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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아주머니 칼질에도 긴 줄을 서는 이유

아무것도 안 입은 나도 부끄럽지만 피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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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유로 반질반질, 소금기로 짭짤한 그걸 들고 나왔는데 이미 가게 앞은 조각 피자 부대에 점령당했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려는 샐러리맨도, 이 근처를 지나던 관광객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별 기대 없이 그 기름기 좔좔 흐르는 것을 한입 베어 무는데 아, 바삭바삭하고 짭짤한 맛. 마실 것도 없는데 뻑뻑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입에 쩍쩍 달라붙네. 왠지 모를 중독성에 넙데데한 피자 두 조각을 후딱 해치운다.

‘탁, 탁’ 거침없이 떨어지는 칼 소리. 방망이질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옛날 아낙의 방망이 소리 같기도, 기분 상한 엄마의 저녁 칼질 소리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아주머니들의 심드렁한 무표정과 그럭저럭 잘 어울린다.
로마 최고의 피자집 로스콜리(Roscoli). 없는 게 없는 분식집 같은 곳. 그러나 우리나라 김밥집 아주머니가 이렇게 성질부리며 말다가는 김밥 터지고도 남겠다.
아주머니의 포스가 대단하지만 어쨌든 이곳은 무엇이든 참 제대로 만든다. 최고의 실비집. 갓 구운 빵도, 고슬고슬한 리소토도, 신선한 파스타도 제법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으뜸인 것은 조각 피자, 피자 아 탈리오(Pizza a Taglio). 로마에서 버스 두 번 탈 돈이면 기름 졸졸 흐르는 맛있는 점심 한 끼가 해결된다.
사실 진열대에 축 늘어져 있는 음식이 맛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세상사 항상 예외는 있는 법.


전통 로마식 피자는
요리사가 숨을 참고 견딜 만큼의 시간 동안 화덕 안에 놓였다가,
허연 밀가루가 노란빛을 띠고
치즈가 숨을 죽이기 무섭게 오븐에서 탈출하고,
따뜻한 피자는 내려놓는 순간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옮겨 가고.

오랜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돌아와 제법 맛있어 보이는 피자 하나를 재빨리 손으로 가리켰다. 0.1초라도 지체하면 큰일 난다. 금세 시퍼런 칼이 그 위에 놓인다.
‘이만큼?’이라는 무언의 눈빛. 어느덧 칼은 하늘로 치솟아 있고, 아주머니의 기에 눌려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이면 바닥이 꺼지라고 쿵. 순식간에 잘려 나가 종이에 싸인 그것을 받아 들고 얌전한 손님이 되어 계산대 앞에 줄을 선다. 무게를 달아 보니 가격은 1.3유로. 콜라 한 병 값도 안 된다. 바닥은 뜨끈뜨끈, 위는 반지르르 촉촉하다.
무서운 아주머니의 칼질에도 이렇게 줄을 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면 이곳과 쌍벽을 이루는 곳이 또 있으니 바로 일 포르노(Il Forno). 로마의 이름난 시장인 캄포 데 피오리에 있다. 시장 최고의 분식집이라고나 할까?
가게 상표만 가리면 로스콜리와 쌍둥이처럼 비슷한 곳이다. 단, 무표정한 아주머니 대신 심각한 표정의 아저씨가 이곳을 지킨다.
이곳에서는 피자 비앙카(Pizza Bianca)가 최고라는 얘기에 신속 정확히 ‘피자 비앙카’를 외친다(사실 그때는 피자 비앙카가 뭔지 몰랐다). 그러자 치즈는 어디 벗겨지고 없는 밋밋한 빵에다 시퍼런 칼을 가져다 놓는다. ‘어, 저게 무슨 피자야? 어떡하지?’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게 인생인 것을.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뭉텅 잘려 나간 피자 비앙카.

올리브유로 반질반질, 소금기로 짭짤한 그걸 들고 나왔는데 이미 가게 앞은 조각 피자 부대에 점령당했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려는 샐러리맨도, 이 근처를 지나던 관광객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별 기대 없이 그 기름기 좔좔 흐르는 것을 한입 베어 무는데 아, 바삭바삭하고 짭짤한 맛. 마실 것도 없는데 뻑뻑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입에 쩍쩍 달라붙네. 왠지 모를 중독성에 넙데데한 피자 두 조각을 후딱 해치운다. 비앙카, 치즈 없는 피자. 그런데 ‘제대로 된’ 치즈 없는 피자는 웬만한 피자보다 훨씬 낫다. 원래 피자는 이렇게 밀가루에 소금과 올리브유만 살짝 뿌리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피자 비앙카는 피자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피자 비앙카의 매력을 알고 난 후, 나보나 광장 뒤편에 있는 피자 비앙카 전문점을 알게 되었다. 배가 꺼지기 무섭게 그곳으로 향하니, 사람 크기만 한 반가운 피자 비앙카가 있다. 그걸 탁탁 잘라 샌드위치처럼 온갖 재료를 끼워 넣고 뚜껑을 덮는다. 샌드위치가 된 피자 비앙카. 이걸 샌드위치라고 불러야 하나, 피자라고 불러야 하나?

로스콜리 Roscoli
주소 Via dei Chiavari 34
전화 06 686 4045
오픈 월~토요일 12:30~16:00, 20:00~24:00
휴무 일요일
예산 무게 단위로 파는 조각 피자 작은 것 1유로~, 각종 파스타 4유로~, 빵 0.5유로~

일 포르노 캄포 데 피오리 Il Forno Campo de' Fiori
주소 Vicolo del Gallo 14
전화 06 6880 6662
오픈 월~토요일 07:30~14:30, 17:00~20:00
휴무 일요일
예산 무게 단위로 파는 조각 피자 작은 것 1유로~, 빵 0.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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