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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월드컵 관전기]

나는 부부젤라 소리에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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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부젤라 소리에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아프리카여. 아픈 대지여. 식민지 국경선의 조국들이여. 힘껏 나팔을 불어라. 대지가 진동하도록. 진정한 고요를 찾아서. 그 옛날 요루바족 전사들이 위험을 알리는 악기를 불어댔듯이.

나의 오빠가 축구장에서 맹장으로 쓰러진 이래 축구는 우리 집안의 금기였다. 그 여름의 흙먼지 가득한 운동화는 불운의 상징이었고 불효의 상징이었고 (좀 복잡한 논리로) 처음 만난 고통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축구를 경험이 아니라 체험으로 사랑하기로 맘먹었다. 우리는 축구보다 축구 선수의 동작들을, 축구보다 축구 선수의 가능성과 망설임과 해석의 여지를, 축구보다 축구선수들의 삶을 사랑했다. 우리는 축구에서 페어 플레이란 말을 처음 배웠으며 격렬하게 몸을 쓰는 ‘전사인 동시에 신사인’ 남자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팀이면서도 개인인 것, 테크닉이면서도 정신인 것, 스포츠면서도 춤인(이를테면 나는 메시의 동작을 보면서 ‘let there be love’를 흥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것 역시 축구를 보며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 같은 모토(비록 <삼총사> 주제가인 「all for one」 같기는 하지만)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승리한 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혹은 승리할 때만 팀을 사랑해서 안 된다는 최소한의 도덕 몇 가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페어 플레이하다’라는 말 자체가 주는 복잡한 의미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페어(fair)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페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페어하기 위해선 적어도 늘 불리하지는 않아야 했다. 나는 몇몇 선수들의 페어(fair)함에도 혹은 페어하지 못함에도 깊이 끌렸다.

그리고 또 나는 이런 말에도 끌렸다. 이를테면 아르헨티나전을 끝내고 박지성이나 허정무 감독이 한 말, “아르헨티나전은 이제 잊었습니다. 나이지리아전을 준비하겠습니다.” 이 말은 일상적인 말 같지만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런 말들에서 ‘끝은 시작이다’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끝은 시작이다.’ 이 문장은 영원한 반복을 말한다. ‘끝은 시작이다.’ 이 문장은 다음 경기. 다음 게임을 맞는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 같지만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슬프고 신비롭기까지 한 삶의 구조를 말하기도 한다.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은 영원한 반복에의 도전. 영원한 반복에의 신성한 신봉이자 조롱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여긴다. 나는 이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는 그보다 (삶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라는 빌 생클리 감독의 말이야말로 이 월드컵 기간에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그 무엇이다. 축구가 삶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축구가 끝과 시작 사이에 놓여 있어서 아닐까? 우리는 모두 끝과 시작 사이에 무언가를 두고 싶어 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적으로 가장 진지하고도 엄숙한 소망 아닌가? 인생의 어느 순간 우리는 ‘삶보다 훨씬 중요한 무슨 일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삶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란 듯 굴기도 한다. 나는 이 월드컵 기간의 비명을 지르게 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광장을 가득 매운 붉은 호흡 아래서 바로 그 기운을 감지한다. 끝과 시작, 일상과 반복, 권태와 환멸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황홀한 반란과 일탈.

기대하지 못하는 순간에 골이 들어가길 기대하게 하는 것. 불안한 가운데 소망을 품게 하는 것, 어떤 뜨거움의 내부로 우리도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 결코 우리를 차분하게 두지 않는 것들, 필드 전체를 가로 지르며 뛰던 1986년의 마라도나, 1990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무찌르며 카메룬을 세계지도에 그려 넣은 카메룬 선수들. 정대세가 뛰어올라 주고, 지운남이 받아 넣은 골, 파라과이의 산타크루스, 이탈리아의 맹공을 막아낸 뉴질랜드의 골키퍼 마크 패스턴, 뒷골목 빈민촌 냄새와 정열과 도약의 냄새를 풍기는 선수들, 축구공을 그녀라 부르며 사랑하는 선수들, 모두 축구의 매력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막 정대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의 티셔츠 아래 어떤 그림이 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게 되고 말 것인가? 나는 정대세의 삶과 그의 선택과 그의 세 조국이 처한 2010년의 상황들에도 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축구를 공을 쫓아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스물두 명 남자의 얼빠진 놀이 이상으로 짐짓 받아들이며 파도타기 응원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우리 관객들, 손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치는 평소에는 말이 없던 수줍은 아가씨들 역시 축구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2010년 월드컵에는 눈길을 끄는 것. 나 개인적으로는 부부젤라를 빼놓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소리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소리는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에요.”

나는 부부젤라 소리를 멕시코와 남아공 개막전 때 처음 들었다. 그때는 하루 종일 벌떼들이 우글대는 벌판에 귀를 막고 납작 엎드려 있는 기분이었다. 벌이 아니라 벌들이 내는 소리가 나를 먹어버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나중에 부부젤라 소리가 코끼리를 부르는 소리 혹은 코끼리 소리일 수도 있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묘하게도 희망봉에 이르는 파도는 폭이 2킬로미터나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2킬로미터짜리 파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파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파도는 최소한의 물방울만큼 작게 쪼개질 수 있다. 나는 부부젤라 악보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빵 같고,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동그란 입의 고통 같았고, 아니면 정반대로 입이 함빡 벌어지는 커다란 기쁨과도 같아 보였다. 동그란 감정 같았고, 함성을 지르는 입 같았고, 알파벳 O자와도 같았다.


그런데 알파벳 ‘오’(O)에 대해선 이미 랭보가 이런 시구를 쓴 일이 있다.

오(O) - 날카롭고 기이한 소리로 가득 찬 지상 최고의 나팔. 지상과 천상을 꿰뚫는 고요
오(O) - 오메가 신의 눈에서 나오는 보랏빛 광선


부부젤라 소리는 아무리 크거나 아무리 작아져도 전체와 동일해 보였다. 이것이 부부젤라 악보의 이미지인 동시에 소리의 이미지였다. 우리가 남아공 운동장에 퍼지는 부부젤리 소리를 소음 이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부부젤라 소리에는 부부젤라를 부는 사람도 의식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랭보의 말대로 지상과 천상을 꿰뚫는 ‘참된 고요를 부르기 위해’ 뜨겁게 아픈 아프리카 대지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 참으로 기이한 소리 아닐까? 클로드 레비스토로스는 로시니와 바그너의 대담을 소개한 적이 있다.

휘몰아치는 듯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이 폭풍이고 무엇이 반란이고 화재인지 그 표현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겠나. (…) 항상 암묵적인 협정이지! 그다지 음악에 정통하지 못한 청중이라면 드뷔시 곡의 바다 아니면 유령선의 서곡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목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 제목을 알고 드뷔시의 「바다(la mer)」를 들으면 바다가 보이는 것 같고 유령선을 들으면 냄새가 느껴진다.

음악이 그렇다면 부부젤라 소리도 그렇다. 부부젤라 소리는 신을 부르는 것인가? 화합을 요구하는 것인가? 혼돈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 옛날의 아프리카 전사들처럼 발을 구르며 대지를 깨우는 소리인가? 우리는 부부젤라 소리에 제목을 달아줘야 할지도 모른다. 60개의 악기 소리 아래 인간의 목소릴 지운 작곡가는 ‘분노는 노래될 수 없는 감정이다’라고 말했다. 부부젤라 소리 밑에도 지워진 인간의 목소리가 있는 것일까? 파악해야 하는 소리, 파악되어야 하는 소리, 수천 개이자 하나인 부부젤라 소리. 낮과 밤을 그려내야 하는 음악가는 낮과 밤이 아니라 그 대조를 그린다. 그러므로 ‘용어는 그것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관계들이다’라는 문장을 부부젤라 소리에도 바칠 수 있다. 부부젤라 소리는 무엇에 대조되는 것일까?

지독한 훈련이 낳은, 고도로 테크니컬한 동작들이 나가는 무대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싸구려 소리가 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부터, 스포츠를 다국적 사업으로 만들어버린 탐욕스러운 스포츠 관료들이 사랑하는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명성 아래 싸구려 플라스틱 소리가 나간다는 걸 발견할 때부터 나는 부부젤라 소리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축구장의 모든 관객이 아티스트인 것을 상상해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때 그 아티스트들의 자격에는 단 하나의 조건만이 필요한다. 자발적으로 뭔가를 표현하려 한다는 것.

‘아름다움이 중요한가? 진정성이 중요한가? 혹은 표현이 중요한가? 해석이 중요한가?’라는 질문들을 남아공 희망봉을 감싸는 파도와 <디스트릭트 나인>과 내전 중인 아프리카 고아 소년들이 차는 축구공을 생각하면서 다시 던져본다. 확실히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었다.

가난과 인종차별의 어두움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부부젤라를 불면서 춤을 추며 코끼리처럼 묵직하게, 뒤뚱거리기도 하면서 운동장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며, 나는 부부젤라 소리에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아프리카여. 아픈 대지여. 식민지 국경선의 조국들이여. 힘껏 나팔을 불어라. 대지가 진동하도록. 진정한 고요를 찾아서. 그 옛날 요루바족 전사들이 위험을 알리는 악기를 불어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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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 했다.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면, 세계가 두 번 진행될 수 있다는 예감도 세계를 두 번 진행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지금보다 고귀한 어떤 다른 차원의 삶을 그리워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그런 그리움이 삶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꿈꾸는 동안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 맘속의 어느 부분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가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의 근원을 이룰 것이다.
- 채널예스 칼럼을 기본 골격으로 재구성한 고전 에세이 『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에필로그 중에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빙벽』에는 애틋한 꿈이 하나 나온다. 산을 좋아하는 고사카는 미나코를 사랑한다. 고사카가 미나코에 대해 갖고 있는 꿈은 이렇다. “넌 어떤 여자와 함께 산을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냐? 없을 리가 없지. 적어도 한 번은 있을 거야. (…)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그런 공상을 할 때, 그 공상에 나타나는 여자는 그 등산가와 뭔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을 거야. 그때 그 여자에 대한 애정은 순수해. 나는 언제나, 벌써 몇 년 전부터 야시로 미나코랑 함께 산을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해 왔어. 내 공상 속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나타났어. 너도 제일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산에 데려가고 싶어질 거야.” 고사카는 미나코에게 언젠가는 꼭 한 번,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눈 덮인 암벽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내가 이 책을 쓰며 가졌던 꿈은 미나코를 향한 고사카의 꿈과 비슷했다. 내 마음을 움직였던 문장과 장면을 그냥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마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을 수줍게 떨면서 공개하는 것처럼. ‘제일 좋은 걸 보여 주고 싶어.’ 난 속으로 이렇게 수없이 되뇌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삶을 되돌려 받기를 원했던 것도 같다.

(…) 우리가 읽었던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지 않도록 여러분이 느꼈던 감동과 떨림도 어느 날 우리 타인들이 들어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황홀한 일일 것이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하는 우리 모두는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돌봐 주려고 애쓰는 중일 터이니, 그 이야기는 무척 중요하고도 진실한 어떤 것을 말해 줄 것이다. 너무 중요하고 너무 진실하고 너무 인간적이라 눈물 나게 웃기고 놀랍고 불순한 이야기들.
-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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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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