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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없어 고민이라고?

그럼, 철학자가 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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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즈음부터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나는 왜 이럴까? 사는 건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다들 그럭저럭 살 만한 걸까?

사춘기 즈음부터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나는 왜 이럴까? 사는 건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다들 그럭저럭 살 만한 걸까?

 

생각이 많고, 예민한 아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가끔 친구들에게 “너는 뭘 그렇게 고민이 많냐?”는 이야기를 들으면, 칭찬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일본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 『바람난 철학사』. 이 책의 저자인 혼다 토오루는, 내가 왜 항상 알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으며, 결국 뒤늦게야 “나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많은 것 같아”라며 뜬금없이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참으로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다. “음, 그건 말이지. 네가 이성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아이였기 때문일 거야”라고.

『바람난 철학사』라는 책의 일본어 원제는 ‘인기 없는 남자들의 철학사(喪男の哲學史?もだんのてつがくし)’다. ‘모단(喪男)’이라는 말은, 한국의 ‘디씨갤’과 비슷한 일본 사이트 ‘2ch’에서 생겨난 신조어인데, 짧게 풀면 ‘인기 없는 남자’를 뜻하며 한국 번역본에서는 ‘폭탄’으로 옮겨졌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뒤져보니 ‘모단’의 조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단다.

1. 여성과의 교제 경험이 전무(속칭 ‘여자친구가 없었던 햇수=나이’인 사람)
2.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
3. 애인 말고 친구인 여자도 없다
4. 진성동정(眞性童貞?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정)
5. 위의 사례에 맞지 않더라도 어쨌든 간에 인기가 없다 등등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프로이트에 이르는 인류의 철학사라는 게, 사실은 이성에게 처절하게 무시당했던 모단들의 끝없는 고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성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이나 폭탄이기에 겪게 되는 괴로움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사색 활동이 철학으로 이어졌다는 거다.

애당초 현실이 만족스러운 자, 지금은 불만족스러워도 언젠가는 반드시 만족스러워 질 것이라고 믿는 자는 이 세계의 의미나 기원에 대해 묻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기 좋게 잘 짜인 이 현실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실이자 영원 불변한 세계로 믿고 산다.
따라서 현실과 세상의 의미를 굳이 탐구하려는 자는 모두 폭탄인 셈이다. 도저히 현실 속에 풍덩 빠져 적응하기가 힘드니까 한 발짝 물러서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묻는다. 내가 왜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나? 이리하여 “나는 폭탄이다. 고로 나는 인기가 없다”라는, 코기토(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폭탄 사상을 발견한 폭탄들에 의해 철학이 탄생했다. 왜 인기가 없는가, 그보다도 왜 폭탄인가? 아니, 애초에 킹카와 폭탄이라는 가치체계는 정당한가? 이런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생각의 범위는 이웃에 사는 퉁퉁이와 비실이(만화 ‘도라에몽’에 나오는 진구의 못된 친구들)에서 어느새 전 세계로 확대된다.


어떤가. 설득력 있지 않나? 그는 구체적인 사례로 인형에게서 여자의 이상향을 발견한 데카르트, 사랑에서 도망치기의 달인 괴테, 루 살로메에게 버림받고 자신을 신격화해 ‘초인’ 개념을 만든 니체 등 철학자들의 생애를 폭탄의 관점에서 돌아본다. 다소 가벼운 접근처럼 보이지만, 철학의 세계를 바깥의 세계(3차원)와 우리 머릿속 세계(2차원)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본 그의 통찰은 기발하면서도 논리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재미있다. 박장대소하면서 읽을 수 있는 철학책이라니……. 각종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사례가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좀 더 이해가 빠를 수도 있다.

 

도대체 이런 문제작을 쓴 이가 누구인가 싶어 작가에 대해 좀 찾아봤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혼다 토오루는 일본의 대표적인 ‘오타쿠 사상가이자 작가’다. 1969년생으로, 고등학교를 두 번 중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지만, 철학을 그만두고 전공을 바꿔 인간과학부 인간기초학과를 졸업한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가 2005년 펴낸 『전파남(電波男)』이라는 책은,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의 승리 선언’이라는 표현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전파남’이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비슷한 제목의 책이 떠올랐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출간됐고 영화로까지 나온 『전차남(電車男)』이라는 작품이다. 두 책은 물론 관계가 있다. 『전차남(電車男)』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던 한 오타쿠 청년이 지하철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도와주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실화를 담은 러브스토리다. 연애경험이 없는 오타쿠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 ‘2ch’에 도움을 청하고, “어떤 옷을 입으세요” “데이트 장소는 어디어디가 좋아요”라는 다른 오타쿠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흐뭇한(?) 이야기로, 인터넷상에서 오고 간 대화들이 그대로 책으로 묶여 나왔다.

하지만 혼다 토오루는 이 이야기가 ‘탈(?)오타쿠=연애=행복’이라는 도식을 보여주는 ‘반(反)오타쿠주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고 강하게 비난한다. 그에게 오타쿠는 현실이 아닌 만화, 애니메이션 등 ‘2차원’의 세계에서 사랑을 찾는 사람들이며, 진정한 사랑은 2차원에만 존재한다. 이는 연애자본주의로 물든 현실 사회에 저항하는 그들만의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타쿠들은 전차 안에서 사랑을 만나는 ‘전차남’이 아니라 인터넷, 게임, 애니 등 전파에서 순수한 사랑을 실현하는 ‘전파남’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오타쿠의 승리다! 오타쿠야말로 승리자인 것이다!
오타쿠는, ‘연애’라는 시장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오타쿠는 ‘연애’를 대신하는 ‘모에’(萌え?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감정)라는 시장을 스스로 생산해 냄으로서, 이 사랑이 없는 썩은 세상에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 『전파남』 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어찌 보면 ‘루저들의 자학개그’ 같기도 하지만, 다시 보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는 (꼭 고민이 담겨있지 않아도 좋지만) 기발한 이야기들. 쿠메타 코지의 만화 『안녕, 절망선생』에 열광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사소한 일에 비관하고 매사에 절망하는 초(超)네거티브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이토시키 노조무(系色望) 선생. 이름의 한자를 붙여 읽으면 ‘절망(絶望)’이 되어서 절망선생이다. 그는 스토커, 다중인격장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등이 모여 있는 절망적인 반에서 특유의 절망 교육을 실시한다. “인생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 투성이”라며 ‘진로 희망조사’가 아니라 ‘진로 절망조사’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에서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3지망까지 써보는 것이다. ‘세리에, 일본 대표, J리그’를 쓴 축구부 학생과 ‘아이돌, 여배우, 아나운서’를 적어낸 아쉬운 외모의 소녀에게 “절망적이다!”라고 선언하는 그 단호함이라니. “타인의 비난에 금방 좌절하는 심약한 어른이 되면 안 된다”며 ‘상대방 비난 훈련’을 하고,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드러내는 ‘마음의 암흑 고백하기 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냥 킥킥 웃게 만드는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일리 있는 수업들이다. 타고난 조건과는 상관없이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를 꿈꾸라고 강요한 교육이, 결국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안녕, 절망선생』을 그린 작가 쿠메타 코지 역시 자신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히키코모리이자 지독한 오타쿠임을 작품 곳곳에서 고백한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의 문장을 패러디한 각 장의 제목에서 시작해, 일본 문학, 만화, 드라마, 영화 등을 패러디한 표현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실은 꽤 어려운 만화이기도 하다. 책 뒤에 적은 작가의 후기에는 말 그대로 작가의 초절정 자기 비하가 만발하는데, 웃긴 것을 떠나 민망해질 정도다. “나는 만화계의 무안타 제조기. 히트작이 없습니다” “이 만화 한 권을 읽는 데 『드래곤 볼』 1,000권의 체감 시간이 걸린다는군요” 등등.

이러한 일본 젊은이들의 소위 ‘루저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몇 년 전 등장한 ‘하류(下流)론’도 그중 하나다. (물론 ‘하류론’이 지목하는 대상은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오타쿠’보다는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는 ‘프리터족’이나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니트족’이다. 하지만 오타쿠 중에는 프리터족도 상당수이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를 총체적으로 ‘하류 문화’ ‘루저 문화’로 칭할 수 있다고 본다.) 일본의 평론가 미우라 아츠시는 2005년에 펴낸 『하류사회』라는 책에서 일본이 양극화 사회로 돌입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의 문화를 분석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패배한 (혹은 패배할 것을 알고 도전하지 않는) 집단들이 새로운 계층인 ‘하류사회’를 형성했으며, 이들은 사회적인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 생존경쟁에서 패배를 거듭해, 결국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대학교수인 우치다 타츠루도 『하류지향』이라는 책에서 경쟁을 거부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변화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는 지금의 일본 40대 이하 젊은 층들이 ‘공부로부터의 도피’와 ‘일로부터의 도피’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을 강조하는 ‘자아 찾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할 것을 역설한다. 물론 이들의 분석도 상당히 날카롭고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을 거부하고 스스로 루저를 선택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에너지와 창조성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게 현재의 일본을 세계적인 ‘문화대국’으로 만든 주요한 원동력이었다는 사실도.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루저 감성’으로 무장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만화 『습지생태보고서』 『마음의 소리』 ‘이말년 시리즈’ 등이 그렇고, 지난해 최고 인기였던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역시 그 계보를 잇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루저는 가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다. 몇 년 전 그의 충격적인 노래 「스끼다시 내 인생」을 들었을 때, 그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가사에 “이건 한 편의 시가 아닌가”라며 흥분했다. 그리고 지난해 한 록페스티벌에 등장한 그가 “나를 떠나면 다들 행복해져/나야말로 모두 다에게 행복을 퍼다 주는 사람”이라는 가사의 신곡 「나를 연애하게 하라」를 선보였을 때, 다시 한번 그의 루저 에너지에 흠뻑 빠져 정신줄을 놓고 열광했다.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신문 같은 나의 노래
마을버스처럼 달려라
스끼다시 내 인생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스끼다시 내 인생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스끼다시 내 인생」 후렴 부분


쓰끼다시가 사시미를 꿈꾸는 건, 절망선생에게 “정말 절망적이군!!”이라는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일 거다. 한 인디 영화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우린 잘 안 될 거야, 아마”다. 하지만, 나 자신을 객체화해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비슷한 감성을 가진 이들과 낄낄대는 시간. 그것이 쓰끼다시들로 하여금 쉽지 않은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효과 좋은 자양강장제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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