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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게임 <팩맨> 기억하세요?

게임, 이미지와 텍스트의 술래잡기 놀이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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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역사는 50년 남짓 되었지만 분석을 위해서는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보다 더 까다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게임 역사의 패턴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사유는 이른바 구조언어학을 탄생시켰고, 훗날 구조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이런 생각을 이어받은 롤랑 바르트 역시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분석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그 대안으로서 구조서사학을 제시했다. 마찬가지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컴퓨터 게임이 존재한다. 당연히 모든 게임을 플레이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전세계의 모든 언어를 분석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게임의 역사는 50년 남짓 되었지만 분석을 위해서는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보다 더 까다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게임의 플레이 시간이다. 두세 시간 정도면 감상이 끝나는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기본적으로 수십 시간의 플레이 타임을 요구한다. 어떤 게임은 수차례의 반복 플레이를 요구하기도 하며, 심지어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도 있다. 10년 동안 매일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해도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리니지>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는 아마도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매체를 소비하는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제일 흔한 것은 아마도 ‘중독’의 문제일 것이다)을 유발하지만, 특정 시간대를 다시 돌아볼 때(Review)도 문제가 된다. 대부분의 플레이 경험은 유저의 기억 속에서 휘발되어 다시 복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과 연결되는 두 번째 문제는 게임이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 경험은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게임이라는 개별 경험을 하나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게임을 그 당시와 동일한 느낌으로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게임은 그동안 다양한 플랫폼과 저장매체로 출시되었다. 당시의 프로그램을 추출한 ROM 파일이 있긴 하지만 그 느낌을 100% 완벽하게 재현하긴 어렵다. 영화도 과거의 흑백 무성영화를 보면서 온전한 감흥을 느끼긴 어렵겠지만 게임은 더욱 그 괴리감이 크다. 그래픽과 시스템의 차이는 물론, 아케이드 게임기의 경우 전용 입력도구가 없을 때 그 재미를 온전히 느끼기가 어렵다. 좋은 예가 유진 자비스의 <디펜더>와 <로보트론2084>일 것이다. 두 게임은 상승과 하강을 위해 특별한 레버를 사용하는 등 독특한 조작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PC 에뮬레이터로는 그 본래적 재미나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임은 개별적인 분석에 앞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그 변화의 패턴을 거시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게임은 아케이드 게임기, 가정용 콘솔 게임기, PC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진화했다. 각 매체는 서로 다른 입력방식과 표현방식을 제공했으며, 당연히 해당 매체로 발매된 게임 또한 다른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이는 기술에 의해서 그 형식이 좌우되는 게임의 기술의존적 성격을 보여준다. 물론 게임의 진화에는 기술 이외에도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개발자의 상상력, 유저들의 요구, 산업적인 맥락 등이 그런 변수들이다. 특히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된 컴퓨터 게임의 산업화?자본화는 게임의 눈부신 성장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창작의 가능성을 봉쇄하기도 했다. 약 50년의 시간 동안 게임은 수많은 변화를 겪었고,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초기 게임의 복잡한 진화양상을 요약할 수 있는 키워드는 아마도 ‘이미지’와 ‘텍스트’일 것이다. 서사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 게임의 역사는 이 두 가지의 융합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케이드 게임이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면, PC 게임의 출발점은 텍스트였다. 시작지점은 서로 달랐지만 어쨌든 기술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 둘은 어느새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현실과 가상의 사이에서

2진법은 단순명료하다. 그래서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빠르고 정확하다(물론 신호를 처리하는 칩의 입장에서 그렇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세계다. 작지만 이 명료한 차이의 반복이 새로운 놀이방식을 열었다. 기호의 이면에 숨겨진 가능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이 세상에 없던 낯선 존재였다. 자신의 존재를 보다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게임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최초의 선택은 ‘테니스’였다. 1958년 미국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의 물리학자 윌리 히긴보섬 박사는 자신의 연구소를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Tennis for Two>라는 간단한 테니스 게임을 만들었다. 이 게임은 오실로스코프와 아날로그 컴퓨터 그리고 몇 개의 버튼을 조합한 형태였다. 전자신호를 작은 화면에 표시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현실의 테니스를 재현(representation) 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2차원으로 구성된 테니스 코트의 옆면이 보인다. 수평선은 코트의 바닥이고, 수직선은 네트다. 플레이를 시작하려면 공을 가진 사람이 코트 끝에서 각도를 조절한 다음 버튼을 눌러 공을 때리면 된다. 라켓은 표현되지 않지만, 바람의 저항과 함께 공이 바운드될 때마다 공의 힘이 줄어드는 현상을 재현하고 있다. 그렇게 현실의 놀이는 전자장치를 통해 가상의 놀이가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의 놀이보다 더욱 강력하게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게임의 두 번째 선택은 현실의 놀이가 아닌 가상의 ‘전쟁’이었다. 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아이들의 놀이를 생각해볼 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재현한 것은 현실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스페이스 판타지였다. 즉 게임이 허구를 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현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장치, ‘모니터’였다. 1962년 MIT의 학생이었던 스티브 러셀은 PDP-1이라는 컴퓨터로 <Space War>라는 우주전쟁 게임을 만들었다. PDP-1은 천공 카드나 종이테이프를 통해 입출력을 하는 다른 컴퓨터와는 달리 모니터를 갖추고 있었다. 러셀은 검은 모니터 화면을 우주공간으로, 작은 도트 덩어리를 우주선으로 선언했다. <Space War>는 두 대의 우주선이 상대방을 먼저 격추해야 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스위치를 조작해 로켓의 방향을 정하면 이 로켓은 무중력공간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물리법칙이 적용된 공간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했다. 단지 ‘스페이스 워’라는 이름만으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주전쟁이 되었다. 아무도 그 공간을 모니터라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그 도트가 우주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허구의 재현은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 시대의 유저들에게는 완벽에 가까웠다. 이 매력적인 전쟁에 많은 사람들이 참전했다. 미사일 탄도 계산을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에서 전혀 새로운 가상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게임의 세 번째 선택은 다시금 스포츠(?)였다. 제목은 <PONG>(1972) 핑퐁인가 싶었지만 탁구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테니스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구기 종목이었다. 다이얼을 사용해 두 사람이 서로 공을 받아내는 놀이. 이 단순한 놀이 덕분에 게임은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Space War>가 탄생하고 나서 불과 10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아타리의 놀런 부쉬넬은 <PONG>으로 아케이드 산업을 개척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PONG>의 대중적 성공은 많을 것을 돌아보게 만든다. <PONG>은 무엇보다 작은 다이얼을 통해 모니터 너머의 대상을 즉각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었다. 이미지는 초라했다. 네모난 경기장과 막대기, 작은 공이 전부였다.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를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PONG>은 현실과 허구와의 관계를 재규정했다. 현실을 반영했던 <Tennis for Two>와 허구를 반영했던 <Space War>, 그 사이의 어딘가에 <PONG>이 놓여졌다. 그래서 <PONG>에는 현실의 문법과 허구의 문법이 동시에 들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PONG>에 열광했다. 게임이라는 새로운 문법이 드디어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물론 이후로도 게임은 현실과 허구의 사이에서 방황해야만 했다. 게임이 태초에 ‘있음’과 ‘없음’의 세계에서 출발했듯이 게임의 이미지는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정교해진 전쟁의 규칙 - <스페이스 인베이더>


<PONG> 이후로 모든 아케이드 게임은 조작 가능한 이미지를 어떻게 ‘재미’로 바꿀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이 70년대 아케이드 센터를 가득 채웠다. 단순했던 그래픽 이미지는 점차 정교하게 바뀌어갔다. 어떤 게임은 현실을 표현했고, 어떤 게임은 허구를 표현했다. 분명한 것은 양자 모두 새로운 법칙과 규칙으로 자신의 세계를 정의했다는 점이다. 박근서의 『게임하기』에 따르면, 법칙은 게이머가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법칙으로서의 세계관은 우선 물리적으로 가능한 행위의 범위를 결정한다. 즉 게임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반면 규칙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켜야 한다는 것은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게이머에게는 지키거나 어길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진다. 일본의 타이토에서 개발한 <스페이스 인베이더>(1978) 역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전쟁게임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게임의 법칙과 규칙은 남달랐다. 어둑한 모노크롬의 별이 빛나는 우주. 제식훈련이 잘된 외계인들이 행과 열을 맞춘 채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하나의 덩어리인 양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좌우로 이동하면서 한 칸씩 화면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화면 아래에는 지구의 마지막 방어선이 있다.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도구는 작은 대포 하나와 4개의 바리케이드가 전부. 대포는 단지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다. 우주는 넓고 광대하지만 대포는 결코 화면 프레임 밖을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이 대포는 단발이라서 한 번에 하나의 미사일만 발사할 수 있다. 그밖에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세계를 규정하는 수많은 법칙이 있다.

플레이어에게는 화면의 모든 침략자들을 없애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물론 게이머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언제 탄을 발사할지, 어디서 탄을 발사할지, 어떻게 탄을 피해야 할지 말이다. 물론 탄을 발사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을 선택권도 있다. 단지 게임오버라는 결과가 게이머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다. 이 세계를 온전히 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동전 하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이머는 지구의 평화와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동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규칙은 어느새 법칙이 된다. 단지 오래 살아남기 위해 모든 동선과 타이밍을 결정한다. 현실의 삶이 그렇듯이 선택은 사라진다. 그리고 당신의 패배로 이 전쟁이 종결된다는 법칙이 쓸쓸하게 게이머를 기다리고 있다.

이전에도 전쟁을 묘사한 게임은 많았다. 하지만 전쟁을 이 정도로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 게임은 <스페이스 인베이더> 이전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100엔 동전 부족 현상이 발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앞서 소개한 <Tennis for Two> <Space War> <PONG>은 사람과 사람 간의 대결이었다. 비록 능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것은 ‘1대 1’의 공정한 게임이었다. 게임 중에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컴퓨터를 상대로 한 ‘1대 다수’의 고독한 놀이였다. 공평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도전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전쟁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게임은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통해 전형적인 전쟁의 이미지와 규칙을 얻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게임들이 앞다퉈 전쟁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캐릭터와 무대의 등장 - <팩맨>과 <프로거>

무의미한 전쟁을 멈춘 건 한 판의 피자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자에서 한 조각을 떼어낸 괴상한 생물이었다. 사실 생물이라고 규정할 만한 단서는 거의 없었다. 다만 커다란 입 하나로 팩맨은 생명을 얻었다. 어쨌든 녀석은 무언가를 먹었기 때문이다(먹는다는 것은 유기체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조작하기도 전에 멋대로 앞을 향해 튀어나가버렸기 때문이다(스스로 자발적인 운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유기체의 증거가 아닐까?). 팩맨은 미로 속에서 입을 뻐끔거리며 닥치는 대로 점들을 먹어치웠다. 팩맨이 자신의 동물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을 때, 미로 한가운데로부터 4마리의 고스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욕구에 제동을 걸기 위해…….


<팩맨>이 출시되면서 게임의 이미지는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이미지 자체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에 담긴 의미였다. 팩맨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캐릭터로 각인되었다. 이미지는 캐릭터가 되면서 새로운 생명과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제 팩맨은 더 이상 미로 속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대중에게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 팩맨을 쫓아다녔던 4마리의 고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팩맨>은 전투기나 미사일 없이도 게임이 충분히 재미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비폭력성은 당시 여성들을 아케이드 센터로 불러모았다.

팩맨은 구체적인 형체가 없는 추상의 아메바 같은 존재였다. 이 단세포 생물은 진화를 거듭해 양서류인 개구리가 되었다. 세가의 <프로거>(1981)는 한 마리의 개구리가 반복해서 길을 건너는 게임이다. 혼잡한 고속도로를 가로지른 뒤 통나무와 조금 불안해 보이는 거북이 사이를 점프해가며 강을 건너고, 마침내 비어 있는 슬롯으로 개구리를 인도하는 것이 <프로거>의 목적이다. 공격수단 없이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팩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프로거>의 공간은 더 이상 추상적인 미로가 아니었다. 팩맨이 개구리로 진화했듯이 추상적인 공간 역시 구체적인 장소로 진화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고속도로, 강 위를 떠다니는 뗏목과 거북은 어느 정도 현실의 공간을 반영한 것이었다. 팩맨은 고스트에게 잡혔을 때 단지 화면에서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프로거>에서 플레이어는 싫든 좋든 자동차에게 깔리는 개구리를 상상하게 된다(요즘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리얼한 죽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게임은 구체적인 캐릭터와 현실적인 무대를 갖췄다. 이제 게임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관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 <동키콩>과 <슈퍼마리오>


게임캐릭터 진화론의 정점에는 결국 인간이 있었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이탈리아 배관공 아저씨가 말이다. 닌텐도의 <동키콩>(1981)은 마리오가 최초로 등장한 게임이다. 그때는 마리오에게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다.<동키콩>에서 그는 단지 ‘점프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릴라에게 잡혀간 여자친구를 구하는 것이 점프맨의 임무였다. 게임의 디자이너인 미야모토 시게루는 본래 미술 전공자였다. 그는 고릴라와 점프맨의 모습에 만화적인 요소를 더하여 더욱 친근감 있는 캐릭터를 창조했다. 캐릭터의 움직임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독특한 사운드 효과와 함께 철골구조를 뛰어다니는 점프맨의 동작에는 현실의 물리법칙과 만화적인 과장이 공존했다.

또한 <동키콩>은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이 존재했다. 바로 오프닝 화면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거대한 고릴라가 점프맨의 여자친구를 안고 철골구조의 공사현장 꼭대기로 올라간다. 고릴라가 몇 번 난동을 부리자 게임의 무대가 되는 공사현장의 철골구조가 지그재그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이 연출을 통해 플레이어는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간단히 말해 <동키콩>은 영웅의 이야기였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영웅담, 바로 그것이다. 영웅의 곁에는 늘 공주가 있다. 그리고 공주를 잡아간 악당이 존재한다. 캐릭터가 많아질수록 캐릭터 사이의 관계도 다양해진?. 그 관계는 갈등이 되고, 갈등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동키콩> 이후 ‘공주 구하기’ 테마는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이런 테마를 가장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것은 그 출발점을 알린 미야모토 시게루 자신이었다. <슈퍼마리오>는 당시 공주를 구출하는 게임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물론 공주를 구하는 것은 게임을 즐기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배경과 신나는 리듬 속에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행위 자체가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다. 역경을 극복하는 영웅의 비장한 모습은 적어도 마리오에게는 없었다. 목적지에 공주가 아닌 그 누가 기다리고 있든지 그곳까지 도착하는 일은 어쨌거나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플레이어에게 시련이자 역경이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공주는 ‘보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PONG>이라는 막대기는 지구를 지키는 대포에서 팩맨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로, 그리고 개구리를 거쳐 마리오가 되었다. 게임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적으로 변모했고, 단순한 법칙과 규칙의 세계에 이야기를 더하면서 게임을 진화시켜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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