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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서효인의 월드컵 배달기]

치킨과 맥주는 월드컵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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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끝났고, 아직도 주문전화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 아직 축구는 끝나지 않았고, 4:1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거대한 축제야.”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마라도나의 아랫배와 지단의 머리숱, 웨인 루니의 성깔을 갖고 있는 뼛속까지 축구인, 사장님은 올해로 8년째 동네를 주름잡는 치킨전문점 <차네 치킨>을 운영하고 있다. 4년마다 돌아오는 전 세계적 축제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그가 아닐 수 없다. 쌓여 있는 치킨 포장용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승부차기 순서를 정하는 감독처럼 빛이 났다. 조금은 지쳐보였지만, 그것이 축구고 그것이 인생이다.

월드컵 기간이면 배달되어 나가는 아리따운 치킨의 수는 평년보다 곱절이 증가하고, 그만큼 매출은 뛰어오른다. 그 덕에 사장님의 막내딸은 무사히 초중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교에 진학하여 늦은 귀가와 늘어난 주량을 자랑했고, 아드님은 대학 졸업 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생활이 가능했다. 사모님은 계속되는 치킨과의 사투에 허리가 말썽, 3개월째 아랫목에 누워 있다. 사장님의 머리칼은 더욱 빈약해져 화를 낼 때면 흡사 ‘지단 박치기’가 떠오르는 지경이다. 어쨌든 전 세계인의 축제이며 그중 단연 사장님의 축제인 월드컵은 또 다시 시작하였다. 남아공의 시차 또한 치킨의 외출을 도와 대부분의 경기가 8시 30분, 11시에 열린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수많은 치킨이 튀김옷을 입기에 이상적인 시간이다.

그리스와의 경기가 성공적이었기에 사람들의 기대는 서울시청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전 국토를 차고 넘쳤다. 기대가 넘치는 그곳에 치킨은 배달되어 있을 것이다. 치킨과 함께 맥주는 수많은 거품을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치킨을 당신 손에 쥐어준 누군가는 축구를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A는 배달하는 중간중간 차붐의 목소리와, 녹색 잔디 위를 떠다니는 닭봉 같은 축구공을 본 게 그리스전 관전의 전부였다. 게다가 그날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가 왔고, 궂은 날 가게의 전화벨 소리는 내 귀를 쫓듯이 추적추적 잘도 울렸다. 비를 뚫고 고객의 집에 도착하면, 온몸이 젖어서 흡사 영산포 홍어처럼 온몸이 삭는 느낌이다. 아마 냄새도 났을 것이다.

그래도 그날은 한국이 이겨서 손님들의 기분이 죄다 좋아 보였다. 기분 좋을 일 얼마 없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월드컵은 흥미, 환호, 열정, 믿음, 광장, 스릴, 치킨, 맥주를 주고 있었다. 그런 날에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지치지도 않고 배달할 수 있다. 사장님은 늘 웃는 얼굴인 나에게 ‘산소탱크’라는 별명을 거리낌 없이 지어주셨다. 한순간도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역시 월드컵은 이기고 봐야 한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손님들이 짜증을 내지 않다니, 이것은 승리가 선사한 환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38건의 배달 중에 백태클을 걸어온 손님은 겨우 42건. 그동안 용케 부상이나 퇴장은 한 건도 없었으니, 2:0 승리가 부른 유쾌한 도전이자 기적이었다. 태극전사 파이팅, 코리아 파이팅.

그리고 오늘 결전의 날이다. 아르헨티나는 무도가 인정하는 남미의 축구 강국이다. 그들이 월드컵을 들어올린 것은 두 번이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그 전해 아르헨티나에 들어선 군사정권의 홍보무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페루에게 4:0 이상으로 이겨야 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무상원조를 베풀더니 그 경기를 6:0으로 끝마친다. 그리고는 승승장구, 당시 요한 크루이프를 필두로 토탈사커로 맹위를 떨치던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국이 된다. 오심과 국가주의가 얼룩진 월드컵으로 기억에 남지만, 아르헨티나에는 곧 나타날 축구의 신이 있었다.

출처: twitpic.com/1xq4yy

마라도나의 드리블 속도는 배달용 오토바이의 속도와 비슷했다. 그의 방향 전환은 치킨을 엎어뜨리지 않으면서 코너를 도는 베테랑의 운전 솜씨만큼 훌륭했다. 신의 손으로 골을 집어넣은 후에는 11:1 드리블로 논란을 종식시킬 줄도 아는, 결자해지의 정신을 가진 도도한 축구천재가 마라도나였다. 마라도나 덕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다시 우승국이 된다. 당시 예선 리그에서 마라도나를 막은 이가 대한민국의 허정무 감독이다. 태권축구니, 뭐니 말은 많았지만 허정무도 나름 우리 축구의 레전드이고, 당시 3:1로 우리는 졌다. 시간은 24년이 지났다. 우리의 축구는 그동안 치킨과 맥주 문화만큼 발전했다.

마라도나의 출현이 아르헨티나 축구 발전의 동력이 됐다면 한국의 치맥(치킨&맥주) 문화는 양념통닭의 발견이 그 발전을 이끌었다. 이전의 백숙이나 삼계탕, 혹은 전기구이 통닭을 대신해서 양념치킨은 후라이드치킨과 ‘반반’이라는 환상의 팀워크를 만들어내면서, 한국 외식업의 일대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 투톱이 만들어낸 궁극의 하모니는 시원한 맥주라는 콤팩트한 미드필더를 만나 더욱 빛을 발했다. 여기에 오랜 경험을 자랑하는 치킨무와 서비스 콜라가 골키퍼와 수비수 역할을 듬직하게 자임했다. 그들이 밤에 열리는 월드컵에 사랑받지 못하는 건, 응원녀 없는 거리응원만큼 어색한 일.

오후부터 전화가 폭주한다. 곱게 튀김옷을 입은 치킨이 베컴의 프리킥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종이 상자에 골인한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치킨과 맥주는 사람들의 뱃속에서 일대일 패스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부부젤라의 굉음 속에서 희미하게 주심의 휘슬 소리가 들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자신감 있는 드리블을 보여주는 파란줄무늬 선수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는데, 왠지 슬프도록 아름다운 전화벨이 울린다. 그들은 외칠 것이다. 반반에 무 많이요!

14번째 고객의 집에서 박주영의 정강이는 닭의 목뼈처럼 예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범석이 그곳에서 왜 그로꼬로만형 레슬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다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박주영의 정강이까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26번째 고객은 박수를 치며 모기를 때려잡고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 안 되는 놈들은 안 된다고, 허정무를 욕하고 있었다. 그 옆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는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패스와 볼 트래핑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일갈했는데, 왠지 기시감이 있었다. ‘이과인’인지 ‘이구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븐에 구은 치킨은 배달 순서에 밀려 점점 식어가고 있었고 내 맘은 심히 급해졌다.

출처: 뉴시스

잠깐 가게에 들어왔을 때 이청용의 만회골이 터졌다. 닭 날개처럼 날렵하고 달콤한 골이었다. 그는 국가대표 앰블럼에 키스를 하고, 터프가이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프타임, 어차피 밀린 광고 때문에 방송사에서는 골 장면을 리플레이해주지 않았고, 밀린 배달은 그만큼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형편없는 경기력에 비해 2:1의 스코어는 흥미로운 편이었다. 고객들의 얼굴에는 후반전에 대한 야릇한 기대가 엿보였다. 사실 기록적으로 골 점유율이 밀렸었고, 더 실점할 수도 있었으며, 후반전에 더 큰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여러 정황은, 치킨 박스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처럼 서로가 먼저 집어 들기를 저어하고 있었다.

염기훈에게 기가 막힌 찬스가 왔다. 왼발 스페셜리스트인 그에게 오른발로 차야 각도가 나오는 지점에서 찬스는 차라리 형벌에 가까웠다. 월드컵 직전에 당한 부상으로 아직 컨디션이 다 올라오지 않았음을, 그의 마저 휘어지지 않은 아웃프런트 킥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마지막 기회였다. 나머지 시간은 심판의 오심과 정강이처럼 예상하기 어려웠던 골대, 그리고 마라도나의 재림인 메시가 지배했다. 집집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치킨이 식지 않았냐고 레드카드를 꺼내들었다. 변변한 항의조차 못해보고 나는 쓸쓸히 경기장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반반치킨을 무 많이, 가져다주었을 뿐인데……. 닭 가슴살처럼 팍팍한 인심이었다.

경기는 끝났고, 아직도 주문전화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 아직 축구는 끝나지 않았고, 4:1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는 월드컵은 소스 없는 후라이드치킨에 가깝다. 게다가 웨인 루니처럼 화가 치밀어 오른 사장님은 23일 새벽까지 연장근무를 명령하며(특근비는 준다고 하였다) 배달은 배달, 카운터는 카운터, 주방은 주방의 라인을 잘 지켜 적에게 공간을 내주지 말자고 우리를 독려하셨다.

역시 4년에 한 번 열리는 거대한 축제였다.

우리는 축제를, 축구를, 치킨과 맥주를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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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1981년 출생, 2006년 <시인세계>를 통해서 등단했다. 글 쓰는 거 말고 잘하는 것도 없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월드컵 기간에 발맞춰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라는 시집을 세상에 스루패스했다. 잘 받아보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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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효인(시인, 문학편집자)

민음사에서 문학편집자로 일하며 동시에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매일같이 여러 책을 만나고 붙들고 꿰어서 내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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