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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거미줄

내 영혼을 사로잡은 너무나 연약한 거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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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전해 듣기로 그 남자는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 남자는 그때 마법처럼 강렬한 사랑에 빠져 들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정신은 뇌 속에 있지 않고 몸속에 있었다.

지금처럼 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전해 듣기로 그 남자는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 남자는 그때 마법처럼 강렬한 사랑에 빠져 들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정신은 뇌 속에 있지 않고 몸속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담배 연기를 보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여름빛 속에 흩어질 때 그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한번 쉬었는데 그것이 사랑의 떨림 때문이었는지 지난날의 무의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 그는 문득 자신이 서 있던 창가에서 앞 건물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것은 한 줄기 투명에 가까운 은빛 거미줄이었다. 그는 무심코 ‘저것이 어떻게 저기에 있을까?’ ‘저것이 어쩌다 저렇게 빛나게 되었을까?’라고 중얼거렸다. 햇볕에 녹아버릴 만큼 가느다란 거미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줄 거미줄을 타고 가는 것처럼 자신의 연인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다가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전해듣게 되었다. 그 남자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라고 속으로 자주 묻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의 남자가 밤마다 던졌던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회한? 안타까움? 혹은 절대적으로 지켜내고 싶은 순수성에 관한 것? 그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 거미줄이 다른 거미줄을 떨게 하는 풍경, 그리고 그 거미줄 끝에 다름 아닌 ‘영혼’이 투명하고 동그랗게, 마치 한낮의 이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 상상은 며칠동안 한없이 이어졌다.

나는 어느 날인가는 오래 전 무라노섬의 유리 기술자가 유리 공예품을 만들던 풍경을 떠올렸다. 유리 기술자가 투명하고 기다란 대롱의 끝에 입을 대고 물면 눈부시게 영롱한 유리 공예품들이 수줍은 엉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던 것을 나는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의 영혼에 입을 대고 물면 거미줄이 오색찬란하게 부풀어 오르며 거대해지고 그 거미줄의 떨림은 공기를 떨게 하며 마침내 신비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또 어느 날인가는 이런 상상도 했다. 햇빛과 거미줄과 영혼이 같은 실로 오르락내리락 한낮의 풍경을 짜고 있는데 그 우연히 빚어낸 것들은 덧없다기보다는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상들 끝에 어느 날 나는 소설 『나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의 소설 『나자』에는 거미줄에 바치는 반짝거리는 문장이 나와 있다.

가까운 곳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거미가 아니라 공중에 떠있는 거미줄에서 거미집에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한 사물 쪽으로 당신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엮어질 것이다.

나는 『나자』의 첫 문장, 그리고 몇 문장들을 큰 소리로 읽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밤의 정서와 형식을 정확히 기억한다. 무척 예의 바르고 공허한 대화들을 나누고 난 뒤, 헤어질 때 다들 갑자기 기운찬 악수를 나누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온갖 아쉬움을 표하는 그런 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밤들 중 하루 침울한 가운데 택시를 타고 한강의 불빛을 바라볼 때, 나는 그 불빛들마저 어딘가 서툴러 보이고 밤공기의 상냥함마저 나를 책망하는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런 밤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면 삶이란 매순간 반드시 극복해내야만 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추구가 여기서 끝날 수 있을까?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정신적으로 그 어느 것도, 소듐처럼 잘 쓰이지 않는 광물을 절단할 때 생기는 반짝이는 빛도, 어느 채석장에서 나오는 야광 빛도, 우물에서 올라오는 찬란한 광택이 도는 빛도, 시각을 알리는 소리가 스러지도록 불에 던져 넣은 괘종시계의 나무가 타는 타닥거리는 소리도, 무너져 가는 어느 건물들의 벽면에 핀 작은 꽃들과 굴뚝의 그림자들이 자아내는 매력도, 이 모든 것 중의 그 어느 것도, 나 자신의 빛을 구성해주는 것 중의 그 어느 것도 잊혀지지 않았다. 무슨 까닭에 불가사의한 마비 상태에 우리가 빠져들었던 짧은 순간들 속에서, 지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점에 결정적으로 함께 내던져진 것과 같은 우리가, 오래된 관념과 영원한 삶의 모호한 잔해들을 넘어서 경이적이라 할 만큼 일치되는 몇 가지 의견들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일까?

‘경이적이라 할 만큼 일치되는 몇 가지 의견들을 나누는’ 바로 그런 순간이 한 인간을 빚어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우리의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닌 동시에 또 ‘나’이게 해주기 때문에, 과거에 차가운 이별을 고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용감하게 불안 속으로 뛰어들게 해주기 때문에 나는 다시 『나자』의 첫 문장을 읽게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예외적으로 이번에만 격언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사실상 이런 질문은 모두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사로 잡혀있다는 말은 어떤 존재들과 나 사이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특이하고 더 필연적으로 더 불안하게 만드는 관계를 맺게 한다는 점에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서서히 발견하게 된 개인적인 능력들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일반적인 능력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상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여러 가지 취향,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친근성 , 내가 빠져드는 매력, 나에게 발생하는 사건들, 오직 나에게만 발생하는 사건들을 넘어서, 또 내가 실천한 수많은 행동, 나만이 체험하게 되는 감정들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의 차별성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하겠다. 내가 이 차별성을 인식하는 정도가 얼마나 분명하냐에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이것이 거미줄의 이미지다. 내 영혼을 사로잡은 너무나 연약한 거미줄! 햇빛 속의 거미줄을 볼 때 무심코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건 그 거미줄이 눈이 부셔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라져버리기 쉬워 어떻게 그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미줄의 이미지는 앙드레 브르통에게나 거미줄을 타고 연인에게 가고자 했던 남자에게나, 나에게나 ‘상식적인 생각과 어긋나는 갑작스런 연결과,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일치의 세계’ ‘빛의 세계와 같은 금지된 세계로 나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이미지, 즉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랫동안 꿔온 꿈, 어느 한 순간 너무나 이상적인 것! 불안 속의 위안인 어떤 것일 것이다.

그래서 뜨거운 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어느 한여름 오후에,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나는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있는가?’로 바꿔 던져볼 때, 우리는 그 질문의 신비로움에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나’를 다른 것과 바꿔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다른 것과 바꾸는 것이야말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새롭고 낯설게 한다. 나를 다른 것과 바꿔 보는 동안 우리는 또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을 타고 기어가는 동안 빛과 떨림 때문에 변하는 한 마리 거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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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나자

<앙드레 브르통> 저/<오생근> 역7,650원(10% + 5%)

앙드레 브르통이 1926년 10월 4일 파리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 나자와 몇 개월간의 만남을 통해 체험한 실제 이야기와 특이한 경험을 소설로 기록한 책 『나자』. 앙드레 브르통이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평면적인 묘사와 결정론적인 심리분석을 비판하고 현실성 있는 진정한 삶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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