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성악하기 전엔 나도 한 주먹 했다오

박인수 교수 인터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성악가가 대중가수와 한 무대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 품위 손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시대가 있었다. 잇따른 팝페라 가수의 러시에 식상함을 느낄 만도 한 현재 상황에서는 무슨 철 지난 코미디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엄격했다. 그런 기형적 구분, 고전음악진영의 대중음악에 대한 홀대에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 성악가 박인수 교수였다.

성악가가 대중가수와 한 무대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 품위 손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시대가 있었다. 잇따른 팝페라 가수의 러시에 식상함을 느낄 만도 한 현재 상황에서는 무슨 철 지난 코미디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엄격했다. 그런 기형적 구분, 고전음악진영의 대중음악에 대한 홀대에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 성악가 박인수 교수였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는 클래식의 두터운 방벽을 스스로 허물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선풍적인 반응을 불러냈다.

하지만 정작 그를 기다린 것은 클래식계의 거센 역풍이었다. 이후 국립 오페라단원 심사에서 석연치 않은 사유로 자리를 내줘야 했고, 심상찮은 성악계의 기류 속에서 고행을 이어가야 했다. 몸을 후려치는 엄혹한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갔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뒤를 따른 것은 50여 년 가까운 광대한 음악업적과 '박인수사단'이라고 할 제자들의 동행이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에서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박인수 교수를 찾았다. 최근 건강악화로 인해 얼굴 면면에서 묻어나는 인생의 굴곡이 더 깊어 보였지만, 일부 답변의 이해를 돕고자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를 때에는 쩌렁한 뱃심이 교수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당당한 기백은 구습에 몸소 투신하여 사자후를 토해내던 20년 전에 비교하여 전혀 풍화되지 않아 보였다. 교수실에 도착했을 때 박 교수는 팝 가수 셀린 디옹의 음반을 듣고 있었다.

지금 듣고 계신 음악이 셀린 디옹이죠?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럼요. 자주 들어요. 이 가수 발성이 너무 좋아요. 발성을 배우고 있지요. 좋으면 배워야지요. 클래식만의 발성은 이제 없습니다. 이름만 있는 거죠.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사실 좀 아팠어요. 그래서 8월 중순 예정되어 있던 유럽공연을 부득이 취소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건강인데...

「향수」 시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1989년 이동원과 「향수」를 부르게 된 탓에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고, 국립 오페라단 단원평가에서도 탈락이 되는 고초를 겪으셨잖아요.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요.

당연히 속상했죠. 저도 사람이니까. 단원들이 저를 빼놓고 모여서 투표를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기도 했지만, 고정관념의 골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내가 만일 그들의 입장이 되었고, 다른 사람이 내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면서 이해를 했죠.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떤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슬로건은 제가 '클래식 음악을 모독한다.'라는 것이었죠.

성악계 내부에서 그렇게 비난을 하던가요.

그렇죠. 이상하게도 비성악 쪽인 기악 같은 곳에서는 찬성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웃음) 저는 그런 고정관념은 굉장히 순수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클래식은 상위계층, 인텔리가 좋아하고 대중음악은 밑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편견 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지식층의 최고지위가 결국에는 교수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노래방 가면 뽕짝 부르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아전인수죠. 그리고 제가 했다는 클래식 모독은 말도 안 되죠.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향수」를 부른 뒤부터 무대에 올라서 클래식 가곡을 부르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가졌어요.

「향수」를 취입하게 된 상황이 궁금합니다.

전부터 알고 있던 재즈가수 김준을 통해서 이동원 씨를 소개받게 되었어요. 저를 찾아왔는데 정지용 시집을 가지고 왔더라고. 그러다 「향수」가 써져 있던 면을 펴고 보여주면서 여기에 곡을 붙이면 같이 노래해 주실 수 있겠냐고 저에게 물어봤죠. 그런데 시가 너무 좋았던 거예요. 원래 제가 서울사람인지라 향수니 고향이니 하는 게 없어요. 하지만 '향수'를 읽으니까 마치 내 고향인 것 같은 느낌이 단번에 들었죠. 곡이 좋다면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전부터 이동원씨의 「이별노래」 같은 노래를 좋아했어요. 녹음 현장에 계신 작곡가 김희갑 선생님이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심에도, 저는 한 번에 녹음을 끝냈어요. 분명히 요구가 있었을 만도 한데, 굉장히 내추럴한 소리가 나왔죠.

「향수」는 명곡인데요,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향수」의 토속적인 매력이 왜 좋았냐 하면. 이동원씨가 나중에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유명한 작곡가에게 반주를 새로 편곡시켜서 모스크바 오케스트라 연주로 녹음을 했어요. 그 반주로 다시 만나 녹음을 했죠. 음악적으로는 멋있게 나왔지만 결과는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게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죠. 강태준 씨가 작사하고, 김희갑 씨가 작곡한 「아름다운 나라」라는 곡도 이동원 씨와 같이 불렀어요. 그 곡도 굉장히 좋은 노래지만 역시 히트는 못하더라고. 히트하는 곡은 따로 있는 거야. 내가 히트하겠다고 스무 곡을 녹음해도 잘 되는 건 하나도 없어. (웃음)


많은 사람들이 성악과 대중가요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호흡을 맞춘 「Perhaps love」 같은 노래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반가움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아요. 제가 불렀기 때문에 그런 말을 대놓고는 못하지만 제 생각도 그렇고요. 이동원의 목소리와 제 목소리 간의 언밸런스에서 향토적인 느낌을 뛰어넘는 매력이 느껴져요. 곡이 굉장히 내추럴하고요. 그래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향수」를 통한 교수님의 목소리가 대중들로 하여금 성악을 가깝게 이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봅니다. 성악이 따분한 음악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셨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제가 「향수」에서 목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더 대중가요의 스타일을 따른 것은 아니에요. 저는 저대로 불렀을 뿐인데.

하지만 「향수」 이래로 여전히 대중가요와 클래식과의 벽은 존재하고 있는데요.

감동을 주는 음악이 최고인 거에요. 그런 감동을 대중음악에서도, 성악에서도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구분을 할 수 없다고 봐요. 약간의 방법론과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근본적으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요.

바뀐다는 것이 조금 변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봐요. 최대한 내추럴하게. 소리를 내는 것도 마치 말하는 것처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솔직히 성악이라 하면 사람들이 고급문화로 인식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면으로 받아들이며 즐기는 것 같지 않아 보여요. 단순히 성악의 전통적인 모양새를 습관적이고 억지로 따르게 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으로 회귀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죠. 실상 세계적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소수의 성악가는 내추럴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에요.

그렇다면 개인적인 시각에서 가장 내추럴한 목소리를 보유한 성악가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옛날 분들을 좋아해요. 녹음시대 초기에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같은 분들도 뛰어나죠. 하지만 현대로 들어왔을 때는 단연 고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죠. 앞의 내용과 연결되지만 파바로티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내추럴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워낙 목소리가 막힘이 없고 인위적인 느낌이 안 들지. 그래서 불편한 느낌이 전혀 없는 거예요.

박인수 교수님의 보이스는 뭐랄까요, 도밍고와 파바로티를 섞은 느낌인 것 같은데요.

글쎄요, 과찬을 하셨는데. 미국에 있을 때, 지도 선생님이 제 목소리를 듣고 스웨덴의 전설적인 성악가인 유씨 비욜링(Jussi Bjoerling)의 목소리와 가장 흡사하다고 했어요. 세상에 목소리 좋은 가수는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데, 제 목소리는 감정이 가득 묻어 있는 소리('Something with a heart')라고 표현하며 평가를 해주시더라고요.

고희가 넘은(1938년생) 장인이 거듭 강조한 좋은 목소리의 조건은 자연미였다. 완벽 그 자체를 실현하기 위해 탐구와 단련의 여정을 횡보(橫步)한 그가 당도한 종착역이 바로 인위와 변조가 증발된 공(空)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궁극을 향한 회귀'에 답하는 작금의 소리는 공허함이 깊어 보인다. 폭넓은 음역 대와 요동치는 바이브레이션만이 가수의 가치를 판단하는 공통척도로 득세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외형적인 스킬에 매몰되어 가창력을 내세우는 이들조차도 비주얼 공세에 밀려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요즘 대중음악 분야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신지요.

다른 요소도 필요하지만 음악은 특히 노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요즘 들어 그 밸런스가 한쪽으로 기울여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있어요. 그런 음악이 지금은 대중이 열광하더라도 이런 식의 진행이 계속 이어지다가는 생명이 짧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폭 넓게 대중을 끌어들인다는 장점은 클래식 쪽에서도 대중음악으로부터 배워야 해요. 클래식도 기원은 결국 대중음악이었잖아요.

'4초 가수' 'MR제거 동영상'이다 해서 최근 가요계에서는 가창력이 푸대접받는 분위기입니다. 어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꼭 젊은 층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가수는 노래가 주(主)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래가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노래 외적인 퍼포먼스도 그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는 있겠지요. 현재가 비주얼 세상이기도 하고 음향보다는 영상 쪽이 많이 발달함에 따른 현상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노래가 완전히 배제된 가수라면 생명력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발성이나 호흡의 측면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몇몇 대중가수를 꼽으신다면.

제가 보기에는 조용필도 좋고, 이승철도 좋고, 어떤 장르에서는 또 이동원도 좋고. 여가수로 보면 많이 있는데, 이미자 같은 분도 무척 좋아해요. 자주 비교되는 미소리 히바리(加藤和枝)에 비하여 다양성의 측면에서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내추럴한 목소리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좋아하는 가수가) 상당히 많아요. 나훈아씨도.

이승철 노래를 높이 사는 이유는요.

발성이 좋은 것 같아요. 목소리가 마음먹은 대로 잘 나가는 게 가창력이 정말 좋은 거지요. 한번 방송 때문에 만났을 때 농담조로 이승철 씨에게 “고음 좀 가르쳐줘요” 하고 부탁한 적이 있었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배우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거든요. 그때 이승철씨가 먼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정말 고음을 잘 구사하더라고. 나중에 내가 뒤이어 올라가서 흉내 내서 불렀는데 완전 망했어.(웃음)

조용필이든 이승철이든 가수가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지요.

그렇죠.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쇼맨십은 잠시지.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는 노래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박인수 이름으로 발매한 앨범이 모두 몇 장인가요.

성가집까지 합쳐서 한 10장 정도 되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향수」 이후에 대중가요 중에 부르고 싶은 곡이 있나요.

사실은 많아요. 그런데 제가 게을러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죠. 당장 조용필의 「허공」 같은 곡이 떠오르네요. 취입할 기회가 한 번 있었어요. 정풍송 작곡가가 의뢰를 해서 신곡과 기존의 곡을 혼합해서 CD 음반을 내기로 했었죠. 하지만 당시에 목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대중가요를 부른 사례가 이 밖에도 많이 있었나요.

취입한 것은 조용필의 「친구여」가 있었고, 콘서트에서도 많이 불렀어요. 그 다음에 이문세 씨와 1996년에 「겨울의 미소」라는 곡도 같이 했죠. 「겨울의 미소」가 「광화문 연가」를 작곡했던 이영훈 씨가 만든 곡이어서 2008년에 헌정음악회 때 내가 가서 노래를 불렀지. 안치환 씨랑은 「이제는 만나야 한다」라는 곡을 무대에서 같이 부르기도 했었고, 유심초의 「사랑이여」도 취입을 했던 곡이고.

지금까지 무대에 오른 오페라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배역은 뭔가요.

라 보엠(La Boheme)이에요. 상연하기 전에 오디션을 먼저 보잖아요. 대개 보면 이름난 슈퍼스타나 경험이 많은 프로들이 참여하는데도 오디션을 보면 100퍼센트 배역을 따요. 목소리와 감수성이 모두 가장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성악과 대중가요를 통틀어 스스로 뽑는 자신 최고의 가창을 물었더니) 역시 오페라죠. 물론 가곡도 있지만, 라보엠 같은데요? 「그대의 찬 손」같이 로맨틱한 분위기가 흐르는 곡들.

노래하기 전에는 굉장히 불량소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몸이 약했어요. 별명이 '색시'였고요. 생긴 것도 계집애 같고, 성격도 여성적이었죠.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때 아이들에게 핍박을 당해서 덤비지도 못하고 맞기만 했는지라,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되었던 거죠. 그 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중학교에 들어와서 제일 ?일드한 것만 골라서 럭비하고, 유도하고, 기계체조도 하고. 고등학교 올라가니까 자연스럽게 몸도 좋아지고 해서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이랑 놀게 되더라고. 예전에는 공부도 잘했는데 성적도 떨어지게 되고. 운동하는 애들이 누구예요. 다 주먹이지. 지금 같으면 다 감옥에 들어갈 만한 일인데 그때는 싸움도 많이 하고. 그리고 제가 일제 강점기니, 6.25니 다 봤잖아요. 그 때는 힘 있는 놈들한테 다 당했잖아. 우리가 나쁜 짓 안했는데도. 사람 죽이는 것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인지 힘에 대한 숭배가 있었죠. 하지만 그때도 노래 부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어요.

어린 시절의 호기가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네요.

그럴 수도 있죠. 소심한 성격을 자신감 있게 변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음악이거든요. 운동하면서 얻게 된 육체적인 힘이 발성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노래하면서 필요할 때는 막 나갈 수 있는 것, 두려움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때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인생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언제인가요.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가 저를 뽑아서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한 때가 아닐까 싶어요. 칼라스가 1년 동안 줄리아드 음대 내의 마스터 클래스의 초빙교수로 온 적이 있었어요. 마침 제가 오디션에 참가했을 때 칼라스가 심사를 봤던 것이죠. 합격을 주면서 칼라스가 저를 매우 높이 평가를 했어요. 지금은 세계적인 테너가 된 닐 쉬코프(Neil Shicoff)와 그때 같은 반이 되어 칼라스가 수여한 장학금을 받고 음악공부를 했죠. 1971년에 줄리아드에 갔다가 오페라 배역 문제로 트러블이 생겨서 1년 뒤에 맨해튼 음대로 자리를 옮겼어요. 거기서 2년 동안 오페라 전 배역을 다 맡았고, 총장이 오페라단에 저를 소개한 뒤로는 본격적으로 1974년부터 1983년까지 미국에서 계속 오페라 활동을 했죠.

귀국하고 나서 조용필과의 협연이 거론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야기만 오갔어요. 조용필씨와 안 하고 이동원 씨랑 한 것이 의도적인 것은 절대 아니에요. 그 당시에는 굳이 대중가수와 협연을 해야겠다는 뜻은 아니었고, 조용필 씨 쪽에서도 최종적으로 오케이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클래식과 우리 민요의 창법을 접목시킨 신(新)창악 시도는 어떤 의미였나요.

한창 미국에서 오페라 무대에 많이 오를 때 1978년에 미시건 오페라단에서 독창회를 열어줬어요. 그 때 제가 우리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써 우리 가곡인 「가고파」, 「보리밭」, 「청산에 살리」를 불렀는데 미국 관객들이 '뷰티플!' 이라면서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 곡 어느 나라 노래에요?”라고 물어보더라고. 아니 해설까지 영어로 다 붙여주면서 우리나라 예술가곡이라고 설명해줬는데. 순간 비꼰다는 인상을 금방 캐치했죠. 작사자나 작곡가나 모두 한국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형식이나 선율이 서양음악 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내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음악이 이들 귀에는 모두 서양음악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죠. 그 때부터 우리의 전통 민요조로도 노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서양 발성법으로 우리 오리지널의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었죠. 당연히 연구가 필요하더라고요. 민요조로 되어 있는 가곡은 「박연폭포」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이후에 「심청가」를 작곡하신 김동진 선생님이나,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최영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신창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 것이에요. 최영선 선생이 직접 채보해서 편곡해주신 곡을 모아서 민요전집으로 꾸몄죠. 막상 시도해서 들어보니까 상당히 우리 소리와 근접한 부분도 있지만 판소리를 특유의 꺾임이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잘 안 나는 것이에요. 가끔 <열린 음악회> 같은 무대에서 뵙게 되는 신영희, 안숙선, 성창순 명창 분들에게 여쭤봤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그러세요. “박 교수, 그거 배우면 안 돼, 그냥 해. 우리에게 배우면 그게 판소리지 어떻게 그게 박 교수 노래야.”라고. 신창악에 도전하면서 깨달은 것은 많아요. 굳이 고음을 클래식 적으로 구사하지 말고 민요 식으로 처리하니까 부르면서도 훨씬 기운이 나고 발성이 좋아지더라고요. 인위적인 ?성은 듣는 사람의 귀에서도 기분이 날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벨칸토 발성하고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죠.

결국에는 울림에서 느껴지는 매력인 셈이네요.

하나 어려운 점은, 우리 판소리 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내추럴 하잖아요. 그런데 물리적인 발성을 살펴보면 내추럴하지 못해요. 그 소리가 목을 혹사하고 결절하면서 울리거든요. 1972에 김소희 명창을 포함해서 국악인들이 카네기홀에서 소리를 했어요. 「심청가」, 「춘향가」 등 몇 대목을 하셨는데 반응이 좋아서 뉴욕 타임스에서도 호평이 터져 나왔어요. 영혼의 목소리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서구 관객들과 진짜 공감대를 형성했느냐. 그 문제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특수함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 그대로를 세계에 보내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런 특수성은 세계 수백 개의 나라가 다 가지고 있다고. 신창악도 거기에서 착안을 한 거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워낙 타고난 건강이 있어서 따로 관리는 안했는데. 그래서 내가 요즘 들어서 사인을 받은 거지. 조심하라고 (웃음). 제가 봤을 때는 운동을 계속 하고 음식도 조심해야 해요. 또 이런 쪽으로도 봐요. 노래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호흡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운동이 돼요. 옛날에는 운동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게을러지기도 하고 해서 노래를 많이 부름으로써 얻는 것이 큰 것 같아요. 가장 무서운 적은 감기죠.

그동안의 경험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가장 올바른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죠. 소리도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들린다고 봐요. 어떤 소리를 원하는가에 따라서 귀도 거기에 맞춰가죠. 좋은 소리를 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념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당연히 귀도 그런 스타일의 소리에만 끌리게 되요. 하지만 확실히 저는 마음이 실린 목에서 가장 좋은 소리가 나온다고 보거든요. 마음과 발성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가요나 클래식이나 계속 듣다 보면 질림이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아주 말도 잘해서 좋아하다가 그것도 순간이지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질림을 느낄 때가 있죠. 가장 아름답고도 마음이 전부 실린 소리에서는 지루함이 없어요.

우선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해야죠. 저도 한때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방법을 안 가리고 노력했지만 그때는 얻는 것이 없더라고요. 오히려 부르려는 노래가 뜻하는 바를 온전히 표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니 목소리가 좋아짐을 느꼈어요.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알았지만, 자기 소리의 장단점은 타율적이 아닌 당사자가 먼저 진실로 인식해야 한다는 교수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생마다 자신의 목소리 안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인 밸런스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소통하면서 의논하려고 해요. 무조건 이렇게 해라는 강요가 아니고요. 물론 벨칸토 시기에는 모방교수법이 있었기는 했죠. 스승이 소리 한번 내고 이렇게 따라 해라고 가르치면 모방하는 제자 중에 이긴 놈이 가수가 되는 것이에요. 하지만 발성의 세세한 감각을 표현하기에는 언어 가지고만은 부족해요. 오해도 많아지고요.

마지막으로 박인수 교수님에게 노래와 음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노래 자체가 나라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생 동안 제일 바라는 것은 딱 한가지에요. 마음이 실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에요.

박인수는 라보엠의 주인공 루돌포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한 예술가로서 삶과 사랑에 번민하던 루돌포의 고뇌가 박인수의 궁핍했던 청년 시절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상류층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온 클래식을 대중에게 환원하려했던 행동은 그가 밟아온 삶의 궤적을 온전히 이어온 연장선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중가요와의 접점 모색, 동등한 지위에서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진행되는 교수법 등은 꾸밈없는 음악관을 그대로 반영한 예술방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진심을 담아서, 듣는 이의 심연을 울리는 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박인수는 또다시 섬광을 불태우고 있었다.



인터뷰 : 임진모, 이종민, 홍혁의
사진 : 김민호
정리 : 홍혁의

글 / 홍혁의 (hyukeui1@nat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오늘의 책

이토록 매혹적인 외국어 공부

인간은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외국어 공부는 보다 넓은 세계도 보여준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응용언어학자 김미소 두 저자가 쓴 글을 읽으면 미치도록 외국어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영어, 일어 모두.

배우 문가영이 아닌, 사람 문가영의 은밀한 기록

배우 문가영의 첫 산문집. 문가영은 이번 에세이를 통해 ‘파타’라는 새로운 얼굴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언어들을 선보인다.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하며, 솔직한 생각과 경험을 형태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실험적으로 다뤄냈다. 앞으로의 그녀가 더 기대되는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에세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로운 삶에 도달한 68만 유튜브 크리에이터 드로우앤드류의 신간이다. 남에게 보이는 삶을 벗어나 온전한 나의 삶을 위해 해온 노력과 경험을 들려준다. 막막하고 불안한 20-30대에게 자신만의 삶을 방식을 찾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사교육의 나라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잡기

단돈 8만 원으로 자녀를 과학고에 보낸 엄마가 알려주는 사교육을 줄이고 최상위권 성적으로 도약하는 법! 고액의 사교육비와 학원에 의존하는 대신, 아이의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위해 부모가 가정에서 어떻게 올바른 학습 환경을 마련하고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