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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놀이공간

게임, 이미지와 텍스트의 술래잡기 놀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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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시작되면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마스터가 준비한 세계 속으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과 성장시키는 것이다. 특히 캐릭터의 ‘역할(Role)’을 ‘연기(Play)’하는 것이 중요했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컴퓨터 바깥에서 시작된 롤플레잉 게임

이제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게임의 또 다른 근원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잠시 PC를 종료하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야만 한다. 1974년 <Dungeons&Dragons>(이하 ‘D&D’로 표기)라는 게임이 출시되었다. 판타지 세계를 무대로 한 보드게임인 <D&D>의 패키지에는 두 권의 책과 다양한 종류의 주사위가 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은 플레이어를 위한 것이고, 또 한 권의 책은 게임의 마스터를 위한 것이다. 책 속에는 게임의 규칙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마스터는 시나리오와 맵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무대 위에서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진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테면 마스터는 게임에서 신과 같은 존재다. 상황에 대한 묘사나 설명도 모두 마스터의 몫이다. 따라서 그의 진행 실력이 게임의 재미를 결정한다. 한편 플레이어들은 주사위를 굴려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 캐릭터의 능력은 모두 숫자로 표시되며, 이 수치를 종이에 적어가면서 플레이하게 된다. 게임이 시작되면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마스터가 준비한 세계 속으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만약 도적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도적의 말투로, 도적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던전을 탐험하고, 몬스터를 만나 전투를 하고, 보물을 얻으면서 각 캐릭터는 ‘성장’하게 된다. <D&D>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과 성장시키는 것이다. 특히 캐릭터의 ‘역할(Role)’을 ‘연기(Play)’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어떤 도구도 없이 유저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놀이공간. 이것이 흔히 말하는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RPG)의 시작이었다. 이것이 컴퓨터에서 재현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상하는 텍스트의 힘 - <어드벤처>

아타리의 <PONG>이 아케이드 센터를 휩쓸 때, 전혀 다른 게임 하나가 세상에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D&D>의 팬이었던 윌리엄 크라우더는 자신이 즐기던 보드게임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된 던전을 모험하는 게임이었다. <어드벤처>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 남달랐다. <PONG>이 막대기와 공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데 모든 기술을 집중시켰다면, 어드벤처는 오직 텍스트를 사용해 상황을 묘사할 뿐이었다. 이미지가 없으니 조작해야 할 대상도 없었다. 그저 텍스트로 제시되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다시 ‘글자’로 입력해주어야 했다.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묘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아케이드 게임이 당시 기술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게임에 담아낼 수 있었다.

어드벤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의 끝.
당신은 작은 벽돌건물 앞 길 끝에 서 있다. 당신 주변에는 숲이 있다. 작은 시냇물이 빌딩에서 나와 도랑으로 흘러내린다.

>들어가라.

건물 안.
당신은 건물 안에 있는데, 그 안에는 큰 온천이 있다.
여기 바닥에 열쇠가 몇 개 있다.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다.
근처에 반짝반짝 빛나는 청동램프가 있다.
여기에 빈 병이 있다.
(류현주, 『컴퓨터 게임과 내러티브』)


이상은 <어드벤처>의 도입부다. 이렇게 지면에 게임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어드벤처>의 독특한 점이다. 그리고 이런 독특함은 인터페이스의 차이로 이어진다. 언어를 입력해야 하는 <어드벤처>는 오직 키보드로만 플레이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키보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게임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할까? 최근 비디오 게임기의 인터페이스는 Wii의 동작인식 리모컨까지 발전했다. 내가 리모컨을 휘두르면 화면의 대상도 라켓을 휘두른다. 현실의 움직임이 그대로 이미지에 전해지면 십자버튼이나 A버튼의 매개는 점점 사라진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드벤처>의 텍스트 입력은 불편함을 넘어 아예 플레이를 할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즐거움을 느낀다. 네이트온과 트위터에서 말이다. 다만 <어드벤처>는 대화상대가 컴퓨터였기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인터페이스는 다이얼이나 십자버튼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게이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직 리모컨을 휘둘러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어드벤처>는 “당신은 ~하고 있다”라는 2인칭의 시점이 가능했다. 이런 언어적 선언은 그래픽을 대신하여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정보는 일방적이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결코 전지적 시점일 수 없다. 늘 컴퓨터가 제시하는 상황에 수동적으로 부딪힐 뿐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언어가 규정하는 세계에서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1인칭 게임처럼 ‘나’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도 없다. ‘나’ 또한 모니터에 묘사된 인물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즉 1인칭과 3인칭 사이에서 플레이어는 또 다른 허구적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를 컴퓨터와 자신의 사이에 두게 된다. 이 수수께끼의 2인칭 인물은 텍스트 어드벤처가 이미지를 얻게 되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텍스트, 이미지를 취하다

<미스터리 하우스>
<어드벤처>로 시작된 텍스트 어드벤처의 인기는 인포콤의 <조크>로 이어졌다. <조크>에는 ‘ZIL’이라는 언어해석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여러 개의 문이 있는 장소에서 “문을 열어”라고 명령한다면, ZIL은 “어떤 문을 열까요?” 같은 대답을 만들어낸다. 이 강력한 대화엔진 덕분에 <조크>는 마치 진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은 결국 게임에게 그래픽이라는 옷을 권했다. 갑자기 아무렇게나 골라 입은 옷이 제대로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초기의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은 텍스트와 그래픽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시작은 1980년에 출시된 시에라의 <미스터리 하우스>였다. 이 게임에서 그래픽이란 텍스트로 진행되는 게임을 보완하는 일종의 ‘삽화’였다. <미스터리 하우스>의 그래픽은 당시 아케이드 게임이 보여주던 이미지와는 다른 형태를 취했다. 그것은 현실의 매우 구체적인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이미지는 텍스트를 모니터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텍스트로 묘사되는 세계 대신 이미지로 재현되는 세계가 나타나고 캐릭터가 그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같은 회사의 <킹스 퀘스트>가 아마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문자를 얻으면서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처럼 이미지를 얻으면서 어드벤처 장르는 상상의 가능성을 조금씩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RPG라는 장르가 이미지를 손에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컴퓨터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D&D>와 텍스트 어드벤처와의 연관성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던전을 탐험한다는 모티프 자체가 이미 <D&D>에 기반한 것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는 마스터가 읊어야 할 내레이션을 컴퓨터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마주보고 앉은 플레이어는 이제 대사를 말하고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TRPG)의 중요한 요소였던 ‘역할’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또한 텍스트 어드벤처에는 모험만 있을 뿐, 캐릭터의 ‘성장’은 빠져 있었다. 이런 아쉬움은 결국 또 다른 컴퓨터 게임의 탄생을 가져왔다. <D&D>의 세계를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은 그래픽 기술이 PC 게임에 도입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리처드 게리엇은 1980년 <아칼라베스>라는 최초의 CRPG를 개발했는데, 이 게임은 그가 학생 시절에 만든 28개의 <D&D> 게임 중 28번째 작품을 개작한 것이었다. 텍스트가 아닌 그래픽룀로 표현된 던전을 탐험하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게임으로 <미스터리 하우스>와의 시차는 대략 두 달 정도였다. 텍스트로 출발했던 PC 게임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이미지로 옮겨갔다. 리처드 게리엇은 <아칼라베스>를 더욱 다듬어서 이후 <울티마>라는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수많은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RPG의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아칼라베스>
초기 RPG의 역사에서는 <위저드리>(1981)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 역시 <D&D>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CRPG 최초로 파티시스템을 지원했다. 파티를 결성해 마을과 던전을 오가면서 조금씩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최후에는 던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법사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위저드리>는 요즘 게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을 하고, 성장을 하면 무조건 적보다 강해지는 게임이 아니었다. 운이 없으면 레벨이 올라도 능력치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었다. 캐릭터가 죽으면 다시 동료를 모아서 시체를 찾아와야 부활이 가능한데, 시체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캐릭터를 성장시켜야 했고, 무사히 시체를 가져와도 부활 자체가 랜덤이었다. 부활에 실패한 캐릭터는 게임에서 사라지게 된다. 글자 그대로 죽는 것이다. 현실의 죽음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이 투입된 소중한 캐릭터가 사라진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지와 규칙에 의해 발생하는 이 유감의 감정은 텍스트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장치였다.

술래잡기 놀이는 계속된다


<팩맨> <미스터리 하우스> <아칼라베스>로 이어지는 1980년의 다양한 징후들은 게임이 궁극적으로 어느 곳을 지향하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캐릭터와 이미지로 구축된 이야기의 세계였으며, 플레이어의 경험에 의해 이미지가 감정으로 환치되는 세계였다. 게임이 오늘날 모든 놀이를 대표하게 된 것은 단순한 놀이의 규칙을 넘어서 상상력을 보여주고 게이머에게 새로운 감정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갈래의 서로 다른 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케이드 센터의 <PONG>이 이미지의 움직임을 대표한다면, 컴퓨터의 <어드벤처>는 텍스트의 상상력을 대표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지는 텍스트를, 텍스트는 이미지를 빨아들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봉합되었다. 오늘날의 게임들은 그 접합선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지로만 구성된 게임은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텍스트로만 구성된 게임은 영영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게임이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이미지만으로 게임은 성립할 수 없다. 이미지를 지탱하는 규칙과 텍스트, 그밖의 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이미지와 텍스트의 술래잡기 놀이는 아직도 게임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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