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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있었던 남자

숫자 6을 닮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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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종양이 6년은 됐을 거라고 했다. 지름이 6센티미터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대로 두면 죽을 수 있다고도 했다. 가끔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한 움큼씩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던 남자는, 자신에게 이런 병이 올 거라고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머리가 아닌가.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바로 ‘그 머리’. 사실 그건 상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여자에게서 오른쪽의 세계가 증발했다. 립스틱은 늘 왼쪽에만 발라져 있고, 화장도 왼쪽만 한다. 그녀가 파이를 먹는다. 하지만 늘 배고픔을 느낀다. 그녀가 먹은 건 늘 파이의 반쪽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기 위해 회전하는 휠체어를 마련해준다고 해도 결국 그녀는 음식을 다 먹지 못한다. 4분의 1이 시야에 오도록 한 바퀴를 돌린다고 해도 나머지 16분의 1은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세계로 영원히 복귀하지 못할 제논의 화살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병명은 ‘편측실인’이다.


우연히 만난 한 남자 얘기로 시작하고 싶었다. 책에 대한 칼럼이지만 어떤 날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머릿속에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있었다고 말한 이 남자는 CT에 찍힌 종양 사진이 검정 바탕의 숫자 ‘6’처럼 보였다고 했다.

“의료용 판독 사진은 울퉁불퉁한 검은색 바다처럼 보였어요. 달의 뒷면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지구가 아니라 우주의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었어요. 눈앞이 하얘지고, 몸의 중심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그냥 멍했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진공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의사는 종양이 6년은 됐을 거라고 했다. 지름이 6센티미터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대로 두면 죽을 수 있다고도 했다. 가끔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한 움큼씩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던 남자는, 자신에게 이런 병이 올 거라고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머리가 아닌가.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바로 ‘그 머리’. 사실 그건 상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멍 난 머리. 붓기가 덜 빠져 페이스트리처럼 부풀어 오른 축축한 두피에는 아직 빠지지 않은 뇌척수액이 고여 있었고, 걸을 때마다 그 머릿속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오랫동안 우주정거장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지구로 귀환한 뒤에도 후유증 때문에 여러 가지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겪죠. 무중력상태에 적응했던 몸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따른 문제들인데, 돌이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우주정거장의 초대선장이었던 차르 콘래드는 지상으로 귀환한 뒤에 유리컵을 스물일곱 개나 깨뜨렸다는 기록을 남겼죠. 정거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공중에 물건을 놓아버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망연히 바라보곤 해요. 마법이 끝났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죠.


나는 소설가 정한아의 『달의 바다』를 떠올렸다. 수많은 경쟁을 물리치고 우주선에 탑승해 ‘달’로 가기 위한 특수 훈련을 받는, 우주 비행사들의 훈련 장면을 말이다. 남자는 걷다가 종종 걸음을 멈췄다. 귓속에선 계속 물소리와 들렸고, 시야는 좁아졌다 넓어지길 반복했다. 늘 걷던 길은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듯 점점 낯설어졌다.

“머릿속에 작은 시냇물을 저장하고 다닌다고 상상하면 어떨까요?”

바보 같은 말이었지만, 남자는 내 얘길 들어 주었다. 당신의 수술은 아주 먼 우주로의 여행이었고, 당신은 이제 막 귀환한 우주 비행사라고, 그래서 잠시 이 지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위로가 될 거란 생각보단 어떤 말이라도 해 주어야만 했다. 남자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갓 뽑은 백설기보다 말랑말랑해진 머리 때문에 한시도 모자를 벗을 수 없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술을 마친 후, 남자는 곁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더 명확히 보였다고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에도 인생이 짧다는 것과, 타인의 섣부른 시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선 안 된다는 것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했다. 잠시, 시냇물 속에 작은 물고기들과 흐늘거리는 수초가 평화롭게 헤엄치는 상상을 했다. 그 역시 고단하게 잠든 밤, 나와 같은 꿈을 꾼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 벌어지나 봐요. 정말 천사 같은 친구였는데, 헤어지기 일주일 전에 여자 친구가 꽤 비싼 카메라를 빌려 갔어요. 제가 입던 재킷을 가져갔고, 제가 끼고 있던 팔찌를 가져갔고, 제가 쓰고 있던 모자도, 또 다른…….”

여자는 뭔가 작정한 듯 남자에게서 몇 가지 물건들을 가져갔다. 차마 돌려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남자는 침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자가 연애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단지, 강아지나 고양이를 빌려 갔더라면 난감했을 거라고, 가끔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남자는, 자신은 아직까지 헤어지는 방법에 대해 배우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어째서 실연의 경험은 차곡차곡 쌓여 커다란 지혜가 되지 않는지 말이다.

남자는 지금은 떨고 있는 자신을 잡아 줄 따뜻한 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잠시, 헤어진 여자 친구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잊고 싶어도 거대 포털 사이트에 이름 석자만 치면 사진이 뜨고, 기사가 올라오는 놀라운 인생 말이다. 그건 참, 몹시도 잔인한 일이라, 익명 속에 숨어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보통의 사람으로선 견디기 힘든 일이란 걸 깨달았다. 어쩐지 그의 차가운 손을 잠시나마 잡아 주고 싶었다. 연애란 그런 것이고, 사람은 어쩜 그런 고통의 축적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사심 없이, 표정 없이, 웃으면서 말하고 싶었다.

영국 런던에는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무척 독특한 도서관이 있다.

이 기묘한 이름의 도서관에선 책을 대출해 주는 대신, 사람을 대출해 준다. 대출 시간은 30분. 게이, 싱글맘, 우울증 환자, 레즈비언, 여자 소방관, 완전한 채식주의자 등 다양한 직업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서가에 꽂힌 책처럼 의자에 앉아 있다. 우리 주변에 존재했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이력 때문에 오해의 시선을 받아 온 사람들이다. 이 도서관에 온 사람들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해 책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지금까지 ‘리빙 라이브러리’에 단골로 등장한 책들은 동성연애자와 경찰관, 노숙자와 환경주의자였고,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트렌스젠더’였다.

독서가에게 책에 밑줄을 긋고, 맘에 드는 책 귀퉁이를 꾹 접어놓는 행위는 일종의 매혹적인 의식이다. 읽고 싶을 만큼 특별한 사람의 인생에 밑줄을 긋고, 접혀져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내면을 읽는 일.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도서관의 존재는 어느 모로 보나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틈만 나면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에 나오는 ‘리빙 라이브러리’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행사가 열린다면, 기꺼이 나도 한 권의 책이 되어 나를 대출해 간 사람과 소소한 경험들을 나누고 싶었다.

가령 내가 ‘13년 동안 수없이 문학 공모에서 낙방했던 작가’ 섹션에 꽂혀 있으면 그럭저럭 내 실패의 경험을 자꾸만 떨어져서 마음이 오그라든 누군가에게 전수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뭐, 그런 생각들. 나는 늘 성공담보다 누군가의 실패담에 훨씬 더 귀를 기울였고, 지금도 성공에서보다 실패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 6을 닮은 그 남자는 혼자라 외로웠던 수술과 헤어진 여자 친구, 고마운 친구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진 반짝이는 삶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머릿속에 늘 시냇물이 흐르는 이 남자의 목소리는 물기 어리고, 촉촉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몇 번이고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었다. 남자가 들려준 몇몇 문장은 늑골 어딘가에 깊숙이 넣어 두고 싶어졌다.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어요. 한번 들어 볼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남자를 260페이지쯤 읽어 내려갔을 때, 나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150페이지쯤으로 돌아가, 남자에게 아까부터 참고 하지 않았던 말을 꼭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잘 헤어졌어요. 어쨌든 좋은 사람이 지금 막 걸어오고 있는 중일 테니까. 눈에 보여요.”

나의 근거 없는 낙관이 웃겼는지, 어설픈 위로가 유쾌했는지, 남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음악을 틀어 주었다. 루시드 폴의 「고등어」였다. 좋아하는 음악 취향이 우연히도 비슷했던 우리는 ‘루시드 폴’과 ‘재주소년’, 라디오 헤드의 리드 보컬인 ‘톰 요크’에 대해 얘기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들어가 남자에게 읽어 주고 싶은 책 구절을 찾아냈다.「고등어」를 들었으니 「어머니와 고등어」를 부른 김창완의 글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창완 아저씨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책 속의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마치 나 자신이 한 권의 책이 된 것처럼 나른하고, 10분 후 기어이 잠이 들어 버릴 몹시도 졸립고 혼곤한 목소리로……. 잠시, 지금의 낭독이 노래처럼 들리면 좋겠다 싶었다. 정말…….

아, 어저께는 너무 좋은 시를 발견했어요. 자크 프레베르의 시인데요.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이라는 시입니다.

우선 문이 열려 있는 새장을 하나 그리세요.
그리고 새를 위해 단순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그리세요.
그 다음엔 그림을 나무에 걸어두세요.
새가 빨리 날아올 수도 있고
어쩌면 몇 년이 걸려서 올 수도 있어요.
새가 날아왔을 때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새가 새장 속에 들어가면 붓으로 문을 그리세요.
붓으로 창살을 지우고
나뭇가지를 그리세요.
새가 노래를 하지 않는다면 잘못 그린 겁니다.
새가 노래를 하면 그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 구석에 사인을 하세요.


아, 잠이 다 깨네요. 저런 시들을 보면 살고 싶어서 큰일이에요.

비 오는 어느 날, 황인숙의 시를 읽고, 나도 문득 살고 싶어진 기억이 났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팅!팅!’
그도 나처럼 이 시를 읽고, 살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머릿속에 들리는 시냇물 소리가 아니라,
산속의 어느 개울가에 앉아, 그림자 없이 싱싱한 햇살을 맞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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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영옥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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