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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연재] 박영란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④

망고나무숲에서 바람을 쏘이고 왔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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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는 엄마 나름대로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다시 말해두고 싶다. 엄마는 나를 잘 키우고 싶어한 사람이다. 나를 잘 키우고 싶어한 것을 보면 아버지라는 사람을 사랑했던 게 맞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하는 여자는 별로 없다고 전에 사모님이 말했었다. 사모님이 알려주지 않았어도 나 역시 여자라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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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①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②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③


망고나무숲에서 바람을 쏘이고 왔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수상한 전화가 왔었다는 블랑카의 말 때문이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으면서 나를 찾았다고 한다. 블랑카는 그 수상한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우리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 수상한 전화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한 통의 수상한 전화 때문에 나는 나의 괴로운 현실로 끌려들어오고 말았다. 나로서는 그 수상한 전화의 주인공이 엄마이든 아니든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수상한 전화의 내용으로 볼 때 엄마라고 하더라도 당장의 현실을 개선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만일 엄마였다면 그냥 내 목소리나 한번 들을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벌써 제임스와 연락이 닿았고, 그 소식이 나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뭐, 어쨌든 좋다!
엄마에게는 엄마 나름대로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다시 말해두고 싶다. 엄마는 나를 잘 키우고 싶어한 사람이다. 나를 잘 키우고 싶어한 것을 보면 아버지라는 사람을 사랑했던 게 맞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하는 여자는 별로 없다고 전에 사모님이 말했었다. 사모님이 알려주지 않았어도 나 역시 여자라서 안다.

뻔한 말이지만 나는 엄마가 그립다. 그립다는 나의 생각은 현실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활비를 다시 보낼 만큼 사정이 회복되지 않았더라도 내 싸이 방명록에 잘 있다는 말이라도 남겨놓으면 내가 엄마 걱정을 덜할 것이라는 말이다. 제임스가 알아보면 안 되니까 암호로라도 남겨놓으면 내가 알아볼 것이다.

제임스의 눈치를 보는 것이나, 버려진 아이 취급받는 것쯤이야 그립다는 느낌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생활비나 버려진 아이 취급 따위는 견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립다는 감정은 쉽게 해결되지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이런 날이면 나는 전화를 걸 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짜증을 내면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봐서 이제는 정말 이런 수신자부담용 장거리전화는 받지 않을 줄 알면서도 거는 것이다. 그사이 엄마가 다시 미용실로 돌아와 있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미용실 전화번호를 눌렀던 날은 방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답답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산책을 나선다. 오늘은 빌리지를 원 방향으로 돌지 않고‘ㄹ’자로, 말하자면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을 둘러볼 것이다.

빌리지 한가운데 있는 수영장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오늘 같은 화요일 오전에는 조용하다. 청소하는 필리피노 아저씨들만 나무 사이로 가끔 보인다. 아니면 「마닐라 불리틴」을 배달해주는 신문배달부나 집집마다 두세 명씩 있는 아떼들만 태양 아래 나와 움직인다.
그리고 내가 있다.

빌리지 안은 소문이 빠르기 때문에 저 사람들도 내가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결국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를 두고 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저들이 어떻게 추측하든 나는 사 개월 후면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비행기 표는 왕복행이고 라구나에 올 때 이미 돌아갈 날짜가 정해진 일 년짜리 티켓이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억울하겠지만 생활비를 받지 못해도 나를 서울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사라인선 언니가 말해줬다. 만일 생활비 때문에 나를 계속 붙들고 있다가는 미성년자보호법과 관련된 법 조항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라인선 언니가 인터넷에 내 이야기를 올려서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돌아가게 해줄 거라고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제임스는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밀린 내 생활비를 물어줄 보호자를 찾아내야만 하는 사정이다. 제임스의 사정이라고 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 내내 대형 영국 국기가 펄럭이는 집 정원은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는 말은 에스파냐 시인아저씨네 집인 데니슨 가 12번지 마당과는 정반대라는 뜻이다. 꼭 장난감 정원 같다. 그런데 이 정원을 누가 꾸미는 것인지 이 집에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유령의 집이거나, 햇볕을 쪼이면 안 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사는 집인지도 모른다. 이런 집에는 관심 없다. 그래서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콜라나 과자, 달걀 같은 것을 팔던 집은 이제 문을 닫았다. 늘 하얀 셔츠만 입고 있던 이 집 아저씨한테 콜라를 사면 길쭉한 비닐봉지에 콜라를 쏟아서 빨대를 넣어주었다. 병을 아저씨가 가지려고 그러는 것인데, 콜라는 병을 쥐고 마셔야지 비닐봉지에 담아 마시면 기분이 안 난다는 것을 모르는 아저씨다.

몇 달 전까지 새를 키우던 집은 지금은 비어 있다. 빌리지 안에서 새를 키워 파는 것을 금지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새소리가 시끄러운 게 이유라고 했다. 새들은 모이도 조금 먹고 똥도 조금 싸고 지저귀는 소리도 텔레비전 소리나 냉장고 소리에 비하면 참을 만한데 사람들은 왜 새소리를 참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새들은 없고 빈 새장만 가득 찬 마당을 보니 마음이 쓸쓸하다. 새들이 있었더라면 이 집 앞에서 두 시간은 서 있을 수 있을 텐데 빈 새장들만 잔뜩 쌓여 있는 집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빈 새장들 때문에 쓸쓸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빨리 데니슨 가 12번지 마당으로 가야겠다.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으로!


내가 아직 라구나 벨 에어에 다닐 때 말레이시아에서 온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자기네 캄펑에 가면 두리안나무숲이 있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캄펑은 말레이시아 말로 ‘고향’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마이 컨트리’가 아니라 ‘마이 캄펑’이라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하여튼 그 아이가 캄펑의 두리안 이야기를 자주 했던 걸 보면 그 아이도 나처럼 엄마나 할머니가 있는 곳을 그리워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는 이슬람교를 믿었기 때문에 가톨릭교도가 많은 필리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그 이슬람교도는 라구나 벨 에어에 아직도 잘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이슬람교도의 이야기는 블랑카가 설명해주어서 내가 이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유학생활이 짧아서 영어가 아직 잘 들리지 않는다. 블랑카를 통해서라도 그 이슬람교도에게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 가면 망고 비슷한 감이 열리는 나무와 고슴도치 같은 밤이 열리는 나무가 있다고 말해줄 걸 그랬다. 그랬으면 그 이슬람교도도 지금이나 혹은 외로운 어떤 시간에 나를 생각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데니슨 가 12번지 마당은 말레이시아의 그 이슬람교도도 한번 와서 보면 제2의 캄펑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을 긴장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습관이 붙었다.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땅을 뒤지는 데 열중하는 닭 가족을 놀라게 하는 따위의 일을 만들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나도 이 숲의 일원인 것처럼 슬며시 다가가서 소리 없이 서 있는 것이 좋다. 두리안은 오늘도 여전히 어제 그 자리에 매달려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에 비해 열매가 터무니없이 크다. 남의 열매를 빼앗아 단 것만 같다.

햇살은 뜨겁고 두리안나무숲은 시원하다. 그래서 닭들도 이 나무숲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숲 밖에서 숲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 두리안나무숲은 심정으로는 나의 숲이기는 하지만 실정법으로는 데니슨 가 12번지 아줌마의 남편인 시인아저씨가 주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볼 수는 없는 일이다.
아줌마가 나온다.

“하이!”

아줌마가 먼저 알은 체를 한다. 오늘도 빨래가 한바구니다. 생각해보니 산타로사 빌리지에서 가정부 없는 집은 시인아저씨네 집뿐인 것 같다. 아줌마의 남편은 아줌마를 가정부와 아내 겸용으로 여기고 있어서 가정부를 두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줌마 자신도 가정부와 아내의 경계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같다. 이 산타로사 빌리지 안에 사는 집주인치고 데니슨 가 12번지 아줌마만큼 가정부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하는 말이다. 아줌마가 에스파냐 시인아저씨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 산타로사 빌리지에 취직해 들어온 가정부로 여기기 일쑤다. 바로 그런 아줌마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아줌마의 인사라는 게 그냥 웃는 것이 전부다.


이미 말했다시피 아줌마와 나는 서로 대화할 만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쓸모없는 언어를 각자 가지고 있다보니 그냥 마음으로만 서로 알아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마음으로 마치 우리 엄마가 손님의 머리칼을 커트해주고 있는 것을 보듯이 아줌마가 빨래 너는 모습을 바라봐줄 뿐이다.

마당의 닭들도 아줌마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자기네들 하던 대로 편하게 한다. 나는 이제 슬슬 데니슨 아줌마네 집 앞에 한번 들렀다가 내 방으로 돌아가볼 참이다. 그런데 아줌마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한다. 이건 분명히,

‘이리 오라’

는 세계 공용어가 맞다. 그래서 나는 아이답게 아줌마네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줌마는 더 가까이 오라고 계속 손짓한다. 아줌마와 내가 서로 팔을 뻗으면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차 마실래?”

아줌마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물론 “티” “드링크” 두 단어였지만 그걸로 대화는 충분하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나는 아줌마를 따라 나의 고독한 밀림 속에 숨은 비밀의 궁전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아줌마네 집 역시 내가 사는 모넷 가의 집처럼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훤히 보인다. 구조가 똑같다는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줌마네 집 안에서는 아줌마의 냄새와 손길이 비릿하고도 고소하게 스며들어서 어린 새가 살아 있는 둥지 같다면, 내가 사는 모넷 가의 집에서는 구석에 처박아둔 꿩의 박제에서 날 만한 하숙집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내 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엄마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의 차이 정도다.

아줌마네 집은 예상했던 대로 책이 많다. 그런데 책들은 대부분 영어로 된 책들이라서 아줌마가 읽는 책들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면 뻔하지, 시인의 책들이다.
하여튼 나와 아줌마는 식탁에 마주앉아 네슬레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해보려고 시도한다. 이번에도 아줌마 쪽에서 먼저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다.

“유어 네임.”

나도 그만한 눈치는 있는 아이라 알아들었다.

“유니스.”

라고 대답한 후에,

“유어 네임은?”

그러자 아줌마가,

“로잘리.”

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름도 아줌마만큼이나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영어식 이름이 아닌 진짜 내 이름이 ‘윤희’라고 말해준다. 아줌마도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이 네임, 훼 살라망고.”한다.

“훼 살라망고? 로잘리가 아니고?”

내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아줌마는 내가 왜 놀라는지 안다는 듯이 웃는다. 그러니까 나의 원래 이름이 유니스가 아니고 ‘윤희’이듯 아줌마의 이름도 로잘리가 아니고 ‘훼 살라망고’라는 것을 서로 이해하자는 웃음이다. 그래서 나도 나의 한국식 이름 ‘윤희’ 앞에 ‘김’을 덧붙여야 한다고 알려준다.

아줌마 이름 속에 ‘망고’라는 열매 이름이 들어 있어서 좋다. 필리핀에 와서 제일 맛있게 먹은 과일도 망고이고, AUP 언덕 위에서 의연히 서 있는 나무들도 망고나무다. 입속으로 들키지 않도록 ‘훼 살라망고’ 하고 불러본다. 새를 부르는 것 같다. 기분이 좋아진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문을 하나 만든 것이 틀림없다. 일단 서로 이름을 확인하자 나머지는 쉽게 풀리는 느낌이 든다.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왔다는 것을 알리고 살라망고 아줌마는 칼람바 온천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열네 살이 될 것이고 살라망고 아줌마는 스물여덟 살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교환했다. 여자 앞에서 나이 때문에 놀라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아는 나다.

엄마도 미용실 손님 나이를 맞추어볼 때 속으로 생각한 것보다 다섯 살쯤 적게 말해준다. 엄마가 예상했던 나이보다 많으면 놀라는 척하고, 적으면 미용실 거울이 원래 사람 나이를 더 들어 보이게 한다고 했었다. 나이라는 것은 그만큼, 특히나 여자한테는 민감한 문제라서 겉으로 표시하지 않았지만 사실 놀랍다. 나는 살라망고 아줌마가 마흔 살이 넘은 진짜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대학생 언니들 나이와 크게 차이 없는 나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하지만 뭐, 살라망고 아줌마가 생각했던 것뢺다 풋내기라고 해도 이미 친구하기로 한 이상 원칙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친구의 나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이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던 미안한 마음 때문에 나는 살라망고 아줌마가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줌마는 그냥 웃기만 한다. 아무래도 내 속마음을 다 들킨 것만 같다.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대놓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리 못생기거나 늙은 여자 손님이라도 늘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뜯어보면 예쁜 구석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두리안나무만 해도 저렇게 흉한 모양의 열매를 달고 있는데도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또 AUP 언덕의 망고나무는 허리에 붉은 흉터가 파인 데다 더러운 개똥 천지인 언덕에 서 있지만 바람이 불면 싸, 싸, 싸, 몰려나가는 잎사귀 소리를 내가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는 말은 사람 얼굴에 대고 쓸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살라망고 아줌마에게 아름답다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 아니다.

친구가 된 첫날이기도 하고 갑작스런 초대이기도 해서 이쯤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라망고 아줌마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여기가 내가 정한 나의 고독한 숲이라고 해서 눈치 없이 굴었다가 아줌마와 나의 고독한 숲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살라망고 아줌마는 이미 내 처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 이야기는 물어보지도 않고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그런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내가 만일 버려진 아이가 아니었다면 살라망고 아줌마가 내 앞에서 이렇게 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진다.

그래도 아줌마가 나를 동정해서 아이스티를 마시자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줌마를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제 막 친구가 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몇 달 후면 산타로사 빌리지를 떠나게 될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 엄마처럼 십몇 년 동안 사랑을 다 쏟아부어버리고 나서 내다버리는 것은 권장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외할머니도 엄마가 나를 이렇게 몇 달간이나 방치하고 있는 것을 알면 무척 화를 내실 게 분명하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화가 나도 화가 난다는 표시를 얼굴에 나타내지는 못한다. 사람이 너무 늙으면 얼굴 표정이나 사상을 읽을 수 없어지게 되고 마는가보다. 언제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외할머니뿐 아니라 늙은 얼굴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들 얼굴이 다 비슷한 것처럼.

우리 외할머니는 절름발이다. 아주 심하게 절름거린다. 걸을 때 보면 외할머니가 절름거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절름거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외할머니가 어릴 때 6?25 전쟁이 터졌는데 그때 피난 가다가 총알이 무릎을 뚫고 나가는 총상을 입은 후로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 절름발이는 커서도 절름발이다. 외할머니가 처녀가 되자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땅과 함께 외할머니를 어떤 남자와 결혼시켰다. 이 남자는 나의 외할아버지가 아니라서 그냥 어떤 남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모가 태어났다. 이모는 다리를 절름거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모가 태어나 백일도 되기 전에 외할머니의 남자는 땅을 판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 외할머니는 그 남자가 일본의 ‘대판’이라는 곳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나한테 ‘대판’이 어딘지 모른다고 했다. 나도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외할머니는 그 남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 남자와 사는 게 싫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 남자가 ‘대판’으로 도망을 갔건 ‘소판’으로 도망을 갔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가 알아서 도망가지 않았다면 외할머니가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이 일에 대해서 외할머니가 자기 생각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추측해본 것이다. 나는 아직 생리도 시작 안 한 어린 여자라서 남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남자들은 살아 있는 여자들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이건 엄마의 아저씨와 외할머니의 남자를 통해서 내가 알아낸 것이니까 아주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여간 남자들이 여자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는 점은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나 같으면 절름발이라도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하겠다!

아무튼,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고 나자 외할머니도 이모를 데리고 외할머니의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 남자가 대판으로 달아난 지 한 달 후였다고 한다. 이 점만 봐도 외할머니가 그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사이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딸을 보살피면서 몇 년 살았다. 그러다가 다른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이 남자가 바로 나의 외할아버지라는 남자다. 그런데 나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남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먼 데서 온 남자라서 외할머니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남자는 여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 남자는 외할머니가 절름발이인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절름발이인 것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외할머니는 낯선 남자를 진짜 사랑했다. 외할머니가 이 남자 이야기를 할 때면 주름진 얼굴에 표정이 살아나는 것을 보더라도 외할머니가 이 남자를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남자는 외할머니가 마음으로부터 사랑한 첫사랑이었다. 외할머니가 먼 산을 보면서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정말 다정한 사내였다고. 내가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다정다감한 성격인 것 같다고. 나는 나의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보통 여자들은 첫사랑 상대를 잘못 고르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외할머니와 결혼은 하지 않고 같이 살기만 했다. 이모가 그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할 무렵에 드디어 나의 엄마가 태어났다. 엄마가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는 아기 다리부터 살펴보았다고 한다. 혹시나 절름발이일까봐 그랬다는데 외할머니는 다친 상처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잠깐 잊은 모양이었다. 그때쯤이 외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외할머니의 남자는 도망갔다. 외할아버지가 도망간 사실 때문에 나는 외할머니에게 많이 미안하다. 내가 외할머니를 혼자 두고 도망간 것이 아닌데도 마치 내가 도망자가 된 것처럼 미안하다. 나의 외할아버지라는 남자가 도망가지 않고 외할머니와 오랫동안 살아주었더라면 내가 외할머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외할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외할머니는 아주 가난해졌다. 외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겨놓았던 땅이나 돈을 그 남자가 모두 들고 가버린 것은 아니지만, 외할머니는 그 남자와 생활하는 동안 땅을 팔고 돈을 많이 써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진짜 사랑한 남자든, 책임감 때문에 함께 살았던 남자든, 남자는 모두 외할머니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는 외할머니의 사상은 이때 굳어졌다.

사람은 대부분 똑같은 실수를 겪고 나면 하나의 인생관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 남자가 도망가고 나서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에는 여자 셋만 남았다. 다행히 외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동네에서 살아왔고, 그래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여자아이들이 자라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이모와 엄마는 지금 나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았지만 명예는 있었다. 그 명예는 외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지역에서 착하게 살아온 역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동네사람들은 착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여자 셋을 내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모와 엄마는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이 모든 이야기는 다 외할머니가 엄마 몰래 나에게만 해주신 것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지나간 이야기를 하면 들어두기는커녕 도리어 외할머니를 구박한다. 궁상맞은 이야기는 딱 듣기 싫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계신다. 나와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가면 사람들이 엄마와 나를 구경 오곤 했다. 왜 구경 오냐면 구경 오는 사람마다 엄마가 연습 삼아 파마도 해주고 커트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엄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용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세계적이라는 말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우쭐해졌다. 내가 그때 세계적인 것을 좋아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모는 미국으로 갔다. 이모는 가정부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세계적으로 사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외할머니와 엄마에게 연락도 안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세계적으로 사는 일에 진력이 나면 연락이 올 것이다.

제임스가 이런 나의 가족관계에 대해 묻고는 있지만 나는 아직 외할머니 전화번호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 아니 나에게 외할머니가 있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엄마를 위해서다. 엄마가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이 일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꾹 참고 있는 중이다.


데니슨 아줌마에게 빌려온 과학잡지를 돌려주러 가려면 어쨌든 좀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아줌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유독 아줌마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엄마 때문일 것이다. ‘아줌마’ 하는 말과 ‘엄?’라는 말이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줌마들은 나의 엄마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른 누군가의 엄마라서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살라망고 아줌마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언젠가는 엄마가 될 것이고, 사모님은 서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고, 데니슨 아줌마는 두 언니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하여간 나는 아줌마라면 사족을 못 쓰는 몹쓸 병에 걸린 것은 틀림없다.

잡지가 다 그렇듯이 깊이 있는 내용은 없는 듯하다. 공상과학영화 같은 사진들이 나 같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딱 좋게 되어 있다. 잡지라는 책은, 사라인선 언니 식으로 말하자면,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열두 살에 막스라는 사람한테 『대중을 위한 자연과학』이라는 책을 얻어 읽고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일깨웠다고 했다. 어쩌면 데니슨 아줌마도 그런 의도로 나에게 과학책을 빌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데니슨 아줌마가 빌려준 과학잡지가 나를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엇인가 한 가지쯤은 읽어서 배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어른들이 책을 빌려주는 궁극적인 이유일 테니까.

데니슨 아줌마와 대화를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느라 사라인선 언니에게 밤 외출 허락을 받아두는 것을 잊었다. 외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는 낮에 데니슨 아줌마를 만나면 되겠지만 낮 시간은 아줌마가 바쁜 것 같다. 거의 매일 정오경에 나가서 저녁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사라인선 언니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환영할 일이다.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해서 식빵이나 뜯어먹는 밤이 계속되어서는 곤란하다. 남자와 헤어지는 일 정도는 일주일가량 식빵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쨌든 사라인선 언니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놓지 못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는 하지만, 길어야 한 시간 외출인데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블랑카에게 말을 해둘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블랑카는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은 정신을 가진 아이라서 나의 외출이 제임스 귀에 들어가는 것이 시간문제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데니슨 아줌마를 만나고 오겠다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블랑카는 내가 자기처럼 거짓말을 하고 미키윤수를 만나러 가는 줄 오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블랑카 자체는 ‘나이스’한 아이지만 믿을 만한 성숙함은 아직 생기지 않은 아이라서 몰래 빠져나오고 말았다.


데니슨 아줌마네 집 거실에 불이 밝혀져 있다. 데니슨 아줌마가 집에 있어서 다행이다. 문을 열어주는데 보니까 머리칼을 바싹 잘랐다는 것을 알겠다. 소년처럼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이 내 마음에 든다. 어떤 미용사가 잘랐는지 몰라도 솜씨 있는 사람이다.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의 머리칼을 ‘숏 커트’로 짧게 잘라서 멋지게 만들 수 있는 미용사가 진짜 솜씨 있는 미용사라고 했다.
데니슨 아줌마가 나의 방문 목적을 묻기 전에 내가 먼저 과학잡지를 내민다.

“벌써 다 읽었니?”

나는 아줌마가 열고 서 있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다 읽은 지는 한참 되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제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아줌마 둘뿐이었던 것 같다.

“피자 먹을래?”

“아니요. 아이스티나 한잔 주세요.”

“아이스티는 없고 망고주스 줄까?”

나는 델몬트 망고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냥 그걸로 달라고 한다. 망고나, 파인애플이나, 파파야 같은 과일은 주스로 만들어서 냉장고에 보관하기에는 너무 가엾은 과일들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데니슨 아줌마가 새파란 매니큐어가 반짝이는 하얀 두 발을 소파 위로 올리고 다리를 접어 끌어안고 있으니까 웅?린 아기 같다. 데니슨 아줌마가 아기같이 앉아서 나를 계속 바라보는 통에 내가 망고주스를 시원하게 마실 수가 없는 것은 괜찮은데, 누가 살짝 밀기라도 하면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처럼 동그랗게 앉아 있는 아줌마 자세 때문에 조마조마하다.

“그래, 책은 재미있든?”

“아줌마는 이 책 읽어봤어요?”

대답이 없다. 나는 노란 망고주스를 마시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을 좀 정리해본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복잡하고 어려운 말들은 다 집어치우고 단도로 배꼽을 푹, 찌르듯이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역시 복잡할 때는 이 방법이 최고다.

“아줌마 내 소문 들으셨죠?”

아줌마가 나를 다시 빤히 쳐다보기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내 소문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버려졌다는 소문요. 엄마가 내 생활비도 보내지 않고, 나를 데려가지도 않고, 도망가버렸다는 소문요.”

“그랬니? 그렇게 자세히는 몰랐다. 그냥 그 소문의 아이가 너란 것 정도만 알아.”

“내가 불쌍해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거였어요?”

데니슨 아줌마가 내 눈을 뚫을 듯이 쳐다본다. 누가 누구를 이런 태도로 쳐다보는 것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기왕 시작한 일이라서 참기로 한다.

“불쌍하다고 아무한테나 다 친절하지는 않아.”

“그러면 내가 아줌마 마음에 드는 아이인가요?”

“누가 너처럼 예쁜 아이를 싫어할 수 있겠니!”

나는 예쁜가보다. 어른들한테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내가 어른들이 보기에 예쁘게 생긴 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 기준은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는 블랑카처럼 생긴 아이를 예쁘다고 한다. 어른들이 예쁘다고 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촌스럽다는 뜻일 것도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예쁘게 생겼다고 하는 말은 신뢰할 만한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머릿결은 미용사인 엄마도 잘라내기에 아까울 정도로 찰랑거린다고 했다. 치아와 목덜미는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희고 곱다고 외할머니가 자주 말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버려졌다. 그러니까 예쁘게 생긴 것이 버려지지 않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데니슨 아줌마의 지금 이 말을 믿을 수 없다. 입에 발린 말 같다.

“그렇다면, 아줌마가 나를 입양해주실 수 있어요?”

아줌마는 당황한 듯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건 좀 다른 문제인걸? 생각 좀 해보자꾸나!”

“아니 됐어요. 아줌마에게 부담드릴 생각은 없어요. 입양한다는 게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저도 알아요. 차라리 애를 하나 낳는 게 더 쉬운 일이죠!”

“너는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까지 할 줄 아니?”

“누구나 나 같은 상황에 처하면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엄마가 영영 연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까지 다 생각해뒀어요!”

“기특하구나.”

“사실은 이런 이야기 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니?”

“아줌마 같은 사람에게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거든요.”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지?”

데니슨 아줌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져서 나는 좀 놀란다. ‘아줌마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니니까 아줌마도 이해해줄 것이다.

“아줌마처럼 고민 없이 편하게 사는 사람들은 저 같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왜 내가 고민 없이 편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니까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서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겠다.

“부모에게 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단다.”

“세상에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어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보다. 아줌마가 나를 바라본다. 멍한 눈이다.

“그건 엄마한테 버려져보지 않은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에요.”

“아무튼…… 부모에게 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

데니슨 아줌마가 말끝을 흐린다. 나는 엄마에게 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엄마에게 버려진 일’이니까.

“우리 엄마가 미용사라는 이야기는 했죠?”

“그래.”

“그냥 시시한 미용사는 아니었어요. 우리 엄마는 나를 아주 잘 키우고 싶어한 미용사였어요.”

“그래, 동네에서 미용실 하는 사람이 딸을 유학 보내기는 놽지 않지.”

“그 점이 보통 미용사들과는 다른 점이죠.”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이다음에 나도 딸을 낳아서 잘 키우려고 애쓰다가 힘들면 버릴까봐 겁이 나요!”

“미리 겁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아줌마가 보기에 내 처지가 불쌍해 보이나요? 아니면 보통사람들도 다 겪는 일로 보이나요? 아줌마의 입장에서 ?는 내 상황을 알고 싶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니? 네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교과서 같은 이야기 말구요.”

“그래, 그럼.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

“그 대신 외교관이나 국제변호사가 되긴 힘들겠죠! 창녀가 되긴 쉽겠지만요.”

“그래 네 말대로야.”

“내가 존경하는 어떤 언니가 좁히기 힘든 차이라고 했어요.”

“네가 원하면 내가 너를 후원해줄 수도 있어.”

“그러려면 국제 적십자사나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같은 기구에 가입해야 되잖아요!”

“개인적으로도 가능하단다.”

“아직은 엄마를 좀 더 기다려볼 거예요.”

아줌마가 말이 없다. 갑자기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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