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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고등학생이 그림 그린다 하면 당연히…”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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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생각하면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과 바닥에 드리워진 플라타너스의 그림자가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자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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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생각하면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과 바닥에 드리워진 플라타너스의 그림자가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자들 중 하나였다.
그림자들은 밝고 신선하며 여렸다. 내게는 모든 사물들이 그림자 안에 있을 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형태를 만든다. 색깔의 깊이를 더하고 평면에 퍼져 있는 것을 공간 안으로 끌어올린다.
-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견지 형에게 말했을 때는 이런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막연했고 불안했고,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된다면, 설레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체한 것처럼 손이 자꾸 차가워져서, 자꾸 손을 주물렀다.

그래서, 첫 장면은 이렇다. 나는 처음 들어와본 작업실 한쪽 벽의 의자에 앉아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견지 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견지 형, 입 안으로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 어색하지만 건우 오빠가 불렀던 대로 그대로 불러야만 할 것 같다. 오빠라든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 사람, 견지 형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다.
작업실은 온통 하얗다. 사실 때 묻어 어둡고 얼룩들로 칙칙하지만 넓은 창으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고 있는 내게는 온통 하얗게 떠 보인다. 빛나 보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쉬기가 힘들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을 것 같다. 마침내 견지 형이 나타난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 순간에 나는 고함을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한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뚝뚝 말이 떨어져내렸다. 나는 나의 말들이, 소리가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려 짙은 얼룩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 피 같고 물감 같은 얼룩이 내 발에 닿고 나에게 닿았다. 그러자 비로소 초조함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견지 형이 말했다.
“여긴 학생은 안 받아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잠깐,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견지 형은 조금 친절하게 말했다.
“다른 학원 소개해줄 수는 있는데, 고등학생이지?”
다른 학원이라니,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전, 여기 다니고 싶은데요.”
“미안해서 어쩌지, 우리가 학생은 안 받아서…….”
견지 형은 과장된 미안함과 웃음으로 나를 밀어냈다. 내가 상상해온 견지 형과는 달랐다. 속마음을 꽁꽁 숨겨놓은, 웃고 있는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이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 같은 그때, 작업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들어왔다. 남자애 둘, 여자애 하나.
“견지 형, 오늘 윤샘 언제 와요? 나 정물 다 못 했는데…….”
높은 목소리로 말하던 남자애가 나를 보고 멈칫 입을 다물었다. 견지 형은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학생, 있잖아요…….”
내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억울했다. 학생은 안 받는다고 해놓고 저애들은 뭐예요. 세 명 다 모두 고등학생 같았다. 견지 형이 뭐라 말하기 전에, 앞에 선 남자애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와, 우리 작업실 들어오려고? 고등학생이지? 몇 학년?”
“이학년이에요.”
엉겁결에 대답했다. 남자애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환영해, 잘 왔어! 내 이름은 이환이고, 고3이야. 저기 두 명도 이학년인데. 동갑이니까 친하게 지내.”
“이환.”
견지 형이 낮은 목소리로 남자애를 불렀다. 이환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눈에 띄게 천천히 견지 형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요.”
“학생은 안 받는다고 얘기했어.”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애를 그냥 보낼 순 없잖아요.”
이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눈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여기가 네 거야? 이럴 거면 너도 나가.”
견지 형의 얼굴은 차갑고 어두웠다. 아까 내게 보여준 꾸며낸 미소 없는, 그대로의 얼굴은 저런 것이었나. 이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버석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서, 나는 두 손을 꼭 쥔 채 서 있기만 했다. 이환과 함께 들어온 아이들도 당황한 눈치였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견지, 무슨 일이야?”
안쪽의 총무실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여자가 나타났다. 살얼음 낀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견지 형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말이 나를 찔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게 아무 일도 아니었나. 이환이 끼어들었다.
“계림 누나, 저기 작업실 다니고 싶어서 온 애래요.”
이환은 나를 가리켰다. 저절로 몸이 쫙 펴졌다.
“아…… 그래?”
계림 언니가 내 쪽을 보았다. 견지 형은 탁자를 짚고 있던 손을 떼면서 훌쩍 몸을 일으켰다.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알아서 하세요.”
견지 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야단맞은 아이처럼 어깨를 펼 수가 없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계림 언니가 나를 불렀다.
“총무실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이환이 격려라도 해주듯이 내게 미소를 보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숙였다.

총무실 안은 햇빛이 덜 들어 어둑했다. 계림 언니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건너편에 마주보고 앉았다. 강사 중 하나인 계림이라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말하고는 내게 물었다.
“고등학생? 몇 학년?”
“이제 이학년 돼요.”
“화실 다녀본 적 있니?”
“아니요.”
“미대 갈 생각인 거니? 여기는 입시학원이 아니라서. 입시미술 하고 싶은 거라면 괜찮은 데 소개해줄 수 있는데…….”
계림 언니는 자료를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전 여기 다니고 싶어요…….”
마음이 눈물과 함께 흘러나왔다. 눈이 얼얼해지는 순간이 지나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계림 언니는 기다려주었다. 놀라웠다.
“고등학생이 그림 그린다 하면 당연히 미대 준비할 거라 생각한다는 건, 좀 슬픈 일이긴 하지.”
계림 언니는 차분하게 말했다. 작은 손가락 사이로 가는 펜이 가볍게 춤추듯 움직였다.
“학생부가 있긴 있어. 아까 본 사람, 총무님이 학생부 담당이고. 그런데 총무님이 지금 학생부에 아이들을 더 안 받으려고 하거든. 네가 정 여기 다니고 싶으면 일반부로 와야 해. 내가 일반부 담당이니까, 나는 널 받을 수 있지.”
계림 언니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숙이고 내 눈을 보았다. 조금 가슴이 뛰었다.
“일반부도 괜찮아요.”
계림 언니는 잠깐 머뭇거렸다. 놓치지 않고 말했다.
“여기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내 말에, 계림 언니가 웃었다. 좀 애 같았나,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문지르는데 계림 언니가 물었다.
“그럼 한번 그려볼래?”
“지금요?”
“응. 어떻게 그리나 한번 보고 싶은데. 부담 갖진 말고, 삼십 분 동안 아무거나 세 개.”
“아무거나요?”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아까부터 되묻기만 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응, 아무거나 여기 방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재료 가져온 거 있니?”
“연필하고 지우개만 있는데요…….”
“그럼 잠깐만.”
계림 언니는 총무실 밖에서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왔다. 상자에는 몽당 크레파스와 낡은 색연필, 붓 여러 자루, 갖가지 상표의 수채물감과 아크릴물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잉크병 여럿, 잉크 얼룩이 묻은 나무 펜대와 닳은 펜촉, 지우개조각, 정체를 알 수 없는 안료 덩어리들.

계림 언니는 큰 종이를 몇 장 내 앞에 놓았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뭘 그려야 하나, 어떻게 그려야 하나. 어떻게 시작하지? 계림 언니가 말했다.
“편하게 생각해. 보이는 걸 그리면 돼. 가까이 가서 그려도 되고. 다 그릴 필요도 없고 부분만도 괜찮아. 색깔 안 써도 되고.”
벌벌 떨다가 연필로 내 왼쪽 운동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비뚤어졌지만 그냥 막 그렸다.
나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그려왔다. 수업시간에도 그림을 끼적였다. 교과서와 문제집 귀퉁이, 연습장과 공책에 빼곡한 그림들. 생각나는 것들, 떠오르는 것들, 펜이 가는 대로 그려지는 것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보이는 것을 그려야 했다. 쉽지 않았다.
신발 다음으로는 소파에 놓인 쿠션의 패턴을 윤곽 없이 크레파스로 칠했다. 그러고 났더니 시간이 칠 분밖에 안 남아서 화병이 놓인 탁자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잉크로 꽃 한 송이를 후다닥 그렸다. 하도 대충 그렸더니 시간이 또 남아서 작은 꽃송이며 잎을 덧붙였다.
그릴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릴 것이 있고 그리는 내가 있고, 종이 위에 드러나는 형태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이같은 것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려도 되는, 그려야 하는 곳에 있는 꿈. 누구도 내가 하는 일이 쓸데없다고, 시간낭비라고 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는 꿈을.

몰두하고 있어서, 견지 형이 어느 틈에 총무실에 들어와 내 뒤에 서서 내가 그리는 것을 보고 있는 줄 눈치채지 못했다.
세 장의 그림을 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길게 쉬고 나서야, 견지 형이 내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화들짝 놀라는데, 견지 형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그림을 자기 쪽으로 가볍게 끌어갔다. 별거 아닌데 너무 열심히 보아서 무안했다.
나는 무심코 내 손을 보았다. 언제 이렇게 더러워졌지, 잉크에 크레파스까지 덕지덕지 묻은 손을 만지작거리는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견지 형이 물어왔다. 그 순간에는 아무 꾸밈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
견지 형은 혼잣말처럼 말하고 다시 내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나이는 잘 짐작할 수 없지만 옆모습은 대학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어려 보였다. 말할 때 입가에 길게 파이는 주름과 낮은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어리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사람이다. 글로만, 그림으로만 본 사람.
침묵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데 계림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는 내 그림을 보더니 즐겁게 웃었다.
“와, 좋네! 좋다, 그치?”
“아우, 참.”
견지 형은 한숨을 쉬었다.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견지 형은 왼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온통 흩뜨리더니 휙 몸을 돌려서 다시 방을 나가버렸다.

“초우 그림 재밌구나.”
계림 언니가 말했다. 평가는 그게 다였다. 된 건가? 뭔가 증명하긴 한 건가? 헷갈려 하는데, 계림 언니는 책상에서 큰 검정색 수첩을 가져와서 펼쳤다.
“우리는 작업실이야. 이름이 그렇기도 하지만, 진짜 작업실이야. 보통 화실과 방식이 많이 다르진 않겠지만, 기본 생각은 달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네가 네 작업하는 걸 도와주는 곳이지. 그러니까 네가 자기 작업할 의지나 동기가 있어야 해. 어때, 그려보고 싶은 게 있니?”
“……잘 모르겠어요.”
부끄러웠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다. 계림 언니는 왜 모르냐고 탓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개학하면 야자도 해야 할 거고. 학원은 안 다니니? 음, 그럼 봄방학 동안에 일단 나와보고, 개학하면 주말에만 하든지…… 그래야겠다. 입시할 것이 아니면 여기에 쓸 시간이 그렇게 많진 않을 건데.”
고장 난 인형처럼 괜찮다는 말만 하고 또 했다.
“그런데 아직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입이 말랐다.
“김…… 김초우예요.”
알까? 알아차릴까? 계림 언니는 수첩에 내 이름과 학교와 연락처를 적었다. 별다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안심한 건지, 실망한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다 허락은 받고 왔지? 부모님과 한번 통화를 해야 하거든.”
당황스러웠다. 집에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림 언니는 신청서를 한 장 주었다. 이름과 학교를 적고, 부모님 연락처도 적게 되어 있었다.


신청서를 받아들고 총무실 밖으로 나오자, 이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꼭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걱정스럽게 물었다.
“일반부로 다니기로 했어요.”
“그래, 뭐. 아예 안 오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래놓고 학생부에서 같이 하면 되지 뭐. 어쨌든 잘 왔어!”
웃으며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그제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염색한 갈색 머리카락은 학생치고는 조금 길었다. 눈부터 코, 입 하나하나가 손이 많이 간 것 같은 섬세한 얼굴이었다.
“근데 이름이 뭐야?”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김초우예요.”
“와, 이름 예쁘다.”
그것뿐이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이환은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럼 내가 애들을 소개해줄게.”
아까는 없던 아이들까지 몇 명 더 와 있었다.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통통한 여자애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이환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강아, 새로 온 언니다.”
“응. 언니 안녕.”
씩 웃으며 반말하는 것이 귀여웠다. 중3이고, 이름은 강은지인데 모두 강강이라고 부른다고, 이꿈이 말했다.
“저쪽은 예고 이학년, 유경하랑 김아운.”
아까 보았던 애들이었다. 유경하라는 남자애는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이었고 김아운이라는 애는 머리를 틀어올려서 목이 길고 가는 것이 더 두드러졌다. 예고 다니는 아이들도 따로 화실을 다니나 싶었다. 이환이 말을 이었다.
“주영이라고 고1짜리 하나 있고, 중3도 남자애 하나 더 있는데 아직 안 왔네. 고3은 나까지 셋이야. 아직 둘은 안 왔으니까 오면 소개해줄게. 이렇게 여덟 명. 너까지 아홉 명.”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숫자였다.

이환은 나를 이끌고 방 안을 오가며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여기는 학생들이 작업하는 작은방. 저쪽은 일반부 전용 큰방. 사실 방 크기는 비슷한데 그냥 그렇게 불러. 재료창고는 큰방에 붙어 있어. 종이도 거기서 가져다 쓰면 돼. 사물함은 빈 것 아무거나 쓰고, 자물쇠는 직접 준비하고.”
등받이 없는 높은 나무의자들, 팔레트나 물감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바퀴 달린 이동선반, 큰 그림을 접지 않고도 펼쳐 보관할 수 있는 서랍식 보관함, 알록달록 원색의 천소파 몇 개, 잡지가 가득 담긴 나무상자들, 벽에 붙은 그림들. 두근, 가슴이 울렸다.
“그리고 저건 우리 달력.”
벽 위쪽에 죽 붙어 있는 똑같은 크기의 판이었다. 자세히 보니 칸칸이 날짜가 적힌 것과 월 이름이 적힌 것이 보였다. 색깔이나 그려진 모양은 하나하나 다 달랐다.
“돌아가면서 달을 하나씩 맡아서 달력을 만드는 거야. 전통이야, 몇 년 됐지. 너도 나중에 하나 만들어봐. 지금 저건 강강이가 만든 거. 아, 묘은아, 새로 온 애가 있어! 너희 학교 이학년이래, 김초우라고.”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애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오늘은 이만 집에 가보겠다고 나왔다가, 신청서를 두고 가서 다시 작업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 찬바람을 쐬고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작업실. 드디어 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금 본 것들과 만난 아이들이 모두 꿈같았다. 진짜였으면 싶은 꿈처럼.

그림을 배우러 다닐 거라고 말하자 아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엄마한텐 비밀로 하고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림, 그리고 싶었니?”
아빠는 과거형으로 물었다. 들떴던 기분이 쑥 가라앉았다. 그림 그리고 싶었냐고요…….
건우 오빠가 학원 대신 화실을 다녔다는 것은 나와 아빠만 알았었다.
나는 나만 아는 줄 알았지만 울음 섞인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아빠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빠는 더 힘들어했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아빠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 전화 걸어서 선생님한테 말 좀 해주세요.”
아빠는 길게 한숨 쉬고 신청서를 들었다. 아빠는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풀잎아.”
아빠가 나를 불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풀잎아……. 얼마나 오랜만에 들은 이름인가. 건우 오빠가 죽고 나서는, 누구도 나를 풀잎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늘과 풀잎. 그게 우리의 이름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왜 내가 풀잎이인지 몰랐다. 내 이름에 풀을 뜻하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두 살 위의 사촌인 건우 오빠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인 거야, 내 이름엔 하늘이라는 뜻이 있거든.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 나는 풀잎이가 아니라 초우가 되었다.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일 때랑, 집에서 아빠가 장난치듯 부를 때만 풀잎이였다. 엄마는 내가 헷갈릴 거라고, 아빠가 풀잎이라 부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건우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어 대전의 자기 집을 떠나 우리 집에 살게 되었을 때, 오빠는 나를 보고 풀잎아! 하고 불렀다. 나는 좀 부끄럽고 낯설어했던 것 같다.
뭐야, 초우라고 불러.
풀잎이 너도 날 하늘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하늘이가 뭐야, 애도 아니고.
건우 오빠는 우리 엄마가 나를 풀잎이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풀잎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마가 없을 때만이었다. 꼬박꼬박 풀잎이였다. 그래도 나는, 건우 오빠를 한 번도 하늘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아이 같고 쑥스러워서 그랬다.
풀잎이 너, 작은 아빠한테 이른다?
장난스럽게 했던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누구도 나를 풀잎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빠조차도.

이제 와서 아빠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꼭 여기 다녀야 하니?”
꼭 거기여야 할까. 작업실이어야 할까. 나도 답은 몰랐다. 작업실이 아닌 다른 곳에 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아빠는 더 묻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거기 작업실이죠? 박계림 선생님 계신가요? 저는 김초우 학생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화실비는 내 돈으로 낼 거라고 했는데도, 아빠는 굳이 보태주겠다고 했다. 실은 고마웠다. 화실비는 생각보다 비쌌다. 재료값까지 포함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자리에 누워서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큰 붓으로 몇 번 붓질하여 남긴 그림처럼 어렴풋한 느낌으로 작업실이 떠올랐다.
그곳의 색깔, 명암, 형태, 흘러가버릴 것 같은 이미지들. 그곳의 누군가는 나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짐작할 수도 있다고.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게 섭섭한지, 도리어 안심이 되는 건지, 내 마음을 나도 알 수 없었다.
건우 오빠…… 하늘이 오빠. 이제는 내가 그곳에 가려고 해. 그래도 될까? 괜찮은 걸까? 오빠는 웃을까? 화를 낼까? 아니…… 아주 아쉬워할까. 우리는 같이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눈을 감았다. 빨리 잠들고 싶었다. 작업실의 꿈을 마저 꾸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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