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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비교되는 ‘맛없는’ 영국 음식

‘영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카레’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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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영국 요리 쇠락의 원인을 상류층 기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소박하지만 끈질기게 그 뿌리를 이어 온 서민 요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요리만 봐도 고급 요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6세기 이후로 그다지 세련되게 발전되어 오지 못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영국 입국 심사대에 서 있으면 항상 긴장이 된다. 별 이유 없이도 입국이 거절되는 경우를 여럿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이유 없이 가슴이 콩닥거린다. 드디어 내 차례, 멀리 여성 입국 심사관이 나를 부른다.
“영국에는 왜 왔나요?”
주저할 만한 이유가 없다. 예상했던 질문에 살짝 미소까지 띠며 당당히 말한다.
“여행을 하러 왔어요. 유럽 맛 기행을 하는데, 영국의 맛을 경험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순간, 그녀의 눈썹이 산봉우리처럼 올라간다. “영국에 맛 기행을 왔다고요? 영국에?”‘뭘 잘못 먹었냐?’란 눈초리.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어디에 머무를 거냐고 물었는데 호텔 바우처도 없었다(사실 친구 집에 묵기로 했었다).
심사관은 이미 ‘나 한 건 잡았어’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그럼 런던 다음에는 어디로 가나요?”
“비아리츠로 가요. 산세바스티안으로 가야 하거든요.”
‘거짓말도 뭔가 그럴듯한 걸로 해야지. 그 희한한 도시는 뭐냐’는 표정.
“스위스의 도시인가요?”
“아니요, 프랑스요. 비아리츠 가까이에 있는 스페인의 미식 도시 산세바스티안으로 가야 하거든요.”
“그럼 항공권을 보여 줄래요?”
당황해서 그런지 잘 찾아지지는 않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겨우 항공권이 손에 집혔다.
“비아리츠, 비아리츠. 가는 게 맞네요, 음.”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싶었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냥 가란다. 나는 엄연한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하마터면 런던 공기도 못 마셔 보고 돌아갈 뻔했다. 런던에 ‘맛 기행’을 왔다는 얘기가 영국 사람이 듣기에 그리 황당한 것이었을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런던에는 식당이 아주 많다. 어디 못지않게 외식과 먹는 것을 사랑한다. 요리에 대한 열정도 뜨겁다. 어쨌든 런던에는 맛있는 곳이 꽤 많다. 이렇게 큰 국제도시에, 사람이 모이고 자본이 몰리는데 맛있는 곳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영국 음식(British Food). 런던에서의 유일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인 고든 램지는 프렌치 레스토랑이고, 영국의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의 레스토랑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혁신적인 요리로 ‘세계 50대 레스토랑’에서 항상 수위권에 드는 팻 덕(The Fat Duck)은 어디에도 속한다고 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상의 요리이다.

영국의 한 설문 조사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카레’가 1위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럼 과연 영국 요리란 무엇일까? 로스트비프도 있고, 피시 앤드 칩스도 있고, 고기 파이도 있고, 돼지 피를 넣은 블랙 푸딩, 치즈 토스트 같은 웰시 레어빗(Welsh Rarebit)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김치, 이탈리아의 파스타, 일본의 스시처럼 강렬하진 않다. 찹쌀 호떡과 대구 전을 우리나라 대표 음식으로 꼽을 수 없듯이 말이다.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프렌치 퀴진’을 꼽기도 하는 프랑스와 도버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다를까? 이것은 현재만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19세기 중순 장 생타로망이라는 프랑스 학자는 “영국인은 원래 비프스테이크와 플럼 푸딩을 잔뜩 먹는 대식가로서, 마치 자신이 막 삼킨 가젤 때문에 거의 질식 상태에 있는 보아 구렁이와 같다”라는 얘기를 남겼고, 19세기 초 프랑스 외교관 탈레랑은 “프랑스에는 세 가지 종교와 300종류의 소스가 있다. 영국에는 300가지 종교와 세 가지 소스가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인의 요리 관련 DNA 분석 자료는 찾을 수 없고, 현재 영국 음식의 열등함(?)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 요리 발전의 역사는 상류 계층의 기호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이탈리?를 제외한 유럽의 요리 수준은 프랑스를 포함해서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럼 영국과 가장 가깝게 붙어 있으면서, 음식에서만큼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 주는 프랑스의 음식 문화 발전사를 잠시 살펴본다.

프랑스 음식 문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온 이탈리아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베르사유 궁중 문화에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절대 군주와 중앙 집권제라는 정치적인 목적 아래 귀족들은 왕의 지배하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 요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프랑수아 바텔이라는 한 시종장이 루이 14세의 연회를 위한 생선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고 자기 몸을 세 번 찔러 자살까지 한 일화도 있다. 미식가 루이 14세에서 루이 15세까지 계속 발전을 이루다가 루이 16세 시절,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궁 안의 제빵사, 요리사는 궁 밖으로 나가 신흥 부유층과 대중을 위한 요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마리 앙투안 카렘, 20세기에는 에스코피에라는 전설적인 요리사들이 등장하며 프랑스 요리 수준을 한 단계씩 올려놓는다.

영국은 암흑의 시기였던 중세 시대에도 풍족한 자원으로 유럽에서 가장 배가 두둑한 나라였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 요리처럼 정교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커다란 고기를 통째로 익혀 내는 요리는 일품이었다. 앤 여왕 시기(루이 14세 정도의 시기) 궁정 요리는 전성기를 누렸는데 미식가였던 앤 여왕은 요리사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요리책을 내기도 했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영국의 프랑스 요리사 에이브러햄 헤이워드는 1813년 ‘잉글랜드에서 요리는 잘 만들어져 있을 때, 세계 어느 나라의 것보다 우수하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명맥을 유지해 오던 영국 전통 요리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18세기까지 존재하던 영국 전통 음식이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미 최고의 절정에 올랐던 프랑스 요리를 선호하게 된 영국 상류층의 기호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영국뿐 아니라 유럽 상류층 대부분이 프랑스 요리에 열광했을 때였기에 꼭 이것만을 이유로 돌리기는 부족하다.


그리고 꼭 영국 요리 쇠락의 원인을 상류층 기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소박하지만 끈질기게 그 뿌리를 이어 온 서민 요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요리만 봐도 고급 요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6세기 이후로 그다지 세련되게 발전되어 오지 못했다. 특히나 미슐랭 가이드와는 궁합이 잘 안 맞아서 미슐랭이 좋아하는 파인 퀴진(Fine Cuisine), 고급 요리 분야에서 이탈리아는 항상 하위권을 달린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소박한 보통 요리, 즉 엄마 솜씨는 언제나 최고다.

급격한 산업화로 19세기에 영국 향토 요리들이 사라졌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산업화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거쳐 간 과정인 만큼 이 이유도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또다시 어디로 돌려야 할까? 유럽(북유럽은 제외)에서 기후가 안 좋은 편에 속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특히나 영국은 18~19세기 식민지로부터 식량을 걷어 들여 막대한 부를 축척하면서 자국의 농업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기네 땅에서 자란 농산물을 소비하기보다는 식민지를 통한 조달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음식이 외교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는 것에 비한다면 영국은 애초부터 음식에 대한 기본 개념과 관심 자체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고 만다. 영국의 주체성 없는 요리가 태생적인 유전자 DNA 탓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다시 번쩍 전통을 세우며 ‘대 부활’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잘나가는 런던의 레스토랑을 보면 여전히 이탈리아식, 스페인식, 프랑스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스키 성지여행』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술이라는 건 그게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 그 술이 만들어진 장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중략) 흔히 말하듯이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많은 나라를 기웃거리며 쩝쩝거리는 이 천생 먹보는 暫 말에 200프로 공감하며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좋은 음식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물론 본토 뺨치게 맛있는 곳, 오히려 외국인의 입맛에 더 맞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곳저곳 다니며 내가 얻은 결론은 하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곳, 그 고장 고유의 맛은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 우리 음식 맛이 장맛, 대대로 내려온 어머니의 손맛이듯 말이다. 그러니 영국이 진정 미식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전통 음식을 다시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든 튀긴 초록 토마토(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전통 식품으로 꼽기도 하는 200년 역사의 미국과는 다르지 않은가? 찬란한 역사를 이어 온 대영 제국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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