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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 명품녀’와 신정동 살인사건 ①

속물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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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스 힐튼과도 비교하지 말라는 4억 명품녀 이야기를 나는 은은한 조명과 열대화초가 어우러진 커피숍에서 처음 들었었다.

패리스 힐튼과도 비교하지 말라는 4억 명품녀 이야기를 나는 은은한 조명과 열대화초가 어우러진 커피숍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를 하는 화려한 아가씨 둘의 행동과 마음의 움직임에 더 관심이 갔다. 그들은 인기 절정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얼짱 각도로 각자 셀카를 찍는 중이었다. 카메라를 겨냥한 표정은 앙증맞고 귀엽고 청순하고 섹시하고 도도하고 애태우고 토라진 듯하고… 그녀들은 찍는 틈틈이 서로의 화장을 고쳐주면서 4억 명품녀의 뻔뻔함에 유별날 정도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한숨을 쉴 때 그녀들의 뿌리까지 들어올린 마스카라를 바른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던가? 그때 조명의 빛은 담배 연기 때문에 마치 나방의 타버린 날개 재 같은 희뿌옇고 부서질 듯한 느낌을 주었던가? 그 불빛 아래서도 그녀들의 속마음은 여지없이 폭로되었는데 약간의 혐오감, 더 많은 부러움. 더 많은 질투. 더 많은 한탄.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동경. 그런데 그녀들보다 더 오래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전등에 갓을 씌울 때 블랑쉬의 마음을 스쳐갔을 그 회한과 희망이 이번엔 그녀들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간 것일까? 느닷없이 그녀들은 피곤해 보였다. 현실의 그녀들은 몽환적인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들은 가망 없는 ‘지겨움’의 아우라에 잠식되어 버렸다. 그녀들은 스마트폰도 거울도 화장 파우치도 집어 던져 버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겨움이었다. 이제 그녀들을 힘나게 하려면 다시 뭐가 필요할까? 하와이행 비행기 티켓, 스파에서의 마사지? 혹시 새로운 물건? 혹시 자신감? 혹시 연인? 혹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니크한 일자리? 그녀들은 반짝이는 긴 다리를 포갠 채 소파에 깊숙이 묻혀버렸다.

그녀들의 옆에 앉아서 나는 『벨아미』의 시작 부분을 떠올렸다.

가난하지만 멋진 용모를 가진 벨아미가 파리에서 성공하기 위해 택한 전략은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어떤 저택에 초대 받는다.그는 전신 거울 앞에 선다.

 

그는 배우가 자신의 배역을 익힐 때처럼 여러 가지 몸짓을 해보았다. 자신에게 웃어 보이기도 하고 손을 뻗쳐 보기도 하고 갖가지 몸짓을 하며 놀라움, 기쁨, 동의하는 감정을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부인들을 찬미하고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적당한 미소와 시선을 연습해 보았다. (…) 3층에 올라오자 또 다른 전신 거울이 있었다. 그는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을 늦추었다. 자신의 자태가 정말 우아하게 보였다. 걸음걸이도 좋았다. 그러자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그의 영혼을 채웠다. 이만한 외모와 출세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결의와 독립심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 그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이렇게 초인종을 누른 그 어느 날부터 벨아미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흔히 잔재주를 부려봤자 계산속이 빤한 교활한 사람 혹은 출세를 위해 가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을 속물이라 부른다. 누군가를 속물이라 말할 때 그 말속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경멸과 혐오감, 조롱을 품고 있다. 그런데 속물은 이미 슬픈 운명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속물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기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 자신과 혼동한다는 점이고 그 실수는 부메랑으로 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진짜로 자기 자신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이나 진정성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속물들은 자부심(어딘가에 속해있다고 생각될 때 갖는 감정. 어떤 직업이나 지위가 주는 것들)과 자존심을 구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맘껏 거만하다가 한껏 비열해질 수도 있다. 속물은 타인의 욕망을 빌려오고 모방하기 때문에 속물들의 정열은 진정한 열정이 아니?. 그 때의 정열은 변덕과 별 차이가 없어서 언제든 그 욕망하는 대상을 바꿀 수 있다.속물의 분노란 공분이 아니라 질투나 경쟁심과 별 차이가 없어서 타인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언제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을 동반한 울화 속에 빠져들 수 있다.속물들의 연민은 자기 연민뿐이다. 속물들의 행복은 타인의 시선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울해질 수 있고 자존심과 자기 경멸은 오락가락 샴쌍둥이같이 붙어 있다. 거만함과 비열함 역시 똑같이 붙어 있다. 속물들의 방패는 자기 기만 뿐이다. 자신은 주인이지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만족과 기쁨, 그의 좌절과 번민과 고통은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환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에겐 진정성이 아니라 오로지 허영심이 중요해 보인다. 속물들의 눈빛이 아름다운 순간에도 그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은 번뜩이는 재치, 순간적인 생각뿐이지 존재의 깊은 고뇌와 정열은 아니다.

그런데 벨아미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속물이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벨아미는 인간관계를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여부로만 판단하였기 때문에 타인의 인간적 감정과 어리석어도 진심어린 고백은 그에게 귀찮거나 시간낭비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무관심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에게 당당함은 뻔뻔함과, 사랑은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행동, 그것은 행동이라기보다는 술수였고, 생각,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다는 책략과 공상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보지 않는 척하면서 보는 것이고, 그의 공들인 몸치장은 보여주지 않는 척하면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온 몸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날 봐. 감탄해. 부러워해. 그리고 멋진 제안을 해” 그가 사랑을 고백하는 날 그의 발밑엔 무엇이 있었던가? 물고기들이 탐욕스럽게 주둥이를 내밀고 빵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의 눈부신 결혼식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행복감에 젖은 그가 떠올린 것은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정부의 곱슬거리는 앞머리였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아무런 번민 없이, 결혼식장의 벨아미가 곧 있을 끈끈한 정사를 암시하며 정부의 손바닥을 지그시 내려잡을 때 우리는 벨아미를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인체 정도로만 보게 된다. 그날의 찬란한 햇살마저도 자신들의 빛이 한 성스러운 결혼식이 아니라 동물의 카니발에 뿌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벨아미가 단 한번도 뱉지 않은 말. “나는 속물이야!”를 외친 속물도 있다. 『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이다. 그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외치며 괴로워한다.

 

사실 나는 가진 게 별로 없잖아! 나는 전적으로 평범하고 속물스럽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권태롭고 나 자신에게는 아주 참을 수 없는 존재야.

권태. 권태는 속물들의 동반자다 .스탕달은 권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 야심적으로 살피는 삶의 방식이 가져다주는 것으로서의 권태. 그런 것이 가져다주는 성공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실제적인 기쁨이 없는 법이다.”

통찰력이 뛰어난 특출나게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한 쥘리앙 소렐도 속물의 덫에 걸려버리는데 그는 파리 최고의 명문가 후작 댁에 개인비서로 머물며 후작 영양 마틸다의 사랑을 획득한다. 그렇지만 그가 사랑을 얻었을 때 사랑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 아니고 상상력의 기쁨이었다. 만족도 사랑의 만족이 아니고 허영심의 만족이었다. (마틸다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의 모델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내가 가난한 농사꾼인 내가 귀부인의 사랑의 고백을 얻어냈구나 .내가 크루아즈누아 후작을 이긴거야. 그는 그렇게 멋있는 남자인데… 근사한 제복을 입었고 언제나 재치있는 그를… 나는 그들보다 총명해… 글자 그대로 저절로 굴러들어온 쾌락을 거부하다니. 내 갈증을 식혀줄 맑은 샘물을 거부하다니. 맹세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기주의의 사막에서는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는 그간 받았던 멸시에 가득 찬 시선들을 떠올렸다. 크르아즈누아 후작을 이겼다는 기쁨이 덕성에 대한 생각을 일축해버렸다. 그슴 사회 전체와 싸우고 있는 불행한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 도취하여 이탈리아 오페라를 보러갔다. 그는 신이 된 것 같았다.

속물이 된 순간 우리가 잃는 것? 덕성이고 우리가 얻는 것은 빠져나오기 힘든 굴레뿐인 듯한데 쥘리앙 소렐은 왜 자신을 신이 된 것 같다고 느꼈을까? 누가 쥘리앙 소렐을 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그런데 그가 신이 된 것을 다른 신이 미처 몰라본다면 어떻게 하지? 혹은 쥘리앙 소렐 자신이 더 강력한 신을 보게 된다면?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2장 제목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이다」이다. 르네 지라르는 천상을 떠나 지상으로 몰려드는 성스러움에 대해 말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중세가 지나고 신과 왕들의 시대도 지나고 자유와 평등의 시대가 왔을 때 성스러움은 점차 하늘을 떠나 지상으로 몰려든다. 우리는 우리가 모방하려는 사람을 신으로 만든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유를 정면으로 직시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의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선을 고정시켜줄 근거지를 찾게 된다. 우리들을 보편적인 세계에 연결시켜 줄 신도 왕도 영주도 이제는 없는 마당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개별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즉

 

사람들이 대상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거나 더 많이 소유하도록 부추기는 열정은 물질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지닌 신, 즉 중개자의 승리였다. 그런데 내가 모방하고 싶은 대상과 나 사이에는 내세보다 더한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타인들이 살고 있는 지상의 표면은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천국이 된다. 그래서 다음 순간엔 그를 미워하고 질투한다.

쥘리앙 소렐도 신이 되었다고 느낀 그 바로 다음 혹시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준 마틸다의 사랑을 잃을까봐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잃는데 두려워한 것은 가문, 재산등 자신에게는 없는 모든 자질을 지닌 매력적인 젊은이를 이기는 기쁨을 잃는 것이었다.

그런데 르네 지라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심연이었다. 건널 수 없는 심연. 8월 한여름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옥탑방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살인범은 먼저 거실로 들어가 아내를 죽이고 그 다음에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남편을 죽였다. 그 범행 전 일용직 노동자였던 그는 열두 시간 동안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고 놀이터에서 막걸리를 한 병 마셨다, 그리고 한 가정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는 열려있던 현관을 통해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털어놓은 범행 동기는 금품을 노려서도 아니고 개인적 원한, 치정에 얽힌 복수극도 아니고 단지 그들이 웃고 있어서. 행복해보여서였다. 자신은 그처럼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에게도 타인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었다. 죽어버린 사람이 속물이란 이야기도 아니고 죽인 사람이 속물이란 이야기도 아니지만 오히려 이번 살인 사건은 빈곤과 배제의 문제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가난도 속물도 다 같이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그리고 사회가 더더욱 속물사회일수록 더더욱 많이 배제한다.) 우리가 심연 앞에 서 있을 때 넘실대는 파도는 우리를 향해 이런 감정을 쏟아놓는다. 분노, 적대감, 집착, 자기경멸, 굴욕. 이 건널 수 없는 심연의 바닷가에 서있을 때 그 해안선은 우리가 이미 가진 것과 우리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서로 더 많이 소유하도록 부추기는 열정이 물질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지닌 신, 즉 중개자의 승리란 말도 이제는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 되었다. 이제 우리의 신은 성공한 인간일 뿐 아니라 물질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신처럼 여기는 것은 그의 가능성과 능력 때문일텐데 그의 능력은 원하는 대로 쇼핑하고 식사하고 여행하고 집을 사는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속물 사회(속물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선망하고 모방하는 사회. 속물을 롤 모델이자 성공담의 모범으로 삼는 사회. 오히려 속물이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사회)인 동시에 소비 사회? 살고 있기 때문에 속물의 길은 자유롭고 독창적이고 부유한 소비자의 길이기도 하다.

사회 초년병들은 네가 원하는 일을 찾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듣는다. 그러나 나는 이 충고가 씁쓸하다. 그 충고에는 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비 사회에서는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란 질문은 아주 터놓고 말하면 너는 무엇을 살 수 있느냐? 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충고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과연 적절한 것일까?

(계속)

☞‘4억 명품녀’와 신정동 살인사건 「날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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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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