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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난 잠을 자고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라는 시구에 대해 알게 되었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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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라는 시구야말로 경이로움-당혹감-경이로움에 바쳐질 문장이란 것을 느낀다. 결국 우리 역시 사랑하고 있는데도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루 종일 하고 살 수 없는 이유는 뭐지? 현명하다는 건 뭐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뭐지?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나의 외로움은 뭐지? 내가 홀딱 반한 세계가 나를 세상과 유리시키는 이유는 뭐지? 근심, 걱정, 시름이 없다는 것은 뭐지? 어리석은 질문 따위는 던지지 않는다는 것은 뭐지? 어두운 창밖에 서서 환한 불빛 아래 있는 다정한 미소 속 사람들을 훔쳐보는 이유는 뭐지?

5월의 비가 내리는 밤, 바람에 이리저리 사방으로 날리는 연약한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자니 이런 질문들을 던졌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런 질문들을 던진 날은 하루였을 리가 없다. 아마 여러 날, 아마도 거의 모든 날. 내 앞에서 정신없이 휘둘리는 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을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바람이 일으키는 일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마치 대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들이 벌이는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일들이 새삼 애틋하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이유는 뭐지? 어제보다 오늘의 고민이 더 중요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뭐지? 저 나무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건넨다면 나무는 흔들리는 와중에 뭐라고 대답할까?

한나 아렌트가 『정신의 삶』에서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그 책 속에서 어느 해 솔론은 크로에수스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사르디스에 도착한다. 크로에수스는 솔론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과시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이여. 당신의 인간성, 지혜, 여행 경험과 관련하여 철학하면서 지구상의 여러 지역을 방문했단 사실에 관한 위대한 말들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다오. 그러므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보았는지 묻고자 하오.”

그러자 솔론은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바 그대로 조금은 실망스럽게도 어느 누구든 가장 행복하더라도 죽기 이전에 행복한 사람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크로에수스가 다름 아닌 솔론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진 이유는 솔론이 아주 많은 지역을 구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찰한 것을 성찰하는, 즉 철학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솔론에게 말을 걸었단 점이다. 관찰한 것을 성찰하는 능력에 따르자면, 설령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도 죽기 이전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바로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기에 하루가 다른 날과 같지 않기 때문이며, 어느 누구든 시작된 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며, 이런 조건이라면 기다리고 끝을 주목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 왜 그러냐 하면 인간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 행복에 대해 말할 수가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판단의 숨겨진 척도를 아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솔론과 소크라테스라면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당신은 행복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거짓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용기는? 정의로움은? 연민은?’ 이런 질문 방식은 경이로움을 당혹감으로 끌고 간다.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이로 시작된 일이 당혹으로 흘러간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은 체념, 순응 혹은 권태와 환멸뿐일까?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경이로 시작된 일이 당혹감으로 그리고 다시 경이감으로 옮겨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진짜 경이로운 순간이란 어떤 것일까? 아렌트의 말을 따르면, 진짜 경이로운 순간이란, 사람들이 정의나 용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또 대답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용기 있고 정당한 행동을 수행하려 하는 때이다. 이 세계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가진 여인으로 변신하여 초대장을 들고 온다면 그 바닷물에 젖고 밤이슬로 봉인된 초대장의 모토는 경이로움-당혹감-경이로움으로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초대장은 절반은 명료하고 절반은 모호한 세계로 우릴 이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미인과 함께 밤을 보내는 대신 미인의 모든 것을 상상하며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경이로움과 당혹감의 창조자 혹은 구경꾼이 되고 싶었을까? 혹은 경이로움과 당혹감의 수집가이고 싶었을까? 어쩌면 한시도 쉬지 않는 여행자가 되어서 경이로움과 당혹감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경이로움 안에 당혹감이 있고 당혹감 안에 경이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외로운 이가 있어서 오직 믿고 의지할 곳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뿐이라면, 사실은 그 외로운 이는 자신의 마음속과 닮은 세상을 이 세상 어디선가 찾아내게 되길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최고의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전기가오리로 불리는 것에 수긍했다. 그 이유는 전기가오리는 스스로 마비됨으로써만 다른 것들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뭔가에 마비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로 살아있는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진실하고 겸손하고 소박한 마음은 이런 거였다.나 자신이 대답을 이해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당혹하게 하지 못한다. 진리는 오히려 내가 느꼈던 당혹감을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현명해지는지를 말한 사람으로 이야기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는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 수 없는 밤에, 대답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란 걸 아는 밤에, 내 위치와 가능성을 측정할 수 없는 고독하고 애타는 밤에, 당혹감 때문에 괴로운 밤에 나는 전기가오리라 불리는 것에 고개를 끄덕인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저 5월의 비바람 속의 나무처럼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있다. 그 안에서 자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인간은 하나의 우연이지만 그러나 고개를 들면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우연.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지만 그러나 입을 열면 감동에 겨운 질문. 인간은 하나의 짐승이지만 그러나 쓰러져도 애를 쓰는 짐승. 인간은 어찌 되었든지 휘둘리는 한 그루의 나무, 그러나 괴로움을 아는 나무. 잠을 자고 싶지만 춤을 춰야 하는 나무.

측량할 수는 없지만 용기나 정의, 절제. 행복 이런 것들에 질문을 던지길 멈추지 않는다면, 실용적인 대답을 재빨리 끌어내길 거부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괴로워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많은 순간 경이롭게도 더 용기 있어지고 더 정의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5월의 빗속에서 아무런 방향도 없이 흔들리는 나무를 보다가 나는 그 흔들림이 암시하는 세계에 깊이 끌렸다. 내가 한 그루 나무 밑에 서 있는 동안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불안한 대기, 사막의 모래알, 근심하는 시선, 갓난아이의 울음, 결론을 알 수 없는 사랑 이야기, 한 권의 책이 동시에 자정의 밤하늘 위로 흘러갔다. 모든 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토록 당혹스럽고 그토록 불분명한 밤바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는 싫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밤에 나는 속마음을 꾹 참고 ‘끝까지 들어볼게요!’라고 말했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의 어린 시절은 이랬다. 그는 분수, 해묵은 호두나무, 바이올린, 저 멀리 있는 바다(여름 나절의 꿈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발트해)를 사랑했다. 토니오는 자신만의 시를 쓰며 내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는 곧잘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모든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일까? 왜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다른 소년들 사이에 있으면 서먹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저 선량한 학생들과 건전한 평범성을 갖춘 학생들을 좀 봐라. 그들은 시를 쓰지도 않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정상적이라고 느낄 것이고 모든 세상사, 모든 세상 사람들과 진정으로 일체감을 느낄 것임에 틀림없어. 그건 정말 기분 좋은 느낌일 테지.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된 것이지?’

토니오는 미소년 한스를 사랑한다. 한스는 모든 면에서 그와는 반대다. 한스는 우등생이었고 영웅같이 승마를 하고 체조를 하는 씩씩한 장부였다, 동급생들은 모두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고 선생님들도 그를 사랑했다. 시내의 귀부인들도 그를 붙잡고선 그의 금발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안녕, 한스 머리털이 예쁘기도 하구나. 여전히 반에서 일등이니? 장한 도련님, 엄마 아빠에게 안부 전해주렴”이라고 말하곤 했다. 토니오는 한스를 보면서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노를 젓거나 수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에 나는 모래사장에 누워서 빈둥거리며 혼자 외로이 있겠지. 나도 너처럼 되고 싶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도 너처럼 되고 싶구나!’라고 토니오가 바라긴 했지만, 그렇긴 했지만 그러나 정말 진정으로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스의 존재 양식를 부러워하긴 했어도 토니오는 오히려 한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요즘 놀라운 것을 읽었어. 뭐가 굉장한 거야! 한스, 너도 그걸 읽어봐라. 그건 실러의 『돈 카를로스』라는 작품이야. 내, 그 책을 빌려줄게. 네가 원한다면.”
“아냐, 그만둬, 토니오! 그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난 계속 말에 관한 책이나 읽겠어, 너도 왜 알잖아. 거기에는 근사한 사진들이 정말 많단다. 그건 고속도로 촬영한 스냅 사진들인데 속보, 질주, 그리고 도약 중인 말들을 볼 수 있어.”
“그러나 『돈 카를로스』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건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정말이야, 그 작품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목이 있어서 읽는 사람의 가슴을 아주 쾅! 하고 소리 나게 친단 말이야!”


그러면서 토니오는 배신당해 우는 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 둘의 대화는 다른 친구의 등장으로 너무나 쉽게 끝난다. 한스 같은 녀석은 선심 쓰듯 자신의 감정을 세상에 골고루 나눠주는 그런 어리광과 자의식이 뒤섞인 버릇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니오는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읽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아닌지 잠깐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항구를 따라 바람 부는 축축한 골목길을 걸어갈 때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심장 속에는 ‘동경, 우울한 질투, 극히 적은 경멸감, 그리고 순결하기 짝이 없는 행복감’이 함께 들어 있었다.

토니오, 그는 그리고 또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다. 굵다랗게 땋아 내린 금발, 푸른 눈, 주근깨가 있는 오똑한 콧날. 그들은 어느 날 「숙녀들의 작은 물레방아」란 곡에 맞춰 춤을 춘다. 프랑스 교사가 ‘1조 앞으로!’(en avant) 하고 외칠 때 그녀는 그의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섬세한 드레스에서 향내가 풍겨왔다. ‘너를 사랑해, 사랑하는 귀여운 잉에’라고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녀가 그다지도 즐겁게 춤에 열중해서 토니오 따위는 안중에 없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떨리는 맘과 고통을 그 한마디 ‘너를 사랑해, 사랑하는 귀여운 잉에’ 속에 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

사랑하고 있는데 춤을 춰야 하다니! 그는 굴욕적인 모순 때문에 괴로웠다. 토니오는 이제 실수를 한다. 프랑스어 교사는 소리를 지른다. “모두들 잘 알아들었는데 도련님만 이해를 못하셨군! 빨리! 물러나요! 썩 물러나란 말이지!” 모두들 웃었다. 토니오의 마음은 그리움과 상실로 가득 찼다.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해묵은 호두나무가 서 있는 저녁 무렵의 정원이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던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가 그의 자리다. 왜냐하면 금발의 잉에가 있으니까. “너 금발의 잉에여. 웃고 있는 네 길쭉한 푸른 두 눈이라니. 『임멘호』를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는 사람만이 너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명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슬픈 일이지!” 그가 시를 써서 유명해지더라도 잉에 홀름에게, 푸른 눈의 명랑한 잉에에게는 결코 감명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명해지는 것도 다 소용없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 토니오가 희망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때도 역시 그의 심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심장은 따뜻하고 슬프게 잉에를 위해 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심장은 따뜻하고 슬프게 그대 잉에 홀름을 위해 뛰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영혼은 행복한 자기 부정 속에서 건방지면서도 평범한 금발의 그대, 밝고 자그만 인격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오는 속삭인다. ‘내 마음 변치 않으리라.’ 그러나 희미한 두려움과 슬픔의 소리도 있었다. ‘세월이 가면 더 이상 명랑한 잉에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

토니오는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갔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갔는데도, 그런데도 만약 그가 길을 잘못 갔다면 몇몇 사람에게는 바른 길이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넌 대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하면 그는 일정하지 않은 답을 하곤 했다. 수천 가지 존재 가능성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들이 실은 불가능한 것들투성이일 뿐이란 은밀한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고향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유머에 가득 차 있었고 괴로움을 알고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일했다. 그의 체험은 철저했고 그는 희귀하게 근면했기 때문에 곧 그는 탁월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토니오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마치 양극단의 삶을 오가는 느낌, 어느 세계에도 속해 있지 못하단 느낌. 그는 어느 날 덴마크로 여행을 떠나기 전 여자 친구와 이야길 나눈다. 토니오는 삶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사랑을 고백하는 삶,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토니오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삶이 아닐 것이라고,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일 거라고 그러니까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이 삶일 거라고 말한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때 그의 여자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씨, 당신은 길 잃은 시민이지요.”

길 잃은 시민이란 어떤 존재일까? 우리 시대로 표현하면 자살해버린 영화감독일까? 사기꾼 혹은 부동산 업자가 된 전직 스타일까? 정치적 성향과는 다르게 아파트 값을 걱정하며 투표하는 시민일까? 속물이 된 종교 지도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로 진부한 것, 속물적인 것, 누구나 그렇다고 말하는 상식적인 것의 완고함에 구토를 느끼면서 또 그 세계에 어찌 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는 자인가?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불안감에 시달리지만 그러나 또 인간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이 쏠리는 자인가?

토니오 크뢰거는 이제 고향 마을을 거쳐 배를 타고 덴마크로 갔다. 그는 바다와 너도밤나무의 숲이 있는 곳에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구원받은 듯한 부유(浮游)한 상태를 즐겼다. 가끔씩 어떤 고통이 그의 가슴을 찌르기도 했다. 그건 동경 또는 회한과도 같이 잠시 스쳐가는 찡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부유(浮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이 혹시 길 잃은 시민을 이해하는 열쇠일 수도 있을까? 세상과 내가 강력한 상관관계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일까? 부유한다. 즉 어딘가 떠 있다는 말은 내게도 중요한 단어였다. 부유하고 있음이 오히려 어떤 모험의 시작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토니오가 묵고 있던 호텔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무도회를 열었다. 토니오 앞에 손을 맞잡고 나타난 건 토니오가 짝사랑했던 두 사람 금발의 잉에와 한스였다. 소규모 관현악단이 폴로네즈에서 왈츠를 연주할 때 토니오는 어둠을 뚫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밝은 곳에서 춤추는 사람을 엿볼 수 있었다. 강철처럼 파란 눈과 금발을 한 이 밝은 족속의 인간들은 청순성, 순수성, 명랑성, 그리고 또한 자랑스럽게 순박하며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냉담성의 표상을 불러일으켰다. 잉에와 한스를 보자 토니오는 괴로운 그리움 속에 빠져들었다.

내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그가 물었다. 아니, 결코 없었다. 너 한스도 잊은 적이 없었고 너 금발의 잉에도 결코 잊은 적이 없어. 정말이지 내가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너희들이었어. 그리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 난 남몰래 내 주위를 살펴보곤 했지. 너희들이 참석해 있나 하고. 한스네 집 정원 문 앞에서 약속한 대로 너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마라! 난 너한테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나부랭이를 보다가 내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기게 해서는 안 된다.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하느님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악의 없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보르크 흘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으리라 다시 이렇게 되고 말 것이리라.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니까 말이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자 토니오의 마음속에 그 옛날의 시구가 떠올랐다.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

토니오는 이 시행에서 뜻하고 있는 감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애수적 북구적이며 진실하고도 서투른 중압감이 실린 감정이었다. 잠이 온다. 행동이나 춤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달콤하고도 느긋한 기분으로 자기 자신 속에 살고 있는 감정에 그냥 완전히 충실하게 살 수 있기를 열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춘다. 제정신을 잃지 않은 채 예술이란 어렵고 힘든, 위험한 칼춤을 민첩하게 추어야 한다. 사랑하는데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굴욕적인 모순을 한 순간도 완전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과 같다. 옛날과 똑같다. 달아오른 얼굴로 토니오는 어두운 곳에 서서 ‘너희들 금발의 행복한 생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니오는 괴로운 동시에 행복했다. 그때도 그의 마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옷을 벗고 누워서 베개 속에다 두 개의 이름을 속삭였다. 한스, 잉에. 그 두 개의 이름은 사랑과 고통과 행복의 본원적인 원천, 즉 삶을 의미했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와 향수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그는 애인 리자베타에게 한통의 편지를 쓴다.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잘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허깨비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허깨비들과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 그리고 비극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인데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생동하는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리자베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 동경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과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나는 배신당한 왕의 이야기의 아름다움에 끌린 ,그런 경이로움에서 시작된 토니오의 삶에 대한 당혹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질 경이로움까지를 기대하게 된다. 토니오는 대답이 아니라 또 다시 질문 속으로, 불확실함 속으로 자신을 차분하게 던져 놓았고 우리는 이제 그에겐 행복을 묻지 않는다. 행복하냐고 묻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은 오늘날에는 위대한 일로도 보인다.

『토니오 크뢰거』를 읽을 때마다 그 마음의 투명함과 맑음이 뿜어내는 우아한 아름다움에 놀라게 되고, 동시에 내가 얻지 못했던 마음들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 때문에, 부유한다는 것의 고단함 때문에, 두 세계 사이에 끼여서 길 잃은 시민으로 산다는 것의 애잔함 때문에, 오로지 고독 때문에 교만해졌던 마음 때문에 잠깐씩 통증을 느낀다. 그러나 또한 그 순간에도 내가 얻지 못했던 마음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내 심장으로 다른 얼굴들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라는 시구야말로 경이로움-당혹감-경이로움에 바쳐질 문장이란 것을 느낀다. 결국 우리 역시 사랑하고 있는데도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다.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의 낭만적이지 않은 우아함만큼이나 언제나 내 맘을 끄는 것은 토니오의 심장이 뛸 때마다 등장하는 ‘동경과 우울과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의 감정들이다. 이 마음의 따스함, 깨끗함, 정직함은 어려운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무슨 일인가를 겪어내고 있는 우리 마음의 근원과도 같이 느껴진다. 토니오가 ‘길 잃은 시민’이라면 그 시민성도, 길 잃음도, 모두 삶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에 내게는 『토니오 크뢰거』야말로 희궙 찾기에 대한 글로 읽힌다. 우리는 희망에 대해 너무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잊고 있다. 당혹감 뒤의 경이로움을 잊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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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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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저/<안삼환> 등역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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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이 오마주한 시집.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국내 첫 완역 출간되었다. 미국 20세기 현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비트 세대 문학 선구자,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었다. 도시 패터슨의 역사를 토대로 한, 폭포를 닮은 대서사시.

본격적인 투자 필독서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경제/재테크 최상위 채널의 투자 자료를 책으로 엮었다. 5명의 치과 전문의로 구성된 트레이딩 팀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최신 기술적 분석 자료까지 폭넓게 다룬다. 차트를 모르는 초보부터 중상급 투자자 모두 만족할 기술적 분석의 바이블을 만나보자.

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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