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하기 전엔 나도 한 주먹 했다오
박인수 교수 인터뷰
성악가가 대중가수와 한 무대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 품위 손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시대가 있었다. 잇따른 팝페라 가수의 러시에 식상함을 느낄 만도 한 현재 상황에서는 무슨 철 지난 코미디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엄격했다. 그런 기형적 구분, 고전음악진영의 대중음악에 대한 홀대에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 성악가 박인수 교수였다.
성악가가 대중가수와 한 무대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면 품위 손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시대가 있었다. 잇따른 팝페라 가수의 러시에 식상함을 느낄 만도 한 현재 상황에서는 무슨 철 지난 코미디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엄격했다. 그런 기형적 구분, 고전음악진영의 대중음악에 대한 홀대에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 성악가 박인수 교수였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는 클래식의 두터운 방벽을 스스로 허물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선풍적인 반응을 불러냈다.
하지만 정작 그를 기다린 것은 클래식계의 거센 역풍이었다. 이후 국립 오페라단원 심사에서 석연치 않은 사유로 자리를 내줘야 했고, 심상찮은 성악계의 기류 속에서 고행을 이어가야 했다. 몸을 후려치는 엄혹한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갔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뒤를 따른 것은 50여 년 가까운 광대한 음악업적과 '박인수사단'이라고 할 제자들의 동행이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에서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박인수 교수를 찾았다. 최근 건강악화로 인해 얼굴 면면에서 묻어나는 인생의 굴곡이 더 깊어 보였지만, 일부 답변의 이해를 돕고자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를 때에는 쩌렁한 뱃심이 교수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당당한 기백은 구습에 몸소 투신하여 사자후를 토해내던 20년 전에 비교하여 전혀 풍화되지 않아 보였다. 교수실에 도착했을 때 박 교수는 팝 가수 셀린 디옹의 음반을 듣고 있었다.
지금 듣고 계신 음악이 셀린 디옹이죠?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럼요. 자주 들어요. 이 가수 발성이 너무 좋아요. 발성을 배우고 있지요. 좋으면 배워야지요. 클래식만의 발성은 이제 없습니다. 이름만 있는 거죠.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사실 좀 아팠어요. 그래서 8월 중순 예정되어 있던 유럽공연을 부득이 취소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건강인데...
「향수」 시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1989년 이동원과 「향수」를 부르게 된 탓에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고, 국립 오페라단 단원평가에서도 탈락이 되는 고초를 겪으셨잖아요.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요.
당연히 속상했죠. 저도 사람이니까. 단원들이 저를 빼놓고 모여서 투표를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기도 했지만, 고정관념의 골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내가 만일 그들의 입장이 되었고, 다른 사람이 내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면서 이해를 했죠.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떤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슬로건은 제가 '클래식 음악을 모독한다.'라는 것이었죠.
성악계 내부에서 그렇게 비난을 하던가요.
그렇죠. 이상하게도 비성악 쪽인 기악 같은 곳에서는 찬성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웃음) 저는 그런 고정관념은 굉장히 순수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클래식은 상위계층, 인텔리가 좋아하고 대중음악은 밑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편견 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지식층의 최고지위가 결국에는 교수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노래방 가면 뽕짝 부르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아전인수죠. 그리고 제가 했다는 클래식 모독은 말도 안 되죠.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향수」를 부른 뒤부터 무대에 올라서 클래식 가곡을 부르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가졌어요.
「향수」를 취입하게 된 상황이 궁금합니다.
전부터 알고 있던 재즈가수 김준을 통해서 이동원 씨를 소개받게 되었어요. 저를 찾아왔는데 정지용 시집을 가지고 왔더라고. 그러다 「향수」가 써져 있던 면을 펴고 보여주면서 여기에 곡을 붙이면 같이 노래해 주실 수 있겠냐고 저에게 물어봤죠. 그런데 시가 너무 좋았던 거예요. 원래 제가 서울사람인지라 향수니 고향이니 하는 게 없어요. 하지만 '향수'를 읽으니까 마치 내 고향인 것 같은 느낌이 단번에 들었죠. 곡이 좋다면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전부터 이동원씨의 「이별노래」 같은 노래를 좋아했어요. 녹음 현장에 계신 작곡가 김희갑 선생님이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심에도, 저는 한 번에 녹음을 끝냈어요. 분명히 요구가 있었을 만도 한데, 굉장히 내추럴한 소리가 나왔죠.
「향수」는 명곡인데요,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향수」의 토속적인 매력이 왜 좋았냐 하면. 이동원씨가 나중에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유명한 작곡가에게 반주를 새로 편곡시켜서 모스크바 오케스트라 연주로 녹음을 했어요. 그 반주로 다시 만나 녹음을 했죠. 음악적으로는 멋있게 나왔지만 결과는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게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죠. 강태준 씨가 작사하고, 김희갑 씨가 작곡한 「아름다운 나라」라는 곡도 이동원 씨와 같이 불렀어요. 그 곡도 굉장히 좋은 노래지만 역시 히트는 못하더라고. 히트하는 곡은 따로 있는 거야. 내가 히트하겠다고 스무 곡을 녹음해도 잘 되는 건 하나도 없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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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우리 민요의 창법을 접목시킨 신(新)창악 시도는 어떤 의미였나요.
한창 미국에서 오페라 무대에 많이 오를 때 1978년에 미시건 오페라단에서 독창회를 열어줬어요. 그 때 제가 우리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써 우리 가곡인 「가고파」, 「보리밭」, 「청산에 살리」를 불렀는데 미국 관객들이 '뷰티플!' 이라면서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 곡 어느 나라 노래에요?”라고 물어보더라고. 아니 해설까지 영어로 다 붙여주면서 우리나라 예술가곡이라고 설명해줬는데. 순간 비꼰다는 인상을 금방 캐치했죠. 작사자나 작곡가나 모두 한국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형식이나 선율이 서양음악 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내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음악이 이들 귀에는 모두 서양음악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죠. 그 때부터 우리의 전통 민요조로도 노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서양 발성법으로 우리 오리지널의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었죠. 당연히 연구가 필요하더라고요. 민요조로 되어 있는 가곡은 「박연폭포」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이후에 「심청가」를 작곡하신 김동진 선생님이나,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최영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신창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 것이에요. 최영선 선생이 직접 채보해서 편곡해주신 곡을 모아서 민요전집으로 꾸몄죠. 막상 시도해서 들어보니까 상당히 우리 소리와 근접한 부분도 있지만 판소리를 특유의 꺾임이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잘 안 나는 것이에요. 가끔 <열린 음악회> 같은 무대에서 뵙게 되는 신영희, 안숙선, 성창순 명창 분들에게 여쭤봤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그러세요. “박 교수, 그거 배우면 안 돼, 그냥 해. 우리에게 배우면 그게 판소리지 어떻게 그게 박 교수 노래야.”라고. 신창악에 도전하면서 깨달은 것은 많아요. 굳이 고음을 클래식 적으로 구사하지 말고 민요 식으로 처리하니까 부르면서도 훨씬 기운이 나고 발성이 좋아지더라고요. 인위적인 ?성은 듣는 사람의 귀에서도 기분이 날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벨칸토 발성하고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죠.
결국에는 울림에서 느껴지는 매력인 셈이네요.
하나 어려운 점은, 우리 판소리 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내추럴 하잖아요. 그런데 물리적인 발성을 살펴보면 내추럴하지 못해요. 그 소리가 목을 혹사하고 결절하면서 울리거든요. 1972에 김소희 명창을 포함해서 국악인들이 카네기홀에서 소리를 했어요. 「심청가」, 「춘향가」 등 몇 대목을 하셨는데 반응이 좋아서 뉴욕 타임스에서도 호평이 터져 나왔어요. 영혼의 목소리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서구 관객들과 진짜 공감대를 형성했느냐. 그 문제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특수함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 그대로를 세계에 보내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런 특수성은 세계 수백 개의 나라가 다 가지고 있다고. 신창악도 거기에서 착안을 한 거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워낙 타고난 건강이 있어서 따로 관리는 안했는데. 그래서 내가 요즘 들어서 사인을 받은 거지. 조심하라고 (웃음). 제가 봤을 때는 운동을 계속 하고 음식도 조심해야 해요. 또 이런 쪽으로도 봐요. 노래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호흡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운동이 돼요. 옛날에는 운동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게을러지기도 하고 해서 노래를 많이 부름으로써 얻는 것이 큰 것 같아요. 가장 무서운 적은 감기죠.
그동안의 경험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가장 올바른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죠. 소리도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들린다고 봐요. 어떤 소리를 원하는가에 따라서 귀도 거기에 맞춰가죠. 좋은 소리를 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념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당연히 귀도 그런 스타일의 소리에만 끌리게 되요. 하지만 확실히 저는 마음이 실린 목에서 가장 좋은 소리가 나온다고 보거든요. 마음과 발성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가요나 클래식이나 계속 듣다 보면 질림이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아주 말도 잘해서 좋아하다가 그것도 순간이지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질림을 느낄 때가 있죠. 가장 아름답고도 마음이 전부 실린 소리에서는 지루함이 없어요.
우선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해야죠. 저도 한때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방법을 안 가리고 노력했지만 그때는 얻는 것이 없더라고요. 오히려 부르려는 노래가 뜻하는 바를 온전히 표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니 목소리가 좋아짐을 느꼈어요.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알았지만, 자기 소리의 장단점은 타율적이 아닌 당사자가 먼저 진실로 인식해야 한다는 교수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생마다 자신의 목소리 안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인 밸런스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소통하면서 의논하려고 해요. 무조건 이렇게 해라는 강요가 아니고요. 물론 벨칸토 시기에는 모방교수법이 있었기는 했죠. 스승이 소리 한번 내고 이렇게 따라 해라고 가르치면 모방하는 제자 중에 이긴 놈이 가수가 되는 것이에요. 하지만 발성의 세세한 감각을 표현하기에는 언어 가지고만은 부족해요. 오해도 많아지고요.
마지막으로 박인수 교수님에게 노래와 음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노래 자체가 나라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생 동안 제일 바라는 것은 딱 한가지에요. 마음이 실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에요.
박인수는 라보엠의 주인공 루돌포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한 예술가로서 삶과 사랑에 번민하던 루돌포의 고뇌가 박인수의 궁핍했던 청년 시절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상류층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온 클래식을 대중에게 환원하려했던 행동은 그가 밟아온 삶의 궤적을 온전히 이어온 연장선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중가요와의 접점 모색, 동등한 지위에서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진행되는 교수법 등은 꾸밈없는 음악관을 그대로 반영한 예술방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진심을 담아서, 듣는 이의 심연을 울리는 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박인수는 또다시 섬광을 불태우고 있었다.
인터뷰 : 임진모, 이종민, 홍혁의
사진 : 김민호
정리 : 홍혁의
글 / 홍혁의 (hyukeui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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