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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자유다

축구에 얽힌 다양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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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가 사라진 그라운드에 우리가 홀로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쓸쓸함과 그리움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공도 놓칠 수는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혹은 밥 말리가 말한 바대로 “축구는 자유다”라고.

우린 지금 뜨겁다. 열광 중이다. 열광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 내부에 신이 살고 있단 뜻이다. 난 열광이 그런 뜻이란 걸 갈레아노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 미칠 듯한 욕망 혹은 정열 때문에 각자의 길을 떠났다가 이런 열광 때문에 서로 닮은 인간 종족으로 돌아오는 중일까? 닮았으되 신적으로 닮은 인간.

 

나는 축구에 대한 또 다른 신화들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 때문에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갈레아노는 ‘두 번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란 제목을 달고 24년과 28년 올림픽에서 기적을 창조해낸 우루과이 선수들을 소개한다. 그 선수들은 게임으로 인한 순수한 행복 외에는 축구로부터 아무것도 보상받은 적이 없는 노동자들과 방랑자들이었다. 푸줏간 점원, 청과물 장사, 얼음 배달부, 구두닦이들이 식초에 적신 수건과 몇 잔의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하며 그들의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를 7대0으로 물리친다.

그렇게 해서 아메리카는 두 번째로 발견된다. 그렇게 해서 우루과이에서 축구는 유구한 전통이 된다. 축구가 열릴 때는 전국의 숨소리가 조용해지고 정치가, 가수, 잡담꾼들의 입이 조용해지고 애인들은 사랑을 멈추고 파리도 비행을 멈춘다. 그 24년 올림픽에서 우루과이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테는 머리 위에 공을 잠재운 채 운동장의 반을 뚫고 간다. 그는 기자들에게 도망가는 닭들을 쫓아가면서 연습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당시 우루과이 선수들의 드리블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고 마치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유성의 궤적 같았는데, 그중 엑토르 스카로네는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했다고 해서 축구의 가르델(아르헨티나의 탱고 가수)라는 별명을 얻는다.

전쟁 때문에 파라과이와 볼리바아의 농민들이 끌려갈 때 파라과이 축구 선수들은 새도 울지 않고 사람 발자국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쓰러져가는 부상자들을 위해 국경 너머에서 축구로 돈을 거둬들였다. 그때 선수 중 한 명이 에리코였는데 그에게는 몸 안에 용수철을 숨기고 있을 거란 소문이 돌았다. 그의 머리는 골키퍼의 손보다 항상 더 높이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묘기들은 무용수처럼 우아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작가는 그의 동작을 보고서 “그는 니진스키(러시아의 발레리나)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했다.

다리가 여덟 개란 소문이 돌았던 레오니다스의 골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골을 허용한 골키퍼조차도 일어나서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말년의 가린샤는 술 때문에 요양원 신세를 졌는데 가끔씩 창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다. 왜냐면 저 멀리서 축구를 하고 놀고 싶은 공 하나가 그를 불렀으니까. 우아한 공격수 디디의 공은 마른 나뭇잎으로 불렸다, 왜냐면 그가 공을 차면 공은 빙글빙글 돌면서 마치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지듯이 방향을 바꿔 결국 골키퍼가 예측치 못한 각도로 골문에 꽂히고 마니까. 러시아의 거미손 야신은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단지 시선만으로 공의 방향을 바꿔 버릴 수도 있었다. 비법은 한 개피의 담배와 한잔의 독주.

마라도나의 모든 골들은 그의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있을 때 이뤄졌다. 마라도나는 다리로 돈을 벌어 영혼으로 지출했다. (에밀 쿠스트리차가 만든 마라도나의 다큐 영화에서 마라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회한으로 가득 찬 노래를 부른다. 마라도나는 영화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했지만 축구공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크루이프가 그의 마지막 골을 터트리고 은퇴했을 때 관중들은 스타디움에서 그의 집까지 함께 동행했다.

1992년에 두 명의 멕시코 기자는 무질서와 혼란으로 들끓는 사라예보에 취재 갔다가 죽을 고비를 맞게 된다. 장전된 총이 에워싸고 있는 와중에 그들은 여권을 내민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듣는다. “멕시코, 우고 산체스.” 장교는 총을 내려놓고 멕시코 기자들을 끌어안는다.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은 우고 산체스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외국 선수였다. 94년 월드컵이 끝나자 브라질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에게 호마리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축구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전래동화다. 나는 성스럽게 이런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아둔다. 어린 시절 기차 칸에서 땅콩을 팔아야 했던, 가난했던 펠레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선수들이 자기 삶의 큰 슬픔조차도 생생하고 활기차고 즐겁게 자기 삶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 시절의 그라운드, 그것은 주변부 인간들이 중심에 서는 이야기였고 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을 그리워하게 하는 이야기였고 강자의 약점 속으로 약자들이 파고드는 이야기였고 무엇보다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축구 선수들에게, 소박하면서도 위대하게,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싸우는 사람들은 (…) 당연히 패배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2010년의 스펙터클한 축구의 세계에서는 그런 위로를 서로서로 나눌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의 이야기들이 빛이라면 그림자에 해당되는 이야기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는 이렇게 흘러간다. 괴벨스는, 국민들에게는 국제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도시 하나를 점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축구 경기를 앞두고 “승리 아니면 죽음”(이탈리아 선수들은 1934년, 1938년 월드컵에서 죽지 않기 위해 승리했다)이라고 말했다. 1974년에 국제축구연맹을 장악한 아벨란제의 첫 마디는 “나는 축구라는 상품을 팔려고 왔습니다”였다. 그는 코카콜라와 아디다스와 제휴했다. 사마란치는 독재자 프랑코에게 손바닥을 쫙 펴며 인사했다.

잉글랜드의 로비 파울러라는 선수는 항만 노동자를 지지하는 문구를 셔츠에 새겨 넣었다. 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선수들은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상업용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 메시지는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제축구연맹의 규정이다. 1997년 4월 페루 리마에서 일본 대사관을 점령했던 게릴라들이 특공대 손에 무차별 사살되었을 때 그 게릴라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클럽의 옷 색깔과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죽어간 게릴라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SBS가 단독 중계를 하는 동안 다른 방송사는 수신료를 올렸고, 또 다른 방송사는 파업한 방송 노동자에게 엄청난 처벌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2010년의 월드컵, 무엇과도 싸우지 않은 안전지대에 있는 것 같은 우리들에게 축구는 스펙터클 관람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국제축구연맹이 다국적 브랜드들, 방송사들과 구축한 세계는 이젠 어떤 반란과 일탈도, 심지어 접근마저 불가능한 카프카의 성채와 같이 완고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악동 웨인 루니는 2010년 월드컵에선 아직까지 재미있는 경기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다린다. 이를테면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이 『축구란 무엇인가』에서 축구의 관점에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옮긴 바로 이 구절과 같은 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법 아래서 다시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뿐 아니라 소원하고 적대적이고 억압된 자연이 그의 잃어버린 아들인 인간과 다시 화해하는 축제를 벌인다. 아직도 스타디움에서는 개인 일상 사업 현실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지고 정열적이고 고통스럽고 어둡고 충만하고 부동하는 상태로 넘쳐흐르면서 삶의 모든 특징을 황홀하게 긍정하는 일이 일어나고 삶의 무시무시하고 의심스러운 특징들까지 인정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일이 벌어진다.

스펙터클을 ‘보면서’ 스펙터클을 ‘보여주기도’ 하는 우리에게 2010년 월드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축구만큼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월드컵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는 종료되고 우리들은 ‘우리’에서 각자 ‘나’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신적으로 닮았던 우리는 곧 광활함 속으로 흩어지게 되어있다. 패터 한트케는 일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골키퍼의 불안은 이런 것이다.

(…) 골키퍼가 공도 없이 그러나 공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패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몸을 막는 골키퍼의 불안은 우주보다 넓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골키퍼 한 명을 알고 있다. 그는 알베르 까뮈다. 가난으로 운동화를 자주 사 신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매일 밤 그의 할머니가 신발 밑창이 얼마나 닳았는지 검사했기 때문에 까뮈는 축구에서 움직임이 적은 골키퍼를 한다. 훗날 그는 골키퍼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이 이쪽으로 와줬으면 하고 바라는 쪽으로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 사실은 내 삶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사람이 정의롭지 않은 때가 많은 대도시의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바라는 쪽으로는 절대 공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주의 불안한 한 점인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혹시 패배하는 법, 그러니까 비참해하지 않으면서 패배하는 법을, 승리하는 법, 그러니까 무감각하지 않게 감사하며 승리하는 법을 우리가 언젠가는 알게 된다는 말일까? 어쩌면 우리는 산꼭대기에 서서 대도시를 내려다보는 보들레르처럼 “내가 거기에 헛된 눈물이나 흘리러 간 게 아니란 걸”이라고 노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내게 오지 않는 공은 인간 영혼의 오묘함과 강인함의 고귀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열기가 사라진 그라운드에 우리가 홀로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쓸쓸함과 그리움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공도 놓칠 수는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혹은 밥 말리가 말한 바대로 “축구는 자유다”라고. 그리고 축구가 자유인 이유, 그것은 결코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눈부시게 변화무쌍한 축구공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골대 앞에 선 골키퍼처럼 우리가 인생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불안한 와중에도 모험 속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진짜 인생이란 걸 알게 되고, 파스칼의 말 “네가 나를 이미 발견하지 못했다면 너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우리는 축구에서 자유를 찾지 않았다. 축구 자체에 이미 자유가 있었다)이 우리 인생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발견되는 미지의 신세계는 자기 자신이란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골대 앞에 선 골키퍼는 자신이 축구와 자기 자신을 다같이 존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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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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