도 이번 건 좀 마음에 든다. 다른 애들이 그린 것들도 다 근사했다. 강강이는 입을 쑥 내밀고, 좋았겠다…… 한마디 했다. 다 돌아보고 내 자리로 왔더니 규성이가 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처음부터 다시 뒤적였다. 너, 허락도 안 받고…….

“좋네요.”

비꼬는 것도 아니고 못마땅해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부끄러워졌다. 태현이의 달력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나쁘면 나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애였구나. 그러니까 나 정말 못하고 있었던 거구나.

“고맙다.”

나도 솔직하게 말했는데,

“근데 사람 형태가 너무 찌그러지긴 했다. 악기도 비율이 하나도 안 맞고.”

“야!”

그 여름에는 자주 밤을 샜다. 이제껏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애였는데 밤이 좋아졌다. 모든 사물들이 발밑에서 그림자를 끌어올려 뒤집어쓰고 움직이지 않는 시간. 밤에는 바람조차 어두웠다.

쉽게 잠들고 싶지 않았다. 나 그렇게 쉽고 만만한 애 아니야, 잠을 향해 큰소리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닌 밤에도 어째서 그렇게 뿌듯하고 배부르게 새벽을 맞았는지 모르겠다. 단지 잠들지 않고 잠과 함께 그 밤을 견딘 자신이 대견스러워서 어깨를 반듯이 세우고 집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참 많이도 걸어다녔다. 그림자를 찾으러 갈 때는 누구랑 같이 갈 수도 없으니까 혼자서 걸었다. 그림 한 장 못 그리고 땡볕 아래를 한참 걸어 다니다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했다. 봉숭아가 한창이어서 길가 화분에 난 봉숭아꽃을 한 송이 뜯어다가 짓이겨 왼손 새끼손톱에 올려놓으면 물이 들었다. 그러다 옷에 묻으면 붉은 얼룩이 졌다.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거나 잘 안 그려져서 초조해질 때면 헤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던 견지 형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말이 내가 붙들고 갈 지침이 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남의 집 앞 계단에 앉아 한참을 쉬고 있노라면 봄의 그림소풍 생각이 났다. 저 골목을 돌면 강강이가, 아운이가, 이환이, 경하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 같은데. 조금 쓸쓸했다. 그리고 조금 더, 행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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