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책 이야기] 능행 스님 "최상의 죽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 『이순간』 능행 스님
지난 5월 26일 서울 조계사 극락전 법당, YES24와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 <아름다운 책 이야기>가 열렸습니다. 이날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는 능행 스님.『이 순간』(능행 지음|한겨레출판 펴냄)의 저자이시며, 지난 15년 구도의 길에서 만난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한 비구니 스님이십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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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며,
내일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지는 하루’라고 했습니다.
전자가 오늘,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말했다면, 후자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죽음과 그 죽음을 침착하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 오늘과 내일, 이 순간과 죽음을 이야기했던 날. 지난 5월 26일 서울 조계사 극락전 법당, YES24와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 <아름다운 책 이야기>가 열렸습니다. 이날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는 능행 스님. 『이 순간』(능행 지음|한겨레출판 펴냄)의 저자이시며, 지난 15년 구도의 길에서 만난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한 비구니 스님이십니다.

스님은 불교계에 제대로 된 호스피스 시설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서원을 세운 후 탁발과 모금을 통해 정토마을을 건립했습니다. 이에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도록 심리적, 영적, 신체적 치유와 돌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날도, 황망하게 돌아가신 다른 스님의 장례를 급히 치르고 부랴부랴 달려오신 길. 세상에 있기 때문에, 경이롭고 의미 있는 소중한 이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을 여러분에게 중계합니다.

죽음, 새로운 삶을 위한 도구


호스피스 활동으로 바쁜 스님이 책을 낸 이유. “2005년에 책(『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을 내고 이후 쓸 시간도 필요성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한편으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첨단을 향하는 만큼 삶의 질도 풍요로워지고 좋아져야 할 텐데 그러질 못합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고달파지는 이 현실 앞에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극단적인 생각이 팽배한 세상을 향해,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어서 이 책을 씁니다.”(p.4)

이날의 강연 주제는 ‘행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행복하게 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원하고, 누구나 할 수 있음에도, 누구나 쉽게 하진 못하는 길.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스님은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핵심 내용은 죽음이라는 명제가 새로운 삶을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 도구를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가. 진정으로 아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아는가. 도구를 통해 삶이 재구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가. 어떤 생각으로 이 순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건 스님의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향해, 불교에 대한 원망을 뱉었습니다. ‘불교는 왜 죽음이 이렇다는 것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나.’ 그건 부처의 탄생을 감안했을 때도 안타까운 부분이죠. “부처님 출가동기가 생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출가를 결심한 부분도 있습니다. 생로병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특히, 죽음을 고민하다 출가한 겁니다. 25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생(生)만 고민합니다. 사(死)도 아니고, 늙고(老) 병드는(病)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여정에만 묶여져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죽음은 삶의 한 가지 에피소드처럼 끝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갔다.” 피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멈추지 않을 것을 알기에, 죽음은 필연임을 인식한 톨스토이. 죽음을 친구로 삼는 것, 그것이 최상의 죽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다음과 같은 경우로 다가옵니다. 병사, 사고사, 돌연사, 전쟁사, 타살, 자살, 자연사 등. 누구나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여행을 가다가, 학교를 가다가, 잠을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다가, 병이 들어서, 차를 타고 가다가……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것과 유사하다. 운수대통하면 피해가고, 재수 없으면 총에 맞아 죽는 것처럼…….”(p.38)

중요한 건 느닷없이 죽음에 맞닥뜨리기보다 준비하는 것임을 스님은 설파합니다. “준비 없이 떠나지 않게, 생의 한순간이나마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죽음 뒤의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죽음과 대면하려 한다.”(p.32)

스님은 앞선 보름여 동안 고단하고 힘드셨다고 합니다. 노스님이 백혈병을 앓으셨고, 4년여 투병 끝에 열반하셨습니다. 여느 가정이 그렇잖아요. 환자가 한 명이라도 생기면 가족 낱낱이 괴롭고 고단한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스님은 이 과정에서 좀 더 실감하셨다고 합니다. “누군가 병들고 죽어가는 상황일 때, 안정되고 평화로운 여정을 하지 않으면 온 집안이 주변이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노스님을 화장하니 한 줌의 뼛가루로 남는데,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잖아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우리는 참으로 ‘나’가 많은데, 진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주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한다고 전합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다시는 못 만나는구나, 생각하니 쓸쓸하고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집에 돌아가시면 남편은 아내를 바라보고,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세요.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응시하시고. 오늘 내가 죽는다면 앞으로 이렇게 살아갈 날이 있을까요. 너무나 확률이 미약하잖아요. 그리 만나서 살아가기는. 꽃잎 하나도 소중하고 마당의 햇빛도 소중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순간이죠. 한 시간 전에 죽었다면 우리도 어떻게 만났겠어요.”

이 순간. 가장 보통의 순간일지라도,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이 순간도 지나가면 그뿐, 어떤 기회도 그때, 지금, 여기, 이 순간뿐입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는.

“사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눴지만 이 순간이 있을 뿐이에요. 집에 가거든, 소중한 존재를 바라보면서 느껴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깨닫고 실천하면 행복한 삶을 저절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내가, 당신이, 살아있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순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껏 사랑하고 감정표현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보세요. 이것이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이에다.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하면, 골백번 죽고 태어나도 행복이라는 느낌을 느끼기 어려울 거예요.”

죽음의 화살이 지금 나를 피해간 이 순간을 기적이라 여기면 어떨까. (…) 밤새 죽지 않고 새벽을 맞는 것도,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눕힐 수 있는 것도, 오늘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기적이다. 죽는 것 또한 기적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것 중에 가장 파괴적이며, 때로는 아름다운 죽음.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 꼴이 어찌 되겠는가.(p.38)

영혼의 그릇을 잘 사용해야 한다


스님은 보름여 동안 사고사로 네 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을 잘 사용해야지. 늘 쓰기만 할 뿐, 그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존해야지. 그것이 삶은 물론 죽음까지 생각하는 방법.

또한 사고사에 대처하는 자세. “사고사는 많은 이들에게 공황을 부릅니다. 천안함도 그런 경우죠. 사고사로 인한 상처나 상실감을 생각하니,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져요. 언제 어느 때, 죽을 건지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 많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곧 행복이라는 가치관입니다. 스님은 여기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십니다. “물질적인 요소를 채워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행복은 물질과 상관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예요. 우리의 생명은 몸을 의지하고, 마음도 몸이라는 것에 의지하고 삽니다. 몸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해요. 그 몸을 소중히 해야 해요.”

영혼의 그릇이 잘못된다. 즉, 병이 든다. 그것은 문제를 잉태한다. “병이 들면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환자라고 그러죠. 아버지, 어머니도 아니고, 환자라는 이름이 붙고,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이 상실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사회에서, 친구로부터, 가족 내 역할도 사라지고, 고스란히 질병과 죽어가는 몸과 상처받은 마음만 남아요. 그러니 내 부모, 형제, 남편, 자식에게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대로 하도록,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관계로 서로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행복하게 사는 길이 힘들지 않을 거예요.”

감사하라는 마음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혹은 연인에게, 혹은 부모와 자식 간에 가슴으로 말하는 거죠. 닭살 돋고 손발 오그라들지 몰라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내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몰라.”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그런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말하라고 스님은 거듭 강조하십니다.

“최근 남편 활동이 미흡하고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될 수 있어도, 남편이 떠나면 공허감이 큽니다. 어떤 상황이든 남편을 지긋이 바라보고, 자꾸 해보면 눈뜨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부부지간에 그것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러면 결혼은 왜 했고 자식은 왜 낳았어요.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고 느끼고 그러면, 돈이 좀 없고 마음에 안 들고 밉다가도, 이 순간 그 사람이 좋고 고마운 거예요. 그런 시간을 많이 공유할수록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나에게, 내가 아내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들어 공유하고 내가 갖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니에요.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


천여 명 배웅한 경험으로 봤을 때, 죽음의 형태 중 어느 게 가장 많나요. 또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어때야 합니까.

“이 말씀 듣는, 오늘 모인 분들은 죽을 때 잘 죽을 수 있어요.(웃음) 대개 그때 가면 되겠지 생각하고 사는데, 그건 너무나 위험합니다. 죽음은 생각과 너무 달라요. 사고사로 죽어 영혼이 튀어 나가면, 그 영혼도 충격으로 졸도해서 나중에 영혼이 깨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깨어나면 내 몸이 없어져서 내 몸을 찾아 헤매고 그러는 거죠.

대개 병으로 많이 돌아가세요. 많은 분들이 돈도, 자식도, 아내나 남편도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불감증에 걸려있어요. 사실은 (죽음을) 인식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어떤 경우가 가장 많으냐. 만 가지 죽음이 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거라면 집착. 몸에 대한, 생에 대한, 관계에 대한, 물질에 대한 집착이 우릴 고통으로 이끕니다. 집착은 고통을 유발하는 끈이에요. 그런데 집착을 넘는 게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인생을 몽땅 털어 바쳤는데, 죽어도 대우나 인정을 못 받는 세대가 아버지-어머니, 즉 55세 이후 세대예요. 젊은 세대는 받을 거 다 받고 책임지지 않는 세대죠. 무책임한 세대와 책임의 세대가 나눠진다고 할까요. 무책임한 세대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애달파서 비통하고 애착할 것이 없어요. 별 걱정할 것이 없는 거죠. 단 그들 세대는 물질,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어떤 세대건 집착은 있는데, 그 집착의 사슬이 옭아맬수록 고통스럽죠.

목 아래 만져 움푹한 곳, 만져지세요? 그게 목숨이에요, 목숨. 죽음이 목숨까지 와서 깔딱깔딱해도 우리는 대개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죽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나에 대한 집착이 죽음의 질을 떨어지게 하는데, 우린 죽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야 해요. 죽음의 질이 나쁘면, 삶의 질과 인간관계의 질을 떨어뜨리게 합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위한 ‘재생의 통로’일 뿐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숨어도 될 만한 도피처도 아니며,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인위적으로 파괴해서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는 무덤도 아님을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죽음은 세상과 사람 그리고 고통과 즐거움으로부터의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생명’을 재구성하여 연기법칙에 의해 인연에 따라 태어나 머물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p.4)

죽음은 우리와 가까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기분 좋게 잘 떠나보내고 죽음을 잘 맞이하고 싶은데,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믿음, 다음 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죽음이 도구가 됩니다.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통로가 됩니다. 죽음 없이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될 수 없어요. 그럼 불교가 윤회냐.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업성에 따라 우리가 재구성된다 이겁니다. 번민이 없으면 열반이 되는 거죠. 돌아올 것도 돌아갈 것도 없고 창조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지 못했을 때는 우리 존재는 업성에 따라 유전됩니다. 뭐가 됐든 재구성이 되는 거죠. 좀 더 청정하고 아름답게 살아서 다음 생도 그와 같은 생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떠나면, 그것을 믿으면 죽음 앞에 당당해질 겁니다. 어떤 존재로 오든 사후 세계와 설계를 확고히 하면 가는 사람도 당당하고 보내는 사람도 잘 보낼 수 있습니다.

거듭 수행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계획이 확실하고, 믿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불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수행의 과정이죠. 생사에 대한 교리에서만큼은 불교를 따라올 수 있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부를 안 하는 것도 불교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믿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가장 감명 깊거나 인상 깊은 임종이 있으셨다면.

“모든 임종이 다 인상 깊습니다. 사연도 구구절절하고, 어찌 그리 파란만장한 인생이 많은지.(웃음) 다 특별하고 같은 드라마가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특별한 인생인데, 그중에 감격스러웠던 내용 중 하나를 굳이 꼽자면, 이 얘기 들려드릴게요. 이 분은 평소 불자가 아니셨어요. 종교를 안 믿는 깨끗한 뇌였고, 믿음이 없는 분이셨어요. 다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절에 가봤는데, 다음에 내가 힘들 때 절에 가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고 사신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건강 검진을 했는데, 위암말기 선고를 받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생전에 그분은 아이를 낳지 못하셔서, 한이 많았어요. 가방 장사만 열심히 하고 아이 낳는 시술을 했지만, 좋은 결과를 못 얻고. 그분이 30세 중후반이었는데, 위에 구멍이 나서 피를 토하고 그랬는데, 그걸 남편에게 들이붓곤 했어요. 남편이 말을 못했어요, 불쌍해서.

처음엔 위궤양이라고 말했는데, 구멍이 나면서 암 덩어리로 터진 거죠. 그때 남편이 암이라서 오래 못 살거라고 했는데, 그 피를 남편 얼굴에 들이붓고 나도 동시에 맞기도 했죠. 어쨌든 병원에서 12시간을 못 버틴다 하고 빨리 준비를 했어요. 다행히 그분이 말귀를 빨리 알아들어서 극락을 알려주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말해줬어요. 오전 9시에 시작한 여정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애초 얘기됐던 12시간을 넘어 염불을 했어요. 화장실 가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고, 어떻게 하면 잘 보내드릴까에 집중했었죠.

그렇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했는데,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안 놓으셨어요. 그걸 하면서 시부모, 남편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새벽 4시에 돌아가셨는데,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동이 튼 줄 알았어요. 밖이 환한 거예요. 3층이었는데, 바깥 주변이 환했어요. 5분 정도 빛이 비춰졌고, 돌아가신 모습이 참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장미꽃을 한 아름 사다가 가슴에 안겨줬어요. 끝까지 믿음을 놓지 않고 따라가는 강인함이 대단했습니다.”


죽음이 일상적이다, 라는 말씀은 젊은 저에겐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또 집착이 사슬이다, 라는 말에도 공감이 가고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집착 버리는 것 중요하다 하셨는데, 일상적으로 살 때를 말하자면 생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 같은데, 집착을 버린다는 것과 생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의미 깊게 다가오는데, 그 의미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텐데, 인생에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면, 다음 생까지도 계획이 확실하다면,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명에 대한 집착은 본능인데, 고유한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해, 관계에 대해 말끔하고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는. 이것이 다음 생에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슬기로움입니다. 다음 생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한 존재로서, 빛이 되고 가치를 줄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대비책이 있어야 해요.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광활한 밭에다 씨앗으로 뿌리고 거름을 뿌리는 슬기로움이 필요합니다.

다시 몸을 받을 때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대면,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 아닌 희망적인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어요.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래서 때가 오기 전에 미리 광활한 내 영혼의 밭에 열심히 거름도 주고 종자를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걸 선업이라고 합니다. 선업만이 죽음에 굉장한 영향을 미칩니다. 악업도 악업만큼 영향을 미치는 거고.”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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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5.29

죽음이라는 건 모르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같아요. 정말 영혼이 있는 걸까. 혹은 정말 다음생이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고 종교에 따라 다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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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4.01

최선을 다한다는것이 현실적으로 그리 쉽지 만은 않죠. 각자 처한 현실과 상황이 최선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 가버릴수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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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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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행

"죽음도 삶의 한 여정"이라는 신념으로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한 채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지난 15년간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한 능행 스님. 우리나라 불교계에 제대로 된 호스피스 시설이 없음에 가슴 아파하던 그는 서원을 세운 후 탁발과 모금을 통해 정토마을을 건립,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도록 심리적, 영적 신체적 치유와 돌봄에 힘쓰고 있다.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에서부터 시작해 소록도 음성 꽃동네 등등을 전전하다 보니 이 사바세계에 신음하는 고통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제치고 중생들의 고통을 찾아 나서며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한 사람이 고통 속에서 사라질 때마다 한 우주가 사라지는 것 같은 큰 절망을 느끼며 스스로 자책에 빠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도 힘겨운데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의 마지막을 위한 여비까지 마련하려고 걱정해야 했기에 더 힘들기만 했다. 어느 분을 끔찍하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보내고 능행은 그 길로 도망을 갔다. 가능하면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길을 택했을까. 사흘 동안 돌아다녔다. 사흘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능행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왜 이 일을 둘로 보았을까. 이 멋진 수행을 두고 왜 다른 수행을 그리워했을까. 이 일을 하면서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큰데 나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했구나. 그는 다시 돌아와 인간의 고통만 본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사랑과 희망과 자비심을 보았다. 그 희망의 서원을 모아 불교계에서는 처음인 독립형 호스피스 정토마을을 세웠다. 그렇게 10여 년, 능행은 이승과 저승의 간이역 정토마을에서 병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선고받은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마무리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환자를 위한 불교 기도집』『불교 임상 기도집』『이 순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