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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뮤직의 원조' 박남정, 서태지와 맞붙었을 때 심정은…

박남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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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넘었지만 활동을 활발히 한 적은 없어요. 특별히 앨범을 내거나 기획을 딱 잡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간히 저를 찾아주고 아예 안 한 건 아닐 정도로 나올 수 있는 건 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임감이 듭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기서 안주할 게 아니라 조금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가요의 주류는 단연 댄스 음악이다. 차트부터 가요 프로그램 무대까지, 댄스가 빠져 있는 곳은 없을 정도다. 무대에서도 노래만을 부르는 가수보다 춤을 추며 (겨우)노래하는 댄스 가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현대 음악시장의 주 소비층인 10-20대들에게 이런 모습들은 익숙하겠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댄스는 미개척 분야였다. 가수 앞에 댄스가 붙는 ‘댄스 가수’란 어휘는 통용되지 않았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김완선과 함께 댄스뮤직의 대중화를 견인한 사람이 바로 박남정이다. 20년이란 시간이 지났고,<Again 2004>(2004)이후 후속 앨범이 등장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대중과 매체는 이 댄스의 선구자를 기억하고 있다. 박남정을 홍대 인근의 퓨전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한동안 텔레비전에 자주 보이더니 요즘 약간 뜸한 것 같다.

“20년이 넘었지만 활동을 활발히 한 적은 없어요. 특별히 앨범을 내거나 기획을 딱 잡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간히 저를 찾아주고 아예 안 한 건 아닐 정도로 나올 수 있는 건 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임감이 듭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기서 안주할 게 아니라 조금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22년이 됐지만 사람들은 아직 박남정을 뚜렷이 기억한다. 당연히 ‘왜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할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 같다. 뭐 때문이라고 보는가.

“글쎄요. 활동 당시 인터뷰 할 때 왜 인기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제가 좋아하는 부분, 저의 장점과 지금의 시대, 팬들이 좋아하는 공통점들이 맞아서 인기가 있는 거 아닐까. 그전까지 가수가 되기 전에는 꽤 노력했지만, 데뷔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저도 사실 어리둥절한 면이 없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했을 때 안타까운 건 너무 데뷔와 동시에 쉽게 올라간 것 아닐까. 이게 마이너스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가수가 되고 나서 좌절도 있고 고생도 하면서 떴으면 소중함을 더 알 수 있었을 텐데. 가요 톱 텐의 골든컵을 받아도 그저 주니깐 받는구나, 남들은 1위하면 우는데 저는 울지도 않았고…… 좋은 게 좋은지 모르고, 소중한 게 소중한지 모르고…… 자만한 거죠.”


“나를 기억하는 것은 댄스의 원조를 찾는 분위기 때문!”

1980년대 후반 사랑을 받았던 가수가 한둘이 아니잖은가. 상당수는 잊혀졌어도, 박남정씨는 아직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물론 TV 활동이 기억을 환기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왜 그런가.

“지금 댄스 가요가 정착을 했잖아요. 원조를 찾는 거 같아요. 우리 때는 대중적으로 댄스가 인기를 받을 상황은 아니었죠. 경시 분위기도 있었고요. 그 땐 저와 김완선이 독보적이었죠. 그랬던 것이 댄스가 주류가 이루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래도 옛날 사람들이 기억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제 얘기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TV 프로 <불후의 명곡>에서 섭외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

“국내에 획을 그었다는, 힘줄이 되었다는 사람들을 모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저를 불러준 것에 반갑고 즐거웠어요.”

후배가수들한테 대선배다. 보아, 이효리, 비 등을 봤을 때 정말 춤 잘 추는 후배는 누구인 거 같나?

“죄송한데 TV를 잘 안 봐요. 사실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요. (나이 탓인가 물었더니 웃으며) 아, 그래요. 대중음악이란 건 누가 들으라고 해서 듣는 게 아니잖아요. 20대 때에는 절로 듣게 되었는데, 지금은 영화나 보면 볼까. TV 볼 시간은 거의 없어요.”

그럼 요즘 젊은 스타들은 잘 모르는 건가.

“나왔다는 얘긴 알고 누구인진 알지만, 저 친구가 어떤지 작품적인 관점에서는 보지 않게 되더라고요. 제 기억에 정말 노력하고 한다는 게 보이는 사람은(한참 생각하더니) 보아씨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데뷔했을 때 느꼈어요. 처음 출연해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아 정말 미친 듯이 노력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은 박남정의 해였다. KBS 10대 가수상, MBC 가요대상,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 등 국내에 굵직한 시상식의 주인공을 독점했다. 단순히 댄스 1세대로서의 부분적 존재감만이 아닌 한국 전체 가요계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스타로서 부딪쳤던 상황이나 기분이 궁금했다.


“춤과 노래가 언밸런스인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데뷔 히트곡인 「아! 바람이여」와 다음 2집 앨범의 인기가 대단했다.

“「아! 바람이여」는 88올림픽과 함께 쇼프로 중단이 많이 됐었기 때문에 열기를 상승시키지는 못했습니다. 2집 나오면서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이 동시에 떴지요. 1989년도에 많이 활동한 편입니다.”

조금 어색했던 것은 춤은 가장 모던한, 마이클 잭슨 춤을 추는 사람인데 노래는 트로트적 선율이 드러나는 ‘뽕’이었다는 점이다. 트로트고고 물결을 일으킨 안치행선생님의 작품이라서 이해는 가지만 언밸런스적인 측면이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앨범을 녹음하면서도 아 이거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직접 가서 설득도 해보기도 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컴퓨터 음악도 없었고, 쉽게 댄스 뮤직을 형성할 인맥도 없었어요. 신인으로 픽업을 한 사무실이 그 쪽(안치행선생의 안타프로덕션)이었으니까 어쩔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춤출 때, 어떤 경우 기분이 안 좋은 듯한 표정이 나타날 때가 있었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4년 계약 끝남과 동시에 기획사를 나갔어요. 처음으로 제가 한 게 5집이였어요. 제가 직접 제작했죠. 그렇게 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널 그리며」는 본인 작사 작곡이다. 지금도 궁금한 건, 편곡이나 전체적인 그림은 기획사에서 했겠지만 어쨌든 그때 풍토로는 놀라웠다. “쟤가 작사, 작곡까지 했네?”

“작곡을 배웠거나 그런 건 아닌데, 어렸을 때 합창단을 하면서 청음에는 자신에 있었어요. 피아노를 잘 치진 않지만 어떤 곡이든 피아노 한음으로 다 칠 수는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그걸 적는 습관들이 있었죠. 안치행사장님도 제 곡을 듣고는 그래 한번 해보자 하시더군요. 처음부터 타이틀은 아니고, 녹음이 끝난 후 대체적으로 모니터 결과가 「널 그리며」로 나왔습니다.”

데뷔 전 사무실(안타프로덕션)에서 어떤 형태든 가창력을 쌓기 위해 노력 했을 텐데, 노래 연습은 어떻게 했나?

“사무실에 가면 방에 피아노가 있어요. 거기서 혼자 한 거죠. 안치행 사장님이 가끔 들어와서 자기 나름대로의 발성을 가르치곤 했죠. 싫었던 게, 제 생각과는 다르게 안사장님은 자신의 필(feel)대로 했어요. 저야 시키는 대로 했죠.”

옛날 노래 다시 들으면 본인의 노래가 어떤 거 같은가. 요즘 애들과 비교했을 때.

“창법이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마음에 안 들어요. 제가 들으면서도 어색하고 그게 상업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래 부르기가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서 더 히트가 됐는지도 모르겠지만.(웃음) 「널 그리며」 같은 경우 그나마 괜찮아요. 그러나 「사랑의 불시착」 같은 건 제가 원하는 창법이 아녜요 억지로 끌려간 창법 같아요.”

전보다 인기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3집 「멀리 보이네」의 타이틀 역시 자작곡이었다.

“흑인, 파워풀 댄스 뮤직 스타일을 생각해서 쓴 게 「멀리 보이네」였는데, 그때도 제가 편곡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구요. 기획사 사단이 작업을 했지만 그래도 자꾸 의견을 내놓아서 「멀리 보이네」가 나온 거지요.”


“나 혼자 잘해서 잘 된 거라고 착각했다!”

1990년대 들어와서는 인기가 뚝 떨어진 느낌이었는데……

“계속 톱을 유지하진 않았는데, 상위권에는 포함되고 있었어요. 근데 그 상황에서는 벗어?고 싶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좋은 게 좋은 걸 모르고, 소중함을 모르고 못살겠다하며 스트레스가 쌓이고, 매니저와 불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매니저와 재계약을 안 하는 문제로 좋지 않게 끝났어요. 나중에 천천히 좀 쉬었다가 ‘내가 하고자 하는 걸로 제작을 해 보겠다’ 했는데 이미 조금 멀어진 상황이었죠.”

직접 투자해서 <비에 스친 날들> 앨범을 냈는데, 시기적으로 서태지와 맞붙었다. 심정이 어땠나?

“<비에 스친 날들>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제 기억에 제 앨범보다 태지가 먼저 나왔어요. 어떤 아는 선배가 ‘야 이것도 좋은데 근데 태지가 더 예술이다.’ 저는 자존심 상했죠. 무용단 애들은 제 음악이 더 좋다고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크게 히트를 못 쳤죠. 저는 옛날의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역시 사회라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느꼈죠. 역시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유통과 마케팅이 있고, 비즈니스가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 거 에요. 그냥 나 혼자 잘해서 잘 된 거라고 착각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당시 박남정 춤은 신기했다. 사람들이 왜 반했던 거 같나?

“발레나 현대무용은 조금 지루하잖아요. 그런데 비보이나 팝핀 같은 것들을 추면 남녀노소 누가 봐도 톡 쏘는 게 있잖아요. 자극적이죠. 애기들 앞에서도 신기하다고 할 게 있으니까요. 그 요소가 잘 사람들한테 잘 어필이 된 거 같아요. 안보이던 요소였으니까요.”

화제를 모았던 일명 ㄱㄴ 춤, 세수 춤이 일설에는 일본 댄스 영향이라고 하던데……

“출처는 잘 모르겠지만 모방은 절대 아니에요. 그때 이태원에 있던 친구들은 다 아는데 심야 단속이 묶이기 전까지 이태원에 모든 쇼적인 것들이 다 모여 있었어요. 그때 춤추는 애들은 다 이태원에 모였고 거기서 춤이 많이 발전이 된 거 같아요. 거기에 이러저런 춤이 엄청 실험되고 있었지요.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가 나오기 전에 이미 저도 문 워크 댄스를 했으니까요. 일본 모방은 절대 아니죠.”

춤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였나?

“1983년에 <Flashdance>라는 영화가 있어요. 영화 내용보다는 중간 길 거리에 비보이들이 춤추는 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완전히 온몸이 굳어버렸죠. 주인공 춤이 아닌 그런 거에. 그 후로 춤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우리 팀들이 빠져나가도 저 혼자 로봇 춤을 했어요.”

댄스가수의 원조라는 타이틀이 맞는 건가.

“춤을 춘 선배들은 이전에도 많았지요. 김추자 선배님, 트위스트 김, 우리 바로 전에 「골목길」의 이재민 선배님 등등. 이재민 형님이 했을 때 이주노가 그때도 백댄서 했더라고요. 그 노래에서 로봇 춤을 췄어요. 재민 형님이 춤을 추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안무였다고 할까. 아직 춤은 노래를 전하는 수단이었죠. 어떻게 보면 제가 춤으로 승부를 걸려고 했던 그런 가수였죠.”

내 인생의 곡이 있다면.

“아무래도 제가 있게 한 「널 그리며」죠.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곡은 「비에 스친 날들」이구요.”

그렇게 만들었는데 서태지에 묻혀서 아쉬웠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건 그랬던 거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만약 서태지가 아니었다 해도 작품 자체는 뜨기가 쉽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심혈을 기울이고 아무리 한다고 대중성과 관계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느끼는 건 뭐냐면, 심혈을 기울인 것과 잠깐 던진 것의 차이는 얼마만큼 오래가느냐는 거죠.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기를 얻든 말든 오래 가죠. 「비에 스친 날들」이 그렇다고 봐요.”

인터넷이나 뉴스를 뒤지면 전성기 후 사업 실패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했던 건가.

“첫 번째 사업은 직접 제작한 음반 <비에 스친 날들>. 그때부터 실패를 보기 시작했죠. 그럴 수밖에 없던 게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했어요. 핸드폰을 만드는데 치중했지 어떻게 유통하는지 홍보하는지, 매니저도 없?으니까.”

매니저도 없었나?

“다시는 누구 소속으로 들어갈 생각도 안했어요. 진절머리가 났죠. 그리고 앨범내면 자동적으로 방송국에서 불러주고 그러면 뜰 줄 알았어요. 대여섯 번 방송하고 연결이 안 된 거예요. 실패했죠. 제가 빨리 깨닫고 방향을 바꿔야 했는데, 그때도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7집에는 뒤늦게 다른 제작자가 한 거죠. 2004년이었는데 그땐 성대결절로 활동을 하지 못했죠.”


“연예인은 처음부터 그걸 직업으로 할지, 취미로 할지 구분해야!”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이나 가수들에게 선배로서 충고 한마디 한다면.

“인기 연예인이 됐을 때는 다른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잖아요. 정말 좋을 때도 있지만 화가 날 때도 있지요. 안티 팬들 때문에 속상하죠. 제가 쭉 보니까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더라고요. 안티마저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연예인이 됐을 때 그걸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하나의 취미인지 분명히 구분해야 하더라고요.”

본인의 경우는?

“빨리 마인드를 바꾸지 않아서 고생한 기간이 길었지요. 이제는 제가 정말 노래에 목숨 걸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로 판단했어요. 춤과 인생을 걸만큼 가족도 버리고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예요. 무슨 도인처럼 빠진다든가 그렇겐 안하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빨리 변신해야겠다고 느꼈지요.”

앞으로 뭘 할 건가.

“전에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건데, 영어 교육용으로 개발한 콘텐츠 사업입니다. 영어를 랩송으로 하는, 숙어를 랩송으로 공부하는 100곡을 만들었어요. 그걸 상품화 하는 건데, 만들기만 하고 유통하지 못했어요. 다시 한 번 살려보려고 하는 중이에요.”

돌이켜 봤을 때 코스를 잘 밟고 있다고 여기는 가수가 있다면?

“이승철이요. 노래를 잘 하니까. 이번 스티비 원더 내한공연 보면서도 느낀 게 가수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때 팬들만 계속 따라가는 게 대체적인데 스티비 원더 관객들은 거의 뭐 20~30대더라고요. 승철이도 보면,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보면 좋아해요. 어떤 타고난 목소리가 있는 거고 그게 부럽죠.”

요즘 싱글들을 많이 내는 추세인데 따로 싱글을 내볼 생각은 없나.

“없어요. 그렇게 내는 게 너무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 임진모, 홍혁의, 이종민
사진 : 김민호
정리 : 임진모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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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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