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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상으로 한국 고등학교는 ‘세계초일류’, 현실은…

교과서와 지식권력 - 틈새교과서, 풀뿌리교과서, 대안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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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의 퇴행을 들어 이념형 대안교과서 운동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극히 부분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교과서 내용을 일정부분 퇴행시킬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 내용에 대해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사회적 합의 수준을 후퇴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식민주의 역사관을 부활시킨 뉴라이트의 국사 교과서가 냉소적 반응을 얻는 데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지식권력의 매트릭스와 대안교과서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민주진영에 속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마치 민주진영이 정치권력을 잡으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식권력의 무서움을 모르는 매우 나이브한 생각이다.

지식권력은 정치권력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은 외교?안보?통일 분야 등 정권이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특수한 영역을 제외하면 의연히 변하지 않고 있는 지식권력과 길항하며, 잘하면 정권의 지향성에 따라 아주 작은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에 대해 흔히 했던 불평 중 하나는 “처음엔 뭔가 다르게 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관료들에게 먹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틀린 지적은 아니다.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현실을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을 책임진다는 것은 펑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현실의 속도는 매우 빠르다. 예컨대 5년 치의 장기계획을 1주일 뒤에 보고하라는 식이다. 그 방향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이러한 속도에 맞추어 실천적인 안을 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상층 관료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층 관료들의 데이터베이스는 이전의 정권에서부터 수십 년간 축적되어온 것이고, 대기업 연구소, 보수적 학계, OECD 등 국제자본가 기구와 강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미국 편향이어서 그 방향성에 많건 적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이러하기 때문에 정권의 성격이 관료집단과 방향성이 유사하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다소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처음부터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정권의 방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관료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재해석하여 정책안들을 정권의 방향성에 맞게 수정하도록 해야 하는데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추어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준비된 인력은 극히 드물다.

관료들의 거대한 매트릭스를 앞에 두고 있는 이 소수의 처지는 아마도 거대한 매트릭스에서 이제 막 깨어나 당황하고 있는 네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리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막상 거대한 매트릭스에서 혼자 깨어나 무력하게 일어나 앉았을 때의 황당함이라고나 할까? 결국 이 소수가 지쳐 떨어지면 정책은 점점 더 상층 관료들의 데이터베이스 방향에 가깝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정권 초기엔 뭔가 새롭게 하는 것 같더니 뒤로 갈수록 관료들에게 먹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불만은 위와 같이 살펴보면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이 자기반성 없이 정권만을 향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정권 초기엔 뭔가 새롭게 하는 것 같더니 뒤로 갈수록 관료들에게 먹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정치권력의 변화는 변화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식권력의 매트릭스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지식권력의 매트릭스는 한없이 폭이 넓고 깊다.

상층 관료들의 데이터베이스뿐만 아니라 대학, 기업의 데이터베이스, 언론,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드는 티브이 등등. 이렇게 폭이 넓고 깊은 지식권력의 매트릭스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정치권력에 한정시켜 비난하는 것은 거의 책임회피에 가깝다.

지식권력의 매트릭스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사실상 시민사회 전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 초기엔 뭔가 새롭게 하는 것 같더니 뒤로 갈수록 관료들에게 먹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시민사회가 아직 정치의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를 넘어서 사회적 민주화, 내용적 민주화를 이루어갈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로 바꾸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분들 중에는 왜 교과서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쓸데없이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해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교과서는 지식권력의 매트릭스를 유지 재생산하는 핵심제도 중 하나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국가나 정권의 이데올로기 재생산도 포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교과서 문제가 정?적이라는 것은 지난 시대에 교과서 비판이 공안사건으로 처벌대상이 되었던 사실이나, 일본 교과서에서의 독도 표기문제가 늘 한일 간의 정치문제로 비화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념형 대안교과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교과서 비판이나 대안교과서 제작은 공안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되거나 처벌까지는 안 가더라도 공안차원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의 오송회 사건, 상록회 교과서분석 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등은 그 예일 것이다. 필자 역시 민중교육지에서 교과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파면 및 투옥되었었고, 90년대 초?중반에는 중학교 국어 대안교과서를 제작하여 공안기관의 추적을 받은 바 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의 교과서 비판, 대안교과서가 늘 공안기관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데는 교과서가 갖는 근원적 정치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교과서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교과서의 초점이 주로 외교, 안보, 통일, 노동 등 정권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교과서 비판이나 대안교과서는 정권의 이데올로기 재생산과 직접 관련되는 국어, 도덕 윤리, 사회, 국사 교과에 집중되었고, 반통일, 외세 종속, 노동의 가치폄하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의 대안교과서는 말하자면 이념형 대안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형 대안교과서의 문제의식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오면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수용되었고 또 수용될 수 있는 제도적 길이 많이 열렸다. 따라서 이념형 대안교과서 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러 상당부분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의 퇴행을 들어 이념형 대안교과서 운동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극히 부분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교과서 내용을 일정부분 퇴행시킬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 내용에 대해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사회적 합의 수준을 후퇴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식민주의 역사관을 부활시킨 뉴라이트의 국사 교과서가 냉소적 반응을 얻는 데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퇴행은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지식권력 구조변화형 대안교과서

한국의 교과서 내용은 배우는 아이의 삶을 중심에 놓고 구성되어 있다기보다는 대학의 분과학문 지식을 압축해서 제시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다양한 삶과 처지를 반영하지 못하고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내용이 공급되는 특성을 갖는다. 또한 교과의 설치가 대학의 분과학문에 따르고 있어 통합학문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직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과학문적, 중앙집중적 지식권력 구조는 서구지식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고 속에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서구중심주의를 재생산해낸다.

교과서에서 진정으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식권력의 구조 자체이다. 이에 비하면 정권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문제는 표피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종속된 교과서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 차원이라면 교과서를 둘러싼 지식권력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사회적 민주화, 내용적 민주화의 차원이다. 90년대 중반까지 나왔던 이념형 대안교과서는 중앙집중적, 분과학문적 지식권력의 구조를 묵과한 상태에서 정권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교과서가 종속되는 것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대안교과서는 이념형 대안교과서가 아니라 지식권력 구조변화형 대안교과서이다. 이념형 대안교과서의 시대는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종결되었다. 이제는 대학의 분과학문적 지식을 압축해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교과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다양한 삶을 중심에 두고 변화하는 사회 요구를 유연하게 수용하는 본격적 대안교과서를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지식권력 구조변화형 대안교과서에 이르면 시민사회 역량이 문제가 된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텍스트 속에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하기가 쉽다. 하지만 지식권력 구조문제는 텍스트의 이면에 지식을 선별, 배열, 제시하는 형태와 방식 자체로 숨어 있기 때문에 포착하기도 어렵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깊은 철학적 이해와 교육적 전문성이 없으면 접근하기가 어렵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아직 지식권력 변화형 대안교과서를 만들어낼 역량이 없다.

이는 지금 대안학교들이 부딪치고 있는 난관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도권 학교 밖에 대안학교라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은 그간의 정치적, 형식적 민주화 진전 덕분에 가능한 일이고 한편에서는 권장되기조차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대안학교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 대안학교들은 실제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한계에 부딪친다. 대안학교라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막상 대안이 될 만한 교육과정, 교과서를 만들 수 없어 대안적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대안학교들은 좀 다른 방식으로 입시교육을 잘 시키는 학교가 되거나, 이른바 제도권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힌 아이들을 수용하는 학교가 되거나, 지지부진해져서 대안학교로서의 의미를 잃어가거나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량이 없으니까 포기하거나 장기적으로 준비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런 건 아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되거니와 실천 없이 죽은 지식을 쌓는다고 대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잘하는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갖는 지식권력이라고 해서 틈새가 없는 건 아니다. 지식권력 내부에도 많은 내부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잘 들여다보면 그 구조에 많은 틈새와 균열이 존재한다.

지식권력 구조의 내부 모순과 틈새


지식권력은 폭이 매우 넓고, 진영의 문제라기보다는 헤게모니의 문제여서 깊고 모호한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정책을 입안 집행하는 관료체제의 문제로 좁혀보겠다.

한국의 관료체제 내부의 핵심적 모순 중 하나는 정책을 입안하는 상층 관료와 그 정책을 집행하는 중하층 관료 사이의 모순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상층 관료가 미국형에 가까워서 상대적으로 리버럴하다면 정책을 집행하는 중하층 관료는 일본형 군사문화형에 가까워서 경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층 관료들이 제시하는 많은 정책들은 학교 현실과의 괴리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중하층 관료들의 경직성 때문에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왜곡되거나 사실상 시행되지 않고 귀찮은 서류절차로만 남는 경우가 많다.

둘째로 상층 관료와 대학 학문사회 사이의 모순이다. 대학 학문사회는 상층 관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셋째로 상층 관료 내부에서 경제관료와 다른 부문 관료 사이의 모순이다. 경제관료는 미국형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고, 재벌과의 네트워크도 튼튼하며 예산을 통제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세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관료들은 자기 영역을 넘어서 다른 부문의 전략적 장기정책안을 수시로 제출한다.

경제관료들이 제출하는 전략적 장기정책안은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 이해관계를 너무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각 부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경제관료들의 예산 통제에 의해 각 부문의 주요정책들이 허구화되고 무력화되는 경우도 많다.

위와 같은 지식권력 내부의 모순은 교육정책에 의외로 많은 균열과 틈새를 만들어낸다. 그 균열과 틈새의 크기는 서류상의 정책과 학교 현실 간의 엄청난 괴리로 귀결된다. 서류상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한국의 공교육은 초일류의 길을 걷고 있는데 실제 학교 현실은 수십 년 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데다 사회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의 중첩으로 학교붕괴가 빈말이 아닌 지경에 이르러 있다. 이제 그 균열과 틈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의 중등교육과정에서 한국의 고등학교는 단위이수제로 되어 있다. 단위이수제는 F학점을 주어 낙제를 시킬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대학의 학점제와 똑같은 것이다. 즉 단위이수제의 근본취지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학생들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다양화하고 학생들이 선택해 수강신청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취지에 따르면 고등학교 과정에 그것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셰익스피어 강의가 개설될 수도 있고, 양자물리학 강의가 개설될 수도 있다. 또 대학처럼 학년이나 반 없이 학생 각자가 정해진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의 단위 수를 이수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단위이수제가 제대로 시행된다면 고등학교의 모습은 대학과 같아지는 것이다. 아마도 고등학교가 이렇게 변하면 획일적 대학입시경쟁 문제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학생들이 고등학교에서 각자 다 다르게 다양한 과목들을 이수하고 오는데 대학이 획일적인 시험으로 학생을 놼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렇게 획기적인 교육과정안이 소문도 없이 최근 언제 도입된 것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단위이수제가 도입된 것은 최근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시대의 일이니 좀 과장하여 말하면 거의 반세기 전이다. 반세기 전부터 한국의 고등학교는 서류상으로는 대학식의 세계 초일류 고등학교였지만, 고등학교의 현실은 변함없이 대다수의 학생들은 엎드려 자는 속에서 소수의 학생들이 획일적인 대학입시를 위해 획일적인 과목을 달달 외우는 모습이다.

고등학교 단위제는 앞으로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적으로는 시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경제관료들이 경제계의 이해관계와 신통한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것을 찬성할 리가 없다. 또 경직되어 있는 중하층 관료들 역시 대학식의 고등학교 체제를 현실화시킬 역량도 없고 찬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단위이수제의 현실화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교육계 전체의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단위이수제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석?박사 시간강사를 많이 써야 하는데 이것이 교사들의 신분에 불안을 초래할 가능성에 대해 교직사회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고등학교 단위이수제는 혁신학교에서 학생의 요구에 따라 선택과목을 부분적으로 개설 시행하고 대학입시에 그 커리큘럼의 이수를 반영해주도록 대학과 교육 당국에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는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만약 그 커리큘럼 이수가 대학입시에 반영될 수 있다면 단위제를 실험하는 학교 수도 늘고 시행의 폭도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단위이수제의 본래 취지가 조금씩 살아나고 획일적 대학입시에도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 전에는 대학입시는 아무리 제도를 바꾸어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교육이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면 대학이 아무리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려고 해도 근거가 없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5?31 교육개혁 이후 현재까지 교육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통합학문적, 통합교과적 접근이다.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결코 분과학문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청소년 문제를 생각해보자. 청소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사회학, 교육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신문방송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여 사고해야 한다. 분과학문으로 나누어져 있는 지식은 그것 자체로는 죽은 지식이어서 삶 속에서 문제 해결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정보, 과학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사이뿐만 아니라 학문 분과 사이의 경계도 많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문제들 역시 예를 들어 환경문제처럼 통합학문적 접근을 요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살펴볼 때 통합교과적 교육에 대한 강조는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방향성, 사회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방향성에 합치되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통합교과적 교육에 대한 강조는 교육과정과 학교와 교육청의 서류상에만 있지 학교 현실 속에는 없다. 교과서 중 중학교의 통합과학 통합사회는 통합교과적 교육의 취지에 따라 만들어진 교과서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통합교과 교육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도 멀다. 과학 교과서는 아이들이 삶 속에서 부딪치는 과학적 문제들을 통합학문적 사고를 통해 접근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 화학 생물 지학이 사이좋게 페이지 수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 교과서일 뿐이다.

통합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삶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여러 분야의 지식을 통합적으로 활용하여 이해하고 해결해나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역사 등이 사이좋게 페이지를 나누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설령 제대로 된 통합과학 통합사회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해도 더 큰 문제는 그걸 제대로 가르칠 만한 교사가 없다는 것이다.

교사들 역시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이 엄격하게 나누어지는 분과학문 체계에 따라 양성되었기 때문에 통합과학, 통합사회를 제대로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결국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미국형 상층 관료쟀 정책안과 분과학문에 길들어져 있는 보수적 학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통합교과적 교육 역시 불필요하고 귀찮은 서류장난으로 전락해 있다.

통합교과적 교육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안교육이나 대안교과서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 중의 하나이며 파고들어갈 수 있는 틈새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시민사회에 충분한 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혁신학교 등에서 시도해보면서 지속적으로 역량을 축적해나가야 할 것이다.

5?31 교육개혁안 이후 초등학교 중학교 수준 교육과정에서 가장 강조되어온 것은 수준별 교육이다. 한 학급 안의 아이들이라 해도 학습 이해 수준이 다양하니 그 다양한 수준에 맞추어 수준별 교육을 하라는 것이다. 수준별 교육은 학생의 삶을 중심에 놓는 대안교육 대안교과서의 입장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과정 문서에만 수준별 교육을 하도록 되어 있을 뿐 교사와 학생에겐 여러 종류의 수준별 교과서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한 종류의 교과서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는 동일한 교육과정에 대해 중위 하나 상위 하나 하위 둘의 네 종류 수준별 교과서가 주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면 한국의 경우는 교사에게 한 종류의 교과서를 주고 매일매일 나머지 세 종류의 수준별 교재는 직접 더 만들어 가르치라는 이야긴데 한국의 교사들이 모두 천재이자 슈퍼맨이 아닌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수준별 교육을 하는 경우에는 평가의 방법에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과 함께 각자의 아이가 어느 수준에서 얼마만큼 향상했는가도 평가에 반영해야 하는데 교육과정에는 획일적 평가만을 제시하고 있다. 획일적 평가는 수준별 교육과 배치되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어서 수준별 교육을 우열반 교육으로 전락시킴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기피하게 만든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학교 현장에서는 수학 영어를 사실상 우열반으로 나누어 지도하는 정도가 되고 있을 뿐이다. 수준별 교육 역시 결과적으로 교사에게 불필요하고 귀찮은 잡무 부담을 증가시키며 서류상에만 존재한다.
수준별 교육, 수준별 교과서는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볼 때 지금이라도 틈새를 파고들어 현실화시켜나갈 수 있는 고리이다.

틈새교과서, 풀뿌리교과서, 대안교과서


지식권력 구조의 틈새를 파고들어가 지식권력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에 준비된 역량이 필요하고 그와 함께 강력한 명분과 제도적 계기가 필요하다. 나는 적어도 수준별 교육, 수준별 교과서와 관련해서는 현재 세 가지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농어촌 학교 학생의 상당비중을 차지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한국말도 제대로 모르는 채 학교에 오는데 학교에는 그 아이들을 위한 교재 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오직 교사의 개인 역량과 성의에 맡겨지고 있는데 교사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과정의 저학년 전 과목에 대해서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수준별 교과서가 시급히 만들어져 보급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준별 교과서는 이미 있는 교과서를 수준에 맞게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그 내용을 채울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시민사회의 건강한 문제의식과 역량이 강력한 사회적 명분을 얻어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을 틈새교과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민사회 역량과 강력한 사회적 명분만이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범민주진영이 적지 않은 수의 지자체장과 교육자치체장을 배출했기 때문에 제도적 계기도 있는 셈이다. 교육자치체장은 다문화가정을 위한 수준별 교과서를 인정교과서로 채택해서 학교 안에 보급하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고 다문화가정 아이들만 아니라 학교 교육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을 위한 수준별 교과서로 확대해서 쓰게 할 수도 있다.그런 정도는 지자체장이나 교육자치체장이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틈새교과서가 지자체 차원에서 쓰이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풀뿌리교과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풀뿌리교과서는 한 지자체에서 성립되면 강력한 사회적 명분이 있기 때문에 거의 전 지자체로 확대되어나갈 것이다.

풀뿌리교?궼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큰 것이다. 지식권력을 재생산하는 핵심제도 중 하나인 교과서 제도는 철저하게 중앙집중적이어서 이제까지 교과서는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만들어 일방적으로 지역을 향해 공급하는 것으로 믿어져왔고 그래 왔다. 풀뿌리교과서가 성립된다면 거꾸로 지역과 시민사회가 만들고 보급하는 교과서가 중앙으로 치고 올라가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중앙집중적 지식권력의 구조를 크게 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성과가 나온다면 수준별 교과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수준별 교과서에서 급한 것은 낮은 수준의 교과서만이 아니다. 높은 수준의 교과서 또한 못지않게 급하다. 매우 소모적인 현재의 사교육을 소모적이지 않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사교육의 부담을 줄여나가는 유력한 방법이 높은 수준의 수준별 교과서를 개발 보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사교육에서는 주로 교과서 진도를 먼저 나가는 선행학습을 한다. 학교에서 나가는 교과서 진도보다 앞서서 진도를 나가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한두 학년 앞서서 교과서 진도를 나가기도 하며 학부모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교과서 진도를 먼저 나가는 선행학습의 폐해는 매우 심각하다.

우선 사교육의 진도를 먼저 나가는 선행학습은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매우 소모적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원에 가면 학교에서 배울 건데 뭐, 하고 수업을 잘 듣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에 오면 학원에서 다 했는데 뭐, 하고 잘 듣지 않는다. 대다수 아이들의 경우 사교육은 부모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인 것이긴 하지만 단순히 부모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생활비에 쪼들리면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밤늦게까지 시달린다면 그것만큼 소모적이고 잔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사는 게 바쁜 대다수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교육을 시키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처럼 안심하고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아이들이 내용적으로는 묘하게 방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는 대부분이 사교육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도와주면 혼자서도 공부를 곧잘 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의 경우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수업이 오히려 자발적 학습의욕과 능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사교육의 혜택을 덜 받는 지방의 아이들이 사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는 아이들보다 대학 이상의 과정으로 갈수록 우수한 성과를 보인다는 서울대의 연구결과는 이를 잘 반증한다.

사교육은 또 진도를 먼저 나가는 선행학습 형태 때문에 공교육을 사실상 공동화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그런데 진도를 먼저 나가는 사교육의 선행학습이 왜 이렇게 소모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진도를 먼저 나가는 사교육의 선행학습이 우리 교육과정의 특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은 그 형태로 보면 직선형과 나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국사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예컨대 초등학교 때는 석기시대부터 고조선까지 배우고, 중학교 때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배우고, 고등학교 때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배우는 것이 직선형 교육과정이다. 나선형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때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얕은 수준에서 배우고 중학교 때 다시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조금 심화된 내용을 배우고, 고등학교 때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더 심화된 내용을 배우는 식으로 심화반복학습을 요구하는 교육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나선형 교육과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초?중?고 동안 비슷한 내용을 세 번 다루어서 학생들이 반복되는 느낌 때문에 지겨워할 수 있다는 게 나선형 교육과정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학원에서 진도를 한 번씩 더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은 초?중?고 동안 6번 비슷한 내용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공부에 넌덜머리를 내고 자발적 학습의욕을 잃을 만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선형 교육과정에서는 사교육이 진도를 먼저 나가는 형태의 선행학습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진도를 차상급학교 수준에 가깝게 심화시키는 후행학습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효과가 있다. 국사에 관심이 많고 뛰어난 학생이라면 초등학교 때 중학교 수준에 가까운 심화학습을 하고 중학교 때 고등학교 수준에 가까운 심화학습을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의 일반전공 수준의 선택과목을 신청해 공부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교육이 후행 심화학습 형태로 가면 아이들의 학습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유발하기도 쉽고 학교교육에 대해 보완적이어서 사교육이 생산적인 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공교육 내에 수준별 교육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사교육이 자연스럽게 공교육 속으캷 흡수되며 축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은 단계의 수준별 교과서는 위와 같이 나선형 교육과정상 차상급학교 수준에 가까운 심화과정으로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매개로 사교육의 진도를 먼저 나가는 선행학습 행태의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교육을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내야 한다. 사교육의 축소는 그러한 사교육의 올바른 자리매김 뒤에나 가능한 것이다.

만약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수준별 교과서 운동이 높은 단계의 수준별 교과서에까지 이른다면, 그래서 소모적인 사교육에 대한 사회적 여론 환기에 성공하고 사교육을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개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대안교과서란 이름에 값하는 대안교과서를 모색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대안교과서란 말을 될 수 있으면 쓰고 싶지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념형 대안교과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식권력 구조변화형 대안교과서를 말하기에는 우리의 역량이 너무 미미하다. 지금은 잘하면 지식권력의 내부 모순에 의해 벌어진 균열을 파고들어 쐐기를 박는 틈새교과서를 모색해볼 수 있는 정도고 풀뿌리교과서까지 나갈 수 있다면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대안교과서란 말을 자꾸 쓰면 과대망상에 빠지게 된다. 과대망상은 매트릭스를 깨뜨려야 한다는 진짜 목표를 잊어버리게 하고, 지피지기(知彼知己)를 가로막아 현실적 방도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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