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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고통을 모르는 인간이 어딨어? 사는 게 고통인데.”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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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런 것을 가지고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초록도 예전과는 달랐다. 비 오는 날 젖은 보도블록의 잿빛도 달랐다. 더위조차도 다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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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런 것을 가지고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초록도 예전과는 달랐다. 비 오는 날 젖은 보도블록의 잿빛도 달랐다. 더위조차도 다르게 느껴졌다.
오월 중순부터 덥더니 유월이 되자 여름이었다. 교복 조끼도 마저 벗어들고 계단을 올라왔더니 웬일로 작업실이 비었고 딱 한 명, 낯선 남자애가 그림을 걸어놓은 벽 앞에 서 있었다.
모르는 애였다. 누구지? 설마 새로 들어온 걸까? 마시던 콜라캔을 구기기에 나름 친절해지려고,

“아, 그건 저기 버리면 돼요.”

“알아요.”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 돌아오더니 내가 할 말을 걔가 했다.

“여기, 신입이에요?”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음료수며 아이스크림을 든 것을 보니 견지 형이 애들을 데리고 나가 사준 모양이었다. 초우 넌 늦었으니까 없어, 에이 너무해요, 그런 말이 오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강강아!”

“어, 규성 오빠 언제 왔어?”

강강이가 반갑게 달려들어왔다. 둘이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언제 왔냐느니 키가 컸다느니 시끄럽다. 뒤이어 들어온 아운이와 경하를 보고서도 아운이 누나, 경하 형! 난리 났다. 태현이랑은 친하지 않은 듯 서로 인사를 안 했다.

나는 멀찌감치 서 있다가 사물함에서 주섬주섬 그림도구를 꺼냈다. 왠지 모르게 좀 기분 나빴다. 계림 언니 말을 들어보니 작업실 다니다가 작년에 유학 간 앤데 방학 때마다 꼬박꼬박 작업실에 온다고 했다. 이름은 조규성,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견지 형, 이거, 보여주려고 가져왔어요.”

조규성이가 커다란 검은 포트폴리오를 낑낑대며 탁자 위로 올렸다.

“무겁게 이런 건 왜 가져왔냐?”

“형 보여주려고 가져왔다니까요?”

규성이는 겉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포트폴리오를 펼쳤다. 다들 몰려들었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지 않을 걸 그랬다. 너무…… 너무 잘했다. 입을 꼭 다물게 될 정도로.

규성이는 그날부터 거의 매일 작업실에 나왔다. 쟤는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음 좀 놀고 그래야 될 거 아니야. 친구가 그렇게 없나? 투덜대다가도 규성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나도 더 빨리 시작했다면 저 정도 했을지도 몰라. 비교할 이유 따윈 없는데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난달에 치른 모의수능 결과가 나왔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받아보니까 할 말이 없었다. 1학년 때보다 확 떨어졌다.

“어쩔래, 너.”

담임은 내 성적표를 팔랑팔랑 흔들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게 떨어지면 어떻게 해. 요즘 공부 안 해?”

“……화실 다니느라요.”

“예체능이라고 생각하니까 널널해졌어? 공부 더 안 해도 될 거 같아?”

“그게 아니라요…….”

“미술 할 거라고 확실하게 마음 굳힌 것도 아니라며. 너 이러다간 죽도 밥도 못 된다. 알 거 아니야, 네가 생각 없는 애도 아니고.”

“…….”

“두 마리 토끼 다 잡을 거면 진짜 각오하고 해야지. 지금 너 분위기는 그냥 설렁설렁 놀자 같은데?”

나 나름대로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노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아니라고 말도 못했다.
작업실에 와서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서 대충 정물을 그리고 있는데 규성이가 내 옆에 와서 섰다. 픽 웃는 걸 보자 속이 긁혔다.

“미술 전공할 거예요?”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규성이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죠? 몇 학년인데요? 이학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걸 왜 네가 걱정하니, 말투가 왜 그 모양이니?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 속이 뒤집혔다. 그리기 싫다. 어떻게든 연필을 움직이고는 있는데 지겹다. 지겨울 때는 그만두는 게 아니랬지. 계속 그려야 한다고 했지. 말은 참 쉽다.
견지 형이 내가 그려놓은 정물 소묘를 보고 하는 말도 곱게 안 들렸다.

“초우 너, 자꾸 네가 좋아하는 식으로만 하잖아. 잘할 수 있는 식으로.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

평소라면 알았다고 귀담아들었을 텐데 오늘은 섭섭했다. 내 표정이 구겨진 것을 미처 못 본 것일까, 견지 형이 말했다.

“너 이래가지곤 나중에 미술로 대학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대학이 뭐 ?거예요?”

견지 형 입에서 대학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 서운해서 큰소리쳤다.

“대학이 별게 아니면, 이백만 고등학생들은 다 뭘 몰라서 그러고 있니? 네가 걔네들과 다른 게 뭔데.”

기분이 더 나빠졌다. 견지 형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좀 거칠게 팔이 나갔다. 제풀에 놀라 흠칫 했는데 견지 형은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종이를 가져다가 선긋기를 했다. 쓱, 쓰윽, 연필심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 적당히 힘이 주어진 팔. 지나치지 않은 긴장. 반복. 조금 차분해졌다. 쓰윽, 쓱. 흑연 빛으로 메워지는 종이가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반짝반짝 은빛 나는 검은색. 비린 철 내음 같은 것이 났다. 이렇게 무겁고 차가운 색깔인데 사실은 겨우 얇은 종이 한 겹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인체 드로잉 시간이었다. 오늘은 전문모델 없이 애들이 돌아가면서 모델을 서는 날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정샘이 나를 꼽았다.

“초우야, 네가 모델을 서자. 여기서 모델 안 해본 사람 초우 너밖에 없네.”

싫다고 모르는 척하려다가 그냥 하겠다고 일어섰다. 지금은 도저히 그림 그릴 기분이 아니니까 차라리 모델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샘이 방 가운데 의자를 놓아주었다. 이십 분짜리 포즈니까 되도록 편하게 있으라고 해서 등받이에 기대고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십 분, 뭐 별로 길지도 않은데.
앉고 보니 정면에 경하와 태현이가 있다. 어쩐지 불편해서 의자를 돌릴까, 한 오 초 고민했지만 벌써 애들은 그리기 시작했다. 몰라, 눈만 안 마주치면 되지 뭐. 경하와 태현이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견지 형이 틀어준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환이 얼굴 굳었다며 긴장 풀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모델로 서는 것은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나를 보고 있는데, 또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무엇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있어? 꼭 태풍의 눈이 된 것 같았다. 바쁜 손과 눈, 긴장된 어깨들이 보였다.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이 내게 닿았다가 멀어지기도 해, 잠깐 넋을 잃고 보았다. 아니, 느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건데도 곧 허리가 뻐근해지고 어깨가 간지러워서 꼼질꼼질 움직였더니 움직이지 마! 소리가 바로 나왔다. 간질간질. 머리가 간지럽다. 귀도 간지럽고 다리도 저린다. 괜히 다리를 꼬았다, 그냥 똑바로 앉을 것을. 간지러운 것을 잊으려고 속으로 노래도 부르고 숫자도 세고, 속으로만 소리도 질렀다.
몇 시간 같은 이십 분이 지나고,

“여기까지. 수고했다, 초우야.”

저린 다리로 절뚝절뚝 일어나서 애들 그린 걸 죽 보았다. 그 종이 위의 여자애는 나이기도 하고 또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 사진 속의 나와는 아주 달랐다. 그건, 나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운이고, 강강이고, 이환이고…… 나를 그린 사람의 모습. 정말 잘 그렸다, 신기해했다가 쑥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렸다면 절대로 저렇게는 못 그렸을 것이다. 나 자신조차, 나는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일진이 정말 안 좋기로 작정이라도 한 날이었는지 크로키 다음은 윤샘이었다. 어제부터 한 정물 수채화를 다 했다고 내놓았더니,

“초우 너는 너무 조급해. 구도와 기초를 잡는 데 오십, 진행에 삼십, 마무리에 이십을 들여야 하는데 너는 지금 십만에 기본을 막 해버리고 나머지 시간에 그걸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다고. 기본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데 거기다 더해봤자 뭐가 나오니? 좀 지그시 보고, 지그시 그려보란 말이야.”

윤샘은 처음부터 다시 차분하게 하나하나 밟으면서 그리라고 했다. 이십 분마다 사진 찍어두라며 총무실에서 카메라까지 가져왔다. 언제 다시 하지. 빈 종이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견지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환 너, 그거 오늘 중에 완성 못 하면 집에 가지도 마.”

“정말요?”

이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묘은이 오라 그래야겠다 하는 걸 보니 아예 처음부터 밤샐 생각인가보다. 견지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 집에 가.”

“아, 이거 다 그리고 갈 거예요.”

이환의 말에 견지 형은 네 명 이상 남지 않으면 못 남는다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작업실은 열 시 반에 문을 닫는 것이 규칙이고, 그 뒤로 남으려면 네 명을 모아야 했다. 이환은 애들을 설득하느라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떨기 시작했다.

“승목아, 승목아아…… 어?”

목상은 굉장히 귀찮아하는 얼굴로 알았다고 말했다.

“좋았어, 한 명 더! 초우야!”

“저요?”

넋 놓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이거 다시 하기는 해야 하뾽데, 그럼 오늘 밤에 맘 잡고 해볼까. 그러고 보니 성적표도 있다. 그렇구나, 남아버려야겠다.

결국은 지금 없는 묘은 언니도 오기로 하고 네 명이 채워졌다. 이환이 부탁도 안 한 경하까지 남는다고 하자 견지 형은 한숨을 쉬더니 새벽 두 시에 문 닫으러 오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내가 집에 아예 안 들어가겠다고 한 것마냥 뭐어,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총무님이 데려다준댔어요. 어, 여기 아는 언니도 남아요. 나까지 다섯 명. 엄마한테는 아빠가 좀…….”

“전화 줘봐.”

견지 형은 전화를 받아들더니 나긋나긋한 ‘총무’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 아버지. 가끔 이렇게 늦게까지 작업을 할 때가 있어요. 제가 두 시에 다들 집까지 태워다줄 거예요. 네, 그렇죠. 그럼요. 그런 일은 없죠, 제가 있는데요.”

그렇게 말해놓고 전화를 끊은 견지 형은 시계를 보더니 자기는 한 시간 뒤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 방금은 있을 거라고 해놓고! 불량 선생.”

이환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견지 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잖아! 앞으론 남을 거면 미리 말해.”

강강이는 못내 남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견지 형한테 내쫓기듯 집에 돌아가고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나갔다.
열한 시쯤, 견지 형이 나가기 직전에 묘은 언니가 들어왔다.

“두 시에 올 거야.”

견지 형은 다짐하듯 말했다.

“너만 믿고 간다.”

“알았어요.”

묘은 언니는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환이 억울해했다.

“형은 왜 나는 못 믿어요.”

“시끄러워.”


한마디로 말을 자른 견지 형이 나가자 묘은 언니는 일단 문제집과 펜들을 늘어놓아 공부할 준비를 하고는 가방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냈다.

“교복 입고 어떻게? 재주도 좋다.”

목상이 봉투를 열어보며 감탄했다. 옆에서 봉투 안을 들여다본 경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뭐 사왔는데?”

견지 형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음악을 찾던 이환이 물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사이다와 콜라와 소주 두 병, 과자와 오징어였다.

“안주가 부실해.”

“그럼 네가 더 사오든가.”

이환은 종이컵 두 개에 사이다를 따라서 반쯤 비우더니, 소주로 도로 반을 채웠다. 소주 사이다 병에 빨대를 끼워 입에 물고선, 행복한 얼굴을 했다.

“아, 맛있다.”

“저는 사이다면 돼요.”

경하는 사이다 컵을 들었다. 나도 사이다를 집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갔다간 작업실이고 뭐고 다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 목상은 소주를 종이컵 두 잔에 채우고 하나를 묘은 언니 쪽으로 밀었다.

“아.”

묘은 언니는 심상한 얼굴로 잔을 받아들었다. 그게 다였다. 건배 같은 것은 없었다. 묘은 언니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문제집을 폈다. 목상은 잔을 들고 자기 이젤 앞으로 돌아갔다.

“취중작업이 최고지.”

이환은 소주 사이다 병을 들고 이젤 앞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밤의 작업실은 또 아주 달랐다. 내가 지금껏 알아왔던 시간들과는 아주 다른,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시간. 빛도 어둠도 소리도, 모두 달랐다. 그렇다고 그림이 더 잘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붓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윤샘 말대로 이십 분마다 사진 찍어가며 그렸다. 참고, 또 참고.

경하는 작고 두툼한 스케치북에 무얼 그리는지 쓰는지, 몰두하고 있었다. 경하가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저 스케치북에는 무슨 그림과 글이 있을까, 궁금했다. 건우 오빠의 스케치북 같을까. 그렇구나, 오빠도 이렇게, 이런 밤에 그림을 그렸겠구나. 경하의 모습에 건우 오?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러자, 목 안이 꽉 막히듯이 아파서, 나는 빨리 그 생각을 밀어내려고 했다.
갑자기 이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팔을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아, 미치겠다, 진짜. 생각 안 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나. 어쩌지? 어? 초우야, 어쩌지?”

내 마음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딴 생각을 해요.”

“별별 거 다 생각해봤는데 언제나 도로 거기야.”

이거 다 못하면 견지 형이 가만 안 ?을 텐데…… 중얼중얼하면서 이환은 도로 앉았다.

“그림도 말이야, 가끔 보면 내가, 정말 싫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있어. 진짜 역겹고 너무 싫은데, 그걸 그리고 있는 거야.”

“안 그리면 되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안 그리면 되는데 왜 그리고 있지? 아니, 지금 이건 괜찮아. 얘는 좋아. 내가 집중을 못해서 그렇지, 얘는 딱 맘에 들어. 아, 참 좋다.”

“나도 잘 안 돼요. 슬럼프인가봐요.”

“얼마나 했다고 슬럼프냐?”

묘은 언니가 꼭 집어 말했다.
잠시 조용. 노트북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와 아주 희미한 붓 소리만 섞였다.

“묘은아, 무서운 얘기 해줘.”

잠시 조용했던 이환이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묘은 언니는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었고, 경하는 슬쩍 몸을 돌렸고, 목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요!”

“무서운 거 싫어해? 왜, 좋아할 것 같은데.”

내가 무서운 거 싫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꼭 재미있어한다. 무서운 거 절대 싫다. 무서운, 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이 밤중에 무서운 얘기를 하려면 나랑 싸우고 해, 아님 집에 보내줘! 견지 형 불러!
묘은 언니는 눈도 깜짝 않고 입을 열었다.

“엊그제 밤에 집에 가는데 말이야…….”

“으아아아!”

이환은 웃기다고 난리났다. 목상조차 웃고 있고, 경하는 황당함과 웃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몰라, 지금 남 신경 쓸 정신은 없다.

“아냐, 초우야, 별로 안 무서운 얘기야. 그냥 들어봐. 귀신 얘기 이런 거 아니야.”

“언니, 제발.”

묘은 언니는 재미있어하는 게 분명했다. 귀를 막으려는 내 손을 꼭 붙들기까지 했다.

“지하철역에서 아파트까지 지름길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

에이, 누나, 그만해요. 경하가 말하는데, 묘은 언니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길을 가는데, 주택가야. 조용하고 사람 없고. 근데 거기 이층집이 하나 있는데,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고……. 근데 멀리서부터 딩동딩동 그 집 초인종 벨 소리가 계속 나는 거야. 그리고 거기 대문 앞에 보면 사람 있을 때만 켜지는 등 있잖아. 그 등이 계속 켜져 있고. 근데 사람은 없고…….”

“어, 김초우.”

경하가 놀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이환도 몸을 돌렸다.

“야, 진짜 울어? 어?”

“거참, 얘가 안 어울리게 이러네.”

묘은 언니가 내 손을 놓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얘기하지 말랬잖아요…….”

말랬잖아요! 하고 쨍쨍 소리 질러야 나다운데, 눈물이 나서 목소리가 잠겼다. 울먹거리는 소리에 묘은 언니는 피식 웃어버렸고 이환은 달려와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창피했다.

“자, 한 모금 마셔. 마음이 진정될 거야.”

이환이 자기가 마시던 소주 사이다 병을 내밀었다. 됐다니까 맛있는데, 하고 서운한 얼굴을 한다. 그 표정이 웃겨서 울다 말고 풋 웃었다. 웃기게도, 울고 나니까 기분이 나아졌다. 오늘 하루 종일 울고 싶었던 것처럼.
묘은 언니는 문제집을 탁 덮더니 소설책을 꺼냈다.

“오, 그거 읽고 있냐.”

목상이 아는 척했다. 묘은 언니와 목상이 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르는 이름, 모르는 책들이었다. 묘은 언니가 말하는 게 들렸다.

“이 책에 그런 말이 나와. 고통을 모르는 인간은 창조할 수 없다.”

“고통을 모르는 인간이 어딨어? 사는 게 고통인데.”

목상이 말을 받았다.

“예술가들을 보면 다들 어렵게 살았잖아, 특히 어린 시절에 엄청 어렵거나, 뭔가 사건사고로 점철된 인생. 진짜 예술을 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거지.”

묘은 언니가 말하자 경하가 스케치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전 그런 말 싫더라고요.”

“네가 너무 곱게 자라서 그래.”

이환이 툭 끼어들었다.

“형, 곱게 자란 사람에게는 그런 말도 상처예요.”

착하게 웃으면서 말해서 하나도 상처 입은 것처럼 들리? 않았다.

“오, 그래, 그 상처를 가지고 창조를 할 수 있겠네.”

이환은 키득거렸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고통이 찾아와주지 않은 것에 열등감을 느끼는 인생도 피곤하긴 하겠다.”

묘은 언니가 말하고,

“사는 게 원래 고통이라니까? 그걸 얼마나 예민하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인 거지. 예술가들이 워낙에 예민한 인종들이라서 그 고통을 크게 느끼는 것뿐이야.”

목상이 말했다. 하지만 예민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라 해도 그 사람에게는 진?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게 예민해지는 건, 난 싫다. 큰 고통이라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무디게 넘어가고 싶다.

“불행을 창작의 재료로 삼는다고도 하던데.”

“그 말도 진짜 싫다.”

묘은 언니 말에 이환은 붓을 탕 내려놓았다.

“웃기고 있어, 진짜. 불행하면 어떤 건지, 얼마나 불행한 건지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꼭 그런 소리를 하지. 야,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정말 불행했는지 안 했는지 자기가 어떻게 아냐? 그 그림이 불행했기 때문에 좋은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왜 나한테 그래?”

묘은 언니가 말하자 이환은 입술을 내밀었다. 이환의 말에 동감한다. 자기들이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그러고 뭘 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해보라 그래.

“내가 또 진짜 싫은 게, 고흐같이 사는 거. 죽은 다음에 좋게 평가되면 뭐 하냐? 난 죽은 다음에 싹 잊혀도 좋으니까 살아 있을 때 인정받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환이 말했다. 나도 그런 게 더 좋아, 생각하는데 목상이 대꾸했다.

“어쨌든 인정은 받겠단 얘기네? 자신만만한데?”

“당연하지!”

이환이 과장되게 우쭐한 태도로 말해서 다들 웃었다.
시간이 되게 천천히 흐르고 있나보다. 아직 한 시였다. 견지 형이 빨리 왔으면 싶기도 하고 그냥 이렇게 계속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엄청 피곤한데 정신은 도리어 맑아졌다. 지금껏 찍은 사진을 죽 보았다. 천천히 진행되는 게 보인다. 윤샘 지적이 무슨 뜻인지도 알겠다.

“훨씬 좋은데.”

경하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어?”

확, 마음이 뜨거워지고 붉어졌다. 경하가 뭐라고 더 말했지만 잘 안 들렸다. 입속으로만 웅얼웅얼 대답했다. 음, 뭐, 그래. 경하는 빙긋 웃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손가락 끝까지 열이 오른 것 같아 괜히 꾹꾹 누르기만 했다.
견지 형이 왔을 때는 눈이 아팠다. 손도 아팠다. 손목도 저렸다. 속도 좀 쓰린 거 같았다. 이환은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하고 아쉬워했다. 여름방학 때는 정말 밤샐 수도 있다고 묘은 언니가 슬쩍 귀띔해주었다.

견지 형이 몰고 온 작은 승합차를 타고 새벽 두 시의 거리를 달렸다. 문이 닫힌 가게와 변함없는 주황 가로등. 그리고 이 늦은 시간에도 거리를 걷는 사람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는 기분. 가야 할 것 같은…… 가고 싶은 기분.

“형, 우리 동해까지 가서 해 뜨는 거 볼까요?”

이환은 진담 같은 농담을 했다. 간다고 했으면 나는 정말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견지 형은 동해로 가는 대신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주고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다. 아빠가 아파트 현관에 나와 있었다. 엄마는 잔다고, 엄마는 내가 독서실에 있다 오는 줄 안다고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음부턴 이렇게 늦지 마,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이불 위에 풀썩 엎어졌다.
아까 내가 무엇 때문에 울적했더라……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던 양 생각이 잘 안 났다. 아! 모의고사 성적표! 몰라, 졸려. 내일 생각할래. 이대로 잠든다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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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소 문학상이 4년 만의 대상 수상작과 함께 돌아왔다. 새 학교에 새 반, 새 친구들까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처음’을 맞이하고 있는 1학년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이 눈부신 작품. 다가오는 봄, 여전히 교실이 낯설고 어색한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전한다.

마음까지 씻고 가는 개욕탕으로 오시개!

『마음버스』 『사자마트』 로 함께 사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김유X소복이 작가의 신작 그림책. 사람들이 곤히 잠든 밤, 힘들고 지친 개들의 휴식처 개욕탕이 문을 엽니다! 속상한 일, 화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까지 깨끗히 씻어 내는 개욕탕으로 오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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