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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르트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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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길 나 역시 얼마나 갈망했던가?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란 말을 듣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남부 독일의 깔끔한 방랑자 크눌프(헤르만헤세의 『크눌프』의 주인공)가 휘파람 불며 돌아다닐 것 같은 청량한 밤이다. 몽마르트르 언덕 계단에서 산타나의 「she's not there」를 다같이 열창하고 돌아서던 어느 밤이 기억난다. 그 밤도 오늘밤처럼 달콤했고 곡절 많은 샤크레 쾨르 대성당은 하얗게 빛났고 푸른 야간 조명에 휩싸인 에펠탑은 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뽕나무 잎을 갉아먹고 비단을 뽑아내기로 맘먹은 누에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공기는 풀냄새와 전 세계 사람들의 웃음 냄새와 분수같이 솟구쳐 오르는 흥분감, 일탈의 욕구로 달짝지근했다. 모두들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모험을 하기를, 뜻밖의 연인을 만나기를 그 분홍빛으로 어둠이 내리는 도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수런수런 달뜬 음모꾼들이었다. 손가락, 시선, 엉덩이, 어느 것 하나 끈적이지 않은 것도, 팽팽하지 않은 것도 없었다. 모두들 내장에서 빛을 내는 초록 반딧불이들이었다. 난 그 밤 나뭇가지에 매달린 누에처럼 공중에서 굳어버리고 싶었다. 누군가 그 누에를 들추면 그날 밤의 열기와 열정과 순수를 뽑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밤 나는 한 아코디언 주자를 따라다녔다. 금줄이 수놓아진 보라색 조끼를 입은 그는 춤을 추며 걸어 다녔고 퇴물 곡예사같이 사람들을 건드렸다. 그러나 모두들 그의 초대가 한물간 초대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 계속 혼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쉬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던 앙리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던 앙리입니다.” 천만에,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가 기다리기엔 그는 너무 배가 나왔고,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는 지나치게 상투적이었다. 상상한 그대로였다. 그는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나는 그의 공허한 웃음, 그의 기백에 푹 빠져 버렸다. 나는 기꺼이 그의 젤소미나가 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인적도 없는 좁은 골목으로 사라질 때 그의 목소리만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우리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는데 그는 왜 우리가 그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인가? 혹시 앙리 자신이 우리를 기다렸음을 알리려는 것 아닐까? 고독과 우정은 바로 이런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 아닐까? 그날 밤의 공기는 미완성품으로 보였다. 신비한 뭔가를 은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얀 샤크레 쾨르 성당이 하얀 달빛 아래 투명한 빛을 내기 시작할 때, 그 빛이 내 그 가슴에 스며들 때, 나는 문득 그 밤이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창세기라 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새로운 시작이 무엇인지 어느 순간 갑자기 짐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만 브르흐 식으로 말하자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은은히 솟구쳐 오르던 등잔 불빛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고요한 별빛이 만나는 풍경과도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리의 안에서 뭔가 솟구쳐 오를 때야 우리는 밖을 볼 수 있다. 빛이라 하면 ‘안에서 싹트고 밖에서 방황하는 믿음의 빛’이다. 그 순간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던……”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던……”이란 앙리의 말은 샤크레 쾨르 대성당 위의 달에 부딪혀 전혀 다른 말로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던 앙리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던 앙리입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무척 진실했다. 한 사람의 메아리쳐 오는 꿈처럼.

그가 사라진 골목을 보자 내 어린 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어느 날이 생각났다. 그 무렵의 나는 가족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산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만큼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안에서 가장 이빨을 오래 닦는 사람이었으며, 가장 노트 정리를 잘했고, 발도 가장 잘 씻었으며, 시금치도 제일 잘 먹었다. 나는 우리 부모를 위한 귀염둥이 장화 신은 고양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던져버리고 “밥 줘!”라고 소리칠 때 나는 얼마나 위풍당당했던가. 그런데도 그 무렵의 나는 한편으론 제페트 할아버지를 배신한 피노키오이기도 했다. 나는 이유 없이 아프단 핑계를 대고 조퇴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날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누군가 막 빗질을 한 듯 깔끔했다. 오전 열한 시의 여고 뒷담 길엔 사루비아가 루비처럼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사루비아는 ‘더 이상 순결은 힘들어요!’라고 핏빛으로 아우성치는 여고생처럼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은 순결했고 정직했다. 그런데 오직 사루비아뿐이었다. 사루비아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사방은 이상하리만치 마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행인도 없고 목소리도 없었다. 정적! 마치 어떤 존재가 “신이여! 내 맘을 온전히 받아주소서!” 기도를 올리고 우주는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정적이었다. 어떤 소음은 있었다, 마치 먼지나 꽃씨, 벌들이나 딱정벌레만이 낼 수 있는 그런 소음이 있었다, 정말로 해파리 같은 꽃씨가 바람을 타고 날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지구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인 분자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꼈다. 완벽했다. 그날의 바람, 그날의 나무, 그날의 구름, 그날의 평화, 그날의 선량함, 그날의 가능성. 지구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하품을 한다면, 혹 창조주 신이 있어 이마에 땀을 훔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면 바로 그런 날일 것이다. 요정들이 꿈꾸는 하루이자 평생, 영원. 바로 그런 날이다. 그런데 그날 그 공간에 하나의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단 하나의 존재가 그 꿈결 같은 협주곡에서 여분의 존재였다.

 

그 공간에서 없어도 좋을 단 하나의 존재는, 찢어지게 가슴 아프게도 바로 나였다. 절대적으로 평화로운 공간에서 나 혼자만이 이질적인 존재, 낯선 존재, 어리둥절한 존재, 당황한 존재란 생각을 하고 나니 나는 조금 심각해졌다. 유채화 속에 잘못 들어간 수묵 한 점이 나였다. 나만이 그토록 희미했다. 나는 실망했다. 세계의 한 단편이 세계의 필연을 우연이란 이름으로 내게 보여줬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처럼 세상은 나 없이도 그득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엄숙한 벽이 존재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좀 더 다정해져야 할지, 좀 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할지, 좀 더 강해져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난 거람? 누가 날 기다린단 말이지? 나는 그 모든 평화를 깨버릴 기세로 화난 사람처럼 질주했다.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던 사람이 앙리가 아니었듯이, 나도 아니었다. 세상 만물이 돈키호테의 풍차로 보였다.

그런데 저 저명한 장 폴 사르트르도 그런 고민을 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은 소녀의 기도 같은 초인종 소리에도 즐거이 “내가 나갈게요!” 소리치며 뛰어나가던 그런 어린 시절을 너무나 집요하고 미세하게, 유쾌한 와중에도 가슴을 찌르며 회고시켜주는, 열렬한 자존심과 고독감의 변주곡 같은 책이며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이 얼마만큼 우리의 나약함과 좌절감에 맞붙어 있는 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우리의 숭고한 비밀,즉 독자적인 인간으로 매순간 다시 태어나기에 대한 고백과 영원한 추구를 담은 책이다.

우리는 도대체 왜 초인종 소리에 뛰어나갔던 것일까? 그 은밀한 해답이 다 『말』 속에 들어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이내 죽고 만다. 그의 엄마는 청상과부가 되어서 친정으로 돌아온다. 장 폴 사르트르는 그녀와 두 개의 침대를 두고 같은 방에서 잔다. 어른이 되면 그녀와 결혼해서 잘 돌봐줘야겠다고, 너그럽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야겠다고 맘먹으면서.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와 특히 사이가 좋았다. 그 둘은 가지각색의 장면이 담긴 풍성한 연극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벼운 희롱, 금새 풀리는 오해, 모나지 않은 약올리기와 부드러운 꾸짖음, 애정 어린 원망, 다정한 비밀. 그에게는 착한 아기 장난을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왜 손자를 이 세상의 기막힌 작품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좋았노라고. 자신이 누린 삶은 성공적이었노라고. 유순한 사르트르는 어른들의 환심을 사는 데 이골이 난 나머지 자신은 전도유망한 강아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사를 남에게 보이려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거룩한 거짓에 너무 골몰하느라고 이제 어린 사르트르에겐 연극이 아닌 게 없었다. 어른들의 칭찬, 어른들의 인정을 구하느라, 어른들의 자랑거리가 되느라 결국 사르트르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른들의 환심을 산다는 것! 나 또한 그것이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기대에 가득 차게 하는 일인지 안다. 너무나 기대에 가득 찬 나머지 어른 중 누구 하나 예상보다 더한 칭찬을 하게 된다면 어린아이들은 그만 죄의식에 사로잡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안도감과 놀라움 속에 착한 아이 연극을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한다.

1904년부터 1914년까지 나의 삶은 악 없는 선과 같았다.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나간단 말을 놓고 보면 나는 속속들이 불확정한 존재였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뒤 면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한 일이 없다. 미워하는 동시에 환심을 살 수는 없고,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마음은 투명한 어항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만든 예쁜 어항 속의 그 투명함, 어느 한 곳도 그늘진 곳이 없는 그 천진한 투명성 속에 단 하나의 불순물, 바로 자신이 사기꾼이란 확신이었다.

나는 존재의 결핍 때문에 어른들에 의지하고 어른들의 칭찬과 인정이 내 능력을 보장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럼으로써 영락없이 속임수에 빠져든 것이다.

내 행동은 다 시늉이고 연극이고, 그런데 그런 손쉬운 착한 아이 노릇이 도리어 내게서 세계와 사람들을, 자신감을, 자존감을, 독립성을 앗아가고 말리라는 것. 그 불안하고 고독한 노릇을 나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밤 현관 문 작은 전조등에 부딪혀 죽은 나방의 반쯤 탄 날개의 아름다움에 놀란 일이 있었다. 그 나방은 어떻게 자신만의 불빛을 찾아내 돌진했던가? 그 나방은 불빛의 아름다운 장신구에 불과한가? 아니면 불빛보다 장엄한 우주였는가? 나는 끝내 타죽고 만 나방의 자기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행위에 깊이 감동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배역과 소도구뿐.

나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목적을 나누어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인류의 욕구나 희망이나 기쁨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을 유혹하는 데만 심신을 모질게 낭비했다. 인류는 내 관객들이었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그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나를 오만한 유배의 처지로 몰아넣었는데 그것은 곧 고뇌로 변하고 말았다. 가장 나쁜 일은 내가 어른들 역시 연극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게 건네는 말들은 사탕 같았지만 그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말투가 전혀 달랐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나와의 신성한 계약을 어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 딴에는 가장 자신 있는 귀엽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그래도 그들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르는 것이었다. 애야, 저기 가서 놀아라, 우리끼리 애기할 게 있으니까.

사르트르는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집안의 단결과 현재의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내 신성한 유년 시절을 이용한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나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 세상에서 뚜렷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내게 납득시키려고 했는데 정작 나 자신의 존재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나 자신을 위시해서 누구도 이 세상에 내가 무엇 하러 이 땅에 나타났는지 가늠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임을 별안간 깨닫고는 이 질서 정연한 세계에 끼어든 나의 괴이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현대 어학원의 잔칫날의 일. 그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현대 어학원에서는 백열등의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어머니는 쇼팽의 곡을 연주하고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모두가 프랑스어로 말을 했다. 색 바랜 비단 같고 오라트리오처럼 장중하고 느릿느릿하고 후두음투성이인 프랑스어였다. 나는 땅바닥에 발이 닿을 겨를도 없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날아다녔다. 어느 독일 여작가의 가슴팍에 눌려 숨이 답답할 지경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그의 드높은 자리에서 한마디 선언을 했다. 그 말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소. 시모노 씨가 없단 말이오.’ 나는 여류작가의 품에서 빠져나와 방 한구석으로 달아났다. (…) 학원 행사에 모든 사람들이 다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떤 수강생들은 몸이 불편해서, 또 다른 수강생들은 사정이 있어서 못 왔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발적이며 하찮은 일들에 불과했다. 오직 시모노 씨가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무섭게 이 빽빽한 방안에 칼로 도려낸 듯이 빈자리가 파였다. 한 인간이 이미 마련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길 나 역시 얼마나 갈망했던가?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란 말을 듣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삼촌의 결혼식에 피아노 연주를 하기 위해 몇날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고사리 손으로 결혼 행진곡을 연습하던 일, 부모가 부부 싸움이라도 벌어진 날이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던 일, 거리에서 싸우는 취객들 사이에 뛰어들어 ‘아저씨들 이러지 마세요!’라고 외치던 일, 나 역시 사르트르 같은 병을 앓았다. 사르트르는 그날 이후로 더더욱 목이 말라 마치 물처럼, 빵처럼, 공기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곳에서 아쉬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 소원은 날마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 꼬마 사르트르는 제 일에 밝다.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엄청난 손실이 된다는 것을 프랑스는 모르고 있는 거다.

그는 수취인을 찾고 있는 유용한 성물이 되고 싶었고 자신을 프랑스에, 세계에 바치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었을까? 나르시시스트였을까?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한 소년이 온 세계가 눈물 속에 자기 자신을 감지덕지 맞아들인다는 증거가 되길 원하는 것은 재빨리 자기 비하의 늪으로 숨어버리는 것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보다 훨씬 영웅적이다. 그 소년은 이제 삶의 순간을 견딜 그 무엇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는 정열 없인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려면 누구든지 나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집안 식구들은 얼마 동안 내게 그런 환상을 길러주었다. 나는 그들이 학수고대했던 하늘의 선물이며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없어서 안 될 존재라고 되뇌어 왔지만 이미 그런 것은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대단한 자존감과 고독감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구원이자 족쇄는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왔다. 그는 글을 쓰게 되었고 “나”라고 말을 하면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가 일곱 살의 무명작가로,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찌르는 우익 아나키스트 같은 글을 쓰며 최후의 순간에 악당을 무찌르고 ‘여기, 사르트르가 있다’고 외치며 병풍 속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은 우리의 어린 날의 수많은 병정놀이를 떠오르게 하면서 동시에, 그 시절의 우리는 희미한 개인이었지만 본질적으로 거짓된 꿈일망정 단순한 꿈을 꾸고 있지만은 않았단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시절의 놀이들은 당황한 영혼들의 여행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은 낮에도 꿈을 꾸고 있었다. 훗날의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밀어주는 사람 없이도 나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런 사명을 나 스스로 꾸며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자기기만도 이젠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했던 말처럼 자기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신념이며, 자기기만의 최초의 행위 역시 자신이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 된다. 우리의 내부는 이렇게 섬세하게 기만적으로 서글프고, 부드럽게 탄식한다.

그러나 불안은 그 모습을 바꾸고 줄곧 뒤따라 다녔다. 재능을 더욱 갈고 닦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엇에 써먹자는 것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불행히도 나의 역할과 용도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영웅이 되고 싶다고 해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용기와 재주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퇴치할 뱀이 있어야 하고 괴물이 있어야 한다.

아홉 살이 되자 그는 가장 절망적인 노래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란 것을 읽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절망을 붙잡고 늘어지기로 했다. 재능도 싫어졌다. 만약 재능이 있다면 고민과 시련을 겪고 유혹을 물리치는 기쁨을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그는 성령과 이런 밀담을 주고받았다.

- 너는 글을 쓰리라.
- 당신이 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제가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까?
- 아무 특별한 점도 없다.
- 그러면 왜 하필 제가 선택되었습니까?
- 별다른 이유는 없다.

- 제게는 그나마 글을 쉽게 쓸 재주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 천만의 말이다. 너는 위대한 작품이 안이한 글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그러면 아무나 글을 쓸 수가 있는 겁니까?
- 아무나 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선택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뻔뻔한 성령과의 대화가 좋고 필요하다고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맘을 먹으면 재능 따위야 좀 더 있다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너는 최후의 영광을 얻는다’는 성령의 다정함에 놀라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 대화가 진실이라면 인생은 누구에게나 정신없이 진행될 것이다. 단테는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을 먼저 보여주고 그 다음에 활을 떠난 화살, 활시위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눈이 핑핑 도는 속도감에 놀란다. 이런 세계관 아래서는 우리도 이미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어느 정신과 의사에게 들은 일화가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정신병원으로 실려 왔다. 산부인과가 아니라 왜 정신과였을까? 만삭의 그녀는 분만의 순간에 ‘엄마 살려줘!’라고 외치는 대신에 이렇게 고함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나는 국모다! 나는 박정희를 낳을 것이다.” 사르트르도 비슷한 일화를 소개한다. 생트 안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제 침대에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왕이다. 나는 대공이다. 나를 체포하라.” 그러자 누가 귀에 대고 일렀다. “코를 풀어.” 그는 코를 풀었다. 그에게 물었다. “대체 직업이 뭐야?” 그는 온순하게 대답했다. “구두 직공.” 그러고는 다시 “나는 왕이다”라고 소리쳤다.

사르트르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이 사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 아홉 살 때 왕인 동시에 구두 직공이었던 것이다. (내 주변엔 자신은 장차 노벨상 수상자의 엄마 또는 물리학 천재의 엄마가 될 몸이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런 심각한 성격 장애와도 같은 시기를 어떻게 지내 보냈을까? 이십 년이 두 번 지나고 그는 이제 아득한 승리의 팡파레를 상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기다린다고 말한다. 매 순간마다 다음 순간을. 왜냐면 한순간은 항상 뒤따르는 시간을 끌어 당겼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차례차례 쏜 화살이라고 생각했다. 화살인 자신이 시간을 뚫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20년 전 어느 날 저녁 자코메티(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는 이탈리 광장을 가로지르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쓰러졌다. 부상을 당하고 다리가 뒤틀린 그는 기절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내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다른 어떤 삶도 바라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그 삶이 우연의 어처구니없는 폭력으로 뒤집히고 꺾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자코메티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조각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 것조차 아니었군. 나는 그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무엇이든 받아들이려는 의지에 탄복했고 무릇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지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님을 드러내 주는 그런 희귀한 벼락까지 좋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뜨거운 유년기를 지나 보낸 후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기대와 절망 사이가 그렇게 가까웠던 이유(맘만 먹으면 대략 3초 안에 나는 절망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현실의 자신과 꿈꾸는 자신 사이에서 그토록 우왕좌왕하기를 반복했던 이유, 수단과 목적을 그렇게나 혼동했던 이유, 타인의 기대를 그렇게나 갈망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존재는 우연이지만 그 우연은 또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중?후반부 내용은 몹시 절실하고 아름답고 인간적으로 기만적이다. 사르트르가 최후의 찬란한 영광을 기대하고 사는 동안에는 그에겐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저 스쳐 지나갔다. 경험은 체험이, 위험은 가짜 위험이, 불행은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는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이 그의 오만이요, 그의 비참이 되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죽음(가면을 쓴 종교나 다름없는)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어떻게 태어났든 다시 태어나도록 노력했고 자기 자신을 너무나 대견스러워하거나 안쓰러워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전투적이지 않은 낙관주의를 믿지 않았다,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현실을 직시하려 했으며, 교양은 누구도 구출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란 것, 인간은 자신의 산물 속에서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들이 무력하다 해도 우리들이 하는 일은 결국은 무슨 소용인가 된다는 것을 믿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자신이란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인간의 대표자라는 사르트르의 생각은 언제나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마지막 문장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다. 이 글이야말로 속속들이 인간적이다. 즉 한 인간이고 싶은 인간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보여주는 글이다.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더 이상의 행복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거의 행복하고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용기를 얻는다. 이 글은 나의 친애하는 후배가 회사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느라고, 자신이 좀비처럼 느껴진다고 말할 때 그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 써 본 것이다. 이 글이 아무런 위로도 도움도 될 수 없을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현실에 대해 갖는 아쉬운 감정, 그 쓰라린 감정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기계적인 감정은 무심한 감정이다. 순응주의자의 감정이다. 순응주의자의 감정은 반드시 공허함을 동반한다. 우리는 다가오지도 않은 일에 대해 아무런 성찰 없이 공포 속에 빠져든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공포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찬란하게 파괴시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찰 없이 꿈 없이 미래를 필연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흐릿한 밤거리의 불빛 아래서 어느 날은 그 불빛이 자신의 의지만큼이나 몽롱하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수동적인 인간인지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때 우리가 그리워해야할 단 하나는 희망이다. 우리가 호출하고 싶었던 과거의 꿈이란 다름 아닌 희망이다.

이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린 날의 그 구원받지 못할 열망은 아직도 우리 내면의 토속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나 자신의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우리의 갈망이 없이는 아무것도 빛나지도 새롭지도 않다. 우리의 좌절이 언제나 우리를 강하게 하기를, 안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빛과 밖에서 방황하는 두 빛이 조우하기를. 운명은 의지가 아니더라도 꿈은 너무나 선량하다. 꿈이 그토록 선량하기 때문에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오지 않은 일을 꿈꾼다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보려는 것은 이미 과정 속에서 길 위에서 우리를 새롭게 한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빛은 언제나 나의 밖, 세상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짧으므로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꿈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의지를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앙리가 몸소 보여줬다. 그 밤 계단을 내려온 앙리는 어느 집 앞에서 구슬프고 외설적으로 라 팔로마를 불렀고 그리고 기적처럼 2층의 창문이 열렸다. 회색 머리칼을 가진 글래머 여인이 상체를 창밖으로 내밀고 휘파람으로 순식간에 그를 불렀다. 그는 훈련받은 개처럼 올라갔다. 그때 나는 앙리의 보라색 조끼 등판에 그려 있는 빨간 대형 하트 무늬를 보았다. 갈망은 이런 촌스러운 무늬 위에서도 결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미래로부터 시간 여행자가 한 명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긴다.

“당신들은 우리를 져버릴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우릴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삶과 시간이 주어진 동안 싸우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 시대의 사람들 어느 누구도 싸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워야만 존재하고 또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일어난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찾아온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래란 결국 현재가 끌고 오는 다음 순간이며 현재는 개인적인 영원이며 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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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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