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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주목하라] ③ “잠시 시간 있으세요? 시의 매혹을 나눌 시간” 섬세함을 짚어 주는 시인 - 김경주

“시적인 느낌을 가지고, 형식적인 것에 갇히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퍼져 운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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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김경주의 언어는 심지어 종이 위에 갇히지도 않는다. 무대로, 강의실로, 음악 위로 활개 친다. 그는 기획자이고, 연출자이고, 때로는 편집자이기도 하며,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무경계 펄프 문화 연구소 ‘츄리닝 바람’의 연구 소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경주를 상상해 보자

글을 읽으며 글쓴이를 상상하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상상에 그치지 않고, 상상의 인물을 실제로 만나는 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떨리는 일이다.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건 간에, 어떤 글은 글 뒤에 숨어 있는 작가의 모습을 어렴풋이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글은 부러 감추고 있기도 했다. 김경주의 시집과 에세이와, 그에 대해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을 읽으면서 떠올린 작가의 모습은 하나의 형체로 쉽게 수렴되지 않았다. 모든 언어는 하나의 단서가 되어, 퍼즐 조각처럼 단편적인 모습만 내보였다.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는 이례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기담』(2008), 『시차의 눈을 달랜다』(2009)를 펴냈고, 작년에 발간한 시집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특유의 감각과 감수성을 머금은 그의 언어들은, 어떤 형식에도 갇히지 않은 채 독자와 평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난해하다’ 혹은 ‘형식 파괴적이다’라는 말이 따르긴 하지만, 그의 시들은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찬사를 받아 왔다.

그뿐이랴. 젊은 작가 김경주의 언어는 심지어 종이 위에 갇히지도 않는다. 무대로, 강의실로, 음악 위로 활개 친다. 그는 기획자이고, 연출자이고, 때로는 편집자이기도 하며,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무경계 펄프 문화 연구소 ‘츄리닝 바람’의 연구 소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적인 느낌을 가지고, 형식적인 것에 갇히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퍼져 운동하고 싶다”는 말마따나 그는 언어와 몸을 계속 운동시킨다. 일례로 김경주는 ‘주성치 축구단’의 (8년 차) 회장이고, ‘탐험가’ 수준의 프로 여행가이다. 여행 산문집 『패스포트』의 루트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15만 원짜리 상선을 타고 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6개월 횡단하고, 얼어붙은 겨울 바이칼을 거쳤다가, 고비 사막을 건너서 중국으로 배타고 돌아온 여정”이었단다.

그는 마치 남들의 두 배쯤의 시간을 사는 것처럼 많은 글을 쓰고, 공연을 올린다. ‘츄리닝 바람’이라는 둥지에서 활동하지만, 그러면서도 내내 유랑하고, 나와는 다른 시차 속에 살고 있는 듯했으며, 바람처럼 미세한 흔적만 남긴 채 떠도는……. 그렇다. 은밀함이라는 초기의 감상에서 시작된 김경주 ‘상상하기’는 점점 ‘환상하기’의 영역으로(그러니까 ‘산으로’) 가는 듯했다. 시 역시 그랬다. 정확한 지점보다는 희미한 경계를 딛고 있는 시들은(이를테면 ‘나비의 입술과 닮은 단어가 있고 봄에는 그게 누구라도 입술만 생각하다가 보낸다 내가 책장 사이에 접어 놓은 나비는 모두 돌림병을 앓다가 물 묻은 색종이가 된 것 같아’) 은밀함을 더욱 부추겼고, 그의 언어는 쓰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제자리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그의 시와 상상 속에서 헤매던 중에 드디어 인터뷰 일정을 잡았고, 그를 기다렸다.

이야기는 최근 그가 다녀왔다는 ‘여행’에서 출발했다. 자칭 ‘잘 훈련되어 있는 입담’이라, 한 가지 질문에도 이야기를 너울너울 쏟아 냈는데, 여행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연극으로 맺어지고, 연극 이야기가 때로 시인의 이야기로 흘러들어 가기도 했다. 여행, 시차, 연극, 용기, 시인…… 등의 키워드는 김경주가 내뱉은 말의 길목에서 서로 여러 번 마주치고, 또 이어지기도 했다. 그와 나눈 짧지 않은 이야기들로, 김경주를 상상하는 퍼즐 놀이를 제안한다. 먼저, 몇 개의 키워드를 띄운다. 이것들이 그의 시의 숲을 헤쳐 나가는 작은 랜턴 정도는 되어 주지 않을는지. 그의 시로 진입하는 길목 하나 발견할 수 있으면 되겠다. 그를, 상상해 보자.


삶은 끊임없이 여진을 앓는 일

Keyword 1: 여행…… 시차…… 그리고 패스포트


중국 다녀오셨다고요. 이번 여행은 어땠어요?

“여행은 사실 호불호가 없어요. 워낙 자주 다니니까. 일 때문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요. 일로 인한 독을 빼내는 항생제를 맞는 거죠.(웃음) 제가 다니는 길에는 관광 코스가 거의 없어요. 직업이 탐험가였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이번에는 티벳 호수에 조립형 카약을 들고 갔어요. 거긴 8월에 다시 갈 것 같아요.”

남들 안 가는 코스는 어떻게 꾸리시는 거예요(웃음)?

“여행은 정보 싸움이잖아요. 오래전부터 여행을 해서, 15년 동안 쌓아 둔 것들이 있고, 여행 친구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이전에 김근 시인이 김경주 시인에 대해 쓴 글에서 ‘그는 여기 자주 없고’라는 표현을 썼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다 싶었어요. 내내 작가님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신호음을 들을 때마다 실감했죠.

“주변 사람들은 알죠. 또 떠났구나. 연락은 거의 메일로 하는데.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해요. 그렇게 자주 떠돌아다니면서 어떻게 일을 많이 하나. 와서 집중적으로 일을 하고, 일 년에 4개월 정도 나가는 식이에요. 올해는 많이 지쳐서 일을 좀 줄이려고 해요.”

여행 산문집 『패스포트』의 성격이 흥미로워요. 여행기인데도 여행지 자랑은 별로 없고 사유로 가득하잖아요.(웃음) 여행의 여진을 정리한 책이 아닐까 싶은데, 작가님에게 『패스포트』는 어떤 책인가요?

“특정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 자체가 뭔지 묻는 여행기를 쓰고 싶었어요. 패스포트(passport)를 책 속에서 ‘나그네의 문서’라고 정의했어요. 영어로는 ‘지나간다’는 뜻이지만, 여권이라는 게 나그네 ‘려’ 자에 문서 ‘권’ 자를 쓴 말인데, 정말 매력적이잖아요.

여권이라는 것은 한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건너가는 다리 같은 것이고 한 공간과 한 공간 사이에서 부유하는 사람들이 시간에 찍고 가는 발자국 같은 것이다. 때로 발자국은 유령처럼 시간의 표면에 안 찍힐 수도 있다. 어딘가로 다녀왔던 자신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자신이 유령인 것처럼 생각될 때 그런 우리의 생을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생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여권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나의 질서이지 타인의 질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그네(餘)의 권리(權)이다.(p.47)

어느 지역에서 여행을 하고 오면, 한참 후에 여행지가 다시 밀려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여행지에서는 글 작업을 하지 않아요. 이 책도 여행 후 돌아와서 정리한 글들이에요. 여행의 매혹은 그런 여진, 멀미를 감당하는 일이죠. 여행은 시차를 겪는 현상들이거든요. 시차가 날짜 변경선과 시간 변경선을 지나가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감정의 현상이기도 하다는 거죠. 어떤 과거의 어린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시차가 다르기 때문에 겪는 울렁증이에요. 여행만큼 직접적으로 시차를 겪는 현상이 없다고 봐요. 더 간단히 말하면…… 여행이란, 낯선 도시에 가서 똥을 누고 오는 행위죠.(웃음)”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하셨어요? 시인에게 여행의 의미가 있다면요?

“저는 어릴 적 자습 시간마다 항상 즐겨 보던 책이 『사회과부도』였어요.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책이었는데, 정작 담당 선생님은 없었죠. ‘왜 사회과부도만 선생님이 없을까?’ 늘 고민했었는데.(웃음) 독학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어요. 보고만 있어도 너무 설레는 거예요. ‘야! 지구상에 정말 이런 곳이 있단 말이야?’ 글을 쓰거나 예술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에게 낯선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결국 자신의 언어가 자연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 자연 속에서 자신이 빚어 낸 생태계를 가꾸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자기 언어가 자기에게 익숙하고 편해지는 것은 근육이 붙는 느낌과 다르게 자기 감염, 자기 번식이 될 수 있어요. 그럴 땐 과감하게 새로운 언어를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죠. 그런 측면에서도 여행이 의미가 있죠. 여행도 여진이 밀려올 때가 힘든 것 같아요. 누구는 그걸 그리움이라고 불러요. 우리 육체가 기억을 복원하고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의 삶은 기억의 끊임없는 여진을 앓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시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질감인 거죠.”


길을 떠나다 보면 으레 한두 번은 멀미를 겪게 된다. (…) 그때마다 멀미는 나를 고약하게 괴롭혔지만 그렇다고 내 몸을 미워해본 적은 없었다. 멀미는 길 위에서만 겪는 시간의 어지러움이었고 그 길을 향해 내가 던졌던 물음들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향할 때마다 여행은 멀미를 동반했다. 멀미는 생이 출현하는 방식이었고 생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p.212)

이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공간을 늘 ‘공항’이라고 얘기하시죠.

“네. 지금도 따분하고 지루하면, 인천 공항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와요. 공항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뿐이잖아요. 빈 여행 가방을 들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면 기분이 되게 묘해요. 게다가 24시간 버스가 있잖아요.(웃음) 언제든지 갈 수 있죠. 더 재미있는 건, 공항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요. (자기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길들을 상상하기만 하죠. 작업실 이름도 ‘나는 공항’이에요.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인데, ‘I'm airport’도 되고, ‘Flying airport’도 돼요. 많은 비행기들이 나를 거쳤다 떠나는 공간이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공항이기도 한 거죠.”

『패스포트』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고 한다면, 결코 한번에 쭉 읽을 수 없다는 거예요.(웃음)

“그건 모든 책에서 제가 노리는 거예요.(웃음) 작가가 시집 한 권을 내면 3년 걸리는데, 독자가 3시간도 참여하지 않으면 ‘난 못 준다’, 장난말로 하면 그런 거죠.(웃음) 그날의 여정을 느리게 감당했기 때문에, 그 속도감을 독자가 조금이라도 맞추려고 해야 함께 젖어 가는 것 같아요. 내가 느꼈던 여진을 같은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 주는 거죠. 누구나 운동을 시작할 때 몸이 뻐근하잖아요.

한 책마다 작가의 고유한 운동법이 있어요. ‘어, 보통 역기는 이렇게 드는 건데, 이 작가는 이렇게 들고 있네?’ 처음엔 어색하죠. 그런데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듬감이 생겨요. 그걸 따라가다 보면, ‘은근히 이것도 되게 재미있네’ 싶은 거죠. 이런 것을 제공해 주는 게 문학의 다양성이고, 고유성을 즐기는 방식이에요. 모든 글은 작가의 호흡이잖아요. 그 호흡을 받아 마시는 거거든요.”


‘패스포트 2’도 나온다고 들었어요.

“올해 여력이 되면 2권이 나올 것 같아요. 예전에 3등칸만 타고 지중해를 다 돈 적이 있어요. 그걸 ‘3등칸 항해기’로 쓰려고요.(웃음) 지중해의 물결을 담고 싶었어요. 그때 녹음을 많이 했어요. 부제가 ‘트래블 보이스 레코딩’인데 그동안 담아 왔던 소리들을 풀어내는 거죠. 저는 ‘what’보다 ‘how’가 항상 중요한 것 같아요. 어디의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다녀왔는지. 그래서 2권도 How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거예요.”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 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 때문이다.
- 「비정성시」 중 (p.146)


시의 매혹,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해

Keyword 2: 공간…… 연극, 그리고 소통

김경주 시에서 공간 개념이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몸의 공간성은 여행으로 확장하고, 시의 공간성은 언어로, 연극으로 빚고 있는 것 같아요.

“문학을 처음 하는 친구들은 시간에 대한 인식이 강한 데 비해 상대적으로 공간에 대해 소홀한 게 있어요. 저도 그랬고.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공간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잖아요. 당연히 방이라고 생각을 하지, ‘나는 방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 문학은 이미 방부터 묘사가 되어야 하거든요.

연극을 하면서 공간에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기억이 들키는 곳은 시간보다 공간인 것 같아요. 과거에 어떤 모습을 떠올릴 때 공간이 먼저 떠오르고, 시간이 떠올라요. ‘아, 그때 거기에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희곡을 쓰는 일은 공간 자체를 쓰는 일이라, 입체적인 상상력을 줘요. 시간도 중요하지만, 시공간의 균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죠.”


‘시인 김경주’가 쓰는 연극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새로운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려운 것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처럼 낯선 감각을 입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건가요?

“다양한 희곡들이 공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희곡 작업을 하고 있어요. 연극을 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극의 매혹은 어떤 상황을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거든요. 지금 무대에 올라오는 이야기들과 다른 상황에서 출발하는 연극을 해보고 싶었어요. 처음 연극에 매혹을 갖게 했던 부조리극, 이미지극은 요새 보기도 힘들잖아요. 그런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전에 짧은 극을 보았는데, 대사보다도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기존의 희곡에서 보기 드문, 이미지성이 강한 지문이라 그렇지, 특별히 이미지에 천착하지는 않아요. 희곡은 굉장히 탄탄한 플롯을 요구해요. 희곡이 플롯 없이 이미지만 간다면 그것은 희곡이 아니죠. 기본적인 플롯 위에, 개연성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딱 보여 주려고 하기보다는 프로세스가 점차 지워져 가는 과정을 보여 주려고 해요. 그게 더 매혹적인 것 같아요.”

최근에 통영 국제 음악제도 참여하셨잖아요. 음악극 <에코>를 선보이셨죠. 그 작업은 어땠나요?

“2년 전에 신나라 작곡가가 작업 의뢰를 해서 하게 됐는데, 음악극 대본 작업이었어요. 세계 초연이었고요. 외국에서는 음악극이 많이 양성화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죠. 음악극이 나온 게 2차 세계대전 이후예요. 현대 음악은 계속 변하고 있는데, 오페라는 만날 사랑 타령만 하고 있으니까, 음악을 담아 줄 새로운 그릇으로 음악극이 생겨났어요. 음악극 안에 오페라적 요소뿐 아니라 소프라노, 오케스트라도 있고, 이미지와 내러티브도 있고, 영상도 들어가는 복합 문화 형식이라, 챔버 오페라라고도 불러요. 되게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반응은 어땠어요?

“항상 제가 하는 작업의 반응은 극과 극이에요.(웃음) 한번 할 때마다 관객이 15명씩 나가더라고요. 30분을 못 견디고.”

어떤 장면에서 사람들이 나가던가요?(웃음)

“2막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을 달래는 넋 굿을 하는데, 남자 배우가 부음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 데서 나가는 거죠.”

예상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반응도 있을 수 있겠다’ 하는.

“그렇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영화, 소설 장르의 서사는 개연성에 입각해 있잖아요.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결과가 나오겠지. 결과를 찾다 보면 원인이 나오겠지’ 싶은 심리적? 믿음의 근거가 있어요. 그래서 편하고, 어려워도 견디는 지점들이 있는데, 반대편에 있는 시, 무용이나 연극, 마임 이런 장르는 (서사나 개연성이) 혼재되어 있어요. 조금 더 능동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죠.”

그런 익숙하지 않은 지점에서 소통이 안 된다, 공감이 안 된다는 말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특히 사람들이 시집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데, 시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독자들이 서사나 플롯 위주의 방식, 개연성에 지나치게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들이 불편한 거예요.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그런데 이 세상에 어느 시인이 독자를 무시하기 위해 글을 쓰겠어요. 좀 더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한데, 그 참여라는 건 시간성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시를 빨리 읽는다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그렇게 시간과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독자는 당연히 불편해 할 수 있죠.

그렇다고 해서, 플롯의 반대편에서 작업하는 친구들이 수위를 낮추거나, 교감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교집합을 넓혀 주면 과연 독자들이 올 수 있을까?, 저는 의심이 들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산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겠지만요. 근본적으로 모든 예술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독자들이 상징이 강한 장르들을 접할 때 그 상징을 즐기려고 한다면, 충분히 작가나 예술가들이 주려고 하는 매혹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의 매혹을 즐기기 위해서는, 소위 말씀하시는 ‘느낌표 공동체’가 되라는 거죠?

“네. 세상이 마침표를 찍는 ‘마침표 공동체’를 이뤄 가고 있다면, 어떤 대상에 대해 ‘느낌표’를 찍고자 하는 집합체가 시죠. 자기가 그 느낌표를 가져가면 되는 거거든요. 문화는 이해보다는 느낌, 감의 세계잖아요. 현대 시인들이 난해해지고, 미시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다양성이 악이 돼서는 안 되는 거죠. 난해하다고 해서 나쁜 것이 돼서는 안 되죠. 수학이 난해하다고 나쁜가요? 우리가 나사 항공 직원들의 공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나쁩니까? 그런데 예술가들에게는 난해하면 나쁘다고 해요. 소통을 안 한다고.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가요. 예술가들은 자가용을 모는 사람들이에요. ‘네가 내 차에 탔으면, 내 목적지까지는 데려갈 테니까, 혹시나 울렁거림은 감수를 해라. 창밖에 새로운 풍경도 좀 보고, 믿고 가보자’라는 거죠. 작가가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물론 지불한 돈에 대한 어떤 가치를 환원 받고 싶은 심리적 기대감은 이해하지만, 작가들이 생각하는 공감은, 대중을 의식하기보다는 인간을 의식한 거예요. 인간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고려하는 사람들이에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중요한 공감이 이뤄지는 것 같아요.

어떤 시집이든 간에 그것을 읽은 상대는 이미 어딘가로 건너갔거든요.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건너간 건 사실이거든요. 그 운동성 자체는 서로 간에 공유가 되어 있잖아요. 그 운동성을 공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교감을 한 거죠. 이미 어딘가로 건너갔으니까요.”


그런 소통의 느낌이 와 닿을 때가 있나요?

“공감의 방식은 다양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대로 공감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거기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요. 심지어 불편해 하고 힘들어하고, 화를 내는 것도 공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읽었다는 거니까.(웃음)”

소통에 관한 얘기들 중에 아쉬운 점도 있으시죠?

“제가 소통을 안 하려 한다고 얘기하는데, 저만큼 열심히 낭독회를 만들고, 공연을 올려서 텍스트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오히려 격려받아야 돼요.(웃음) 만날 텍스트만 가지고 불친절하다고 하지만, 제가 『기담』을 불친절하게 쓰고 그냥 놔두었냔 말이죠. 만나는 방식을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다녔는데.(웃음)

락 밴드 친구들이 앨범을 만들면 순회하면서 공연하잖아요. 작가도 책을 냈으면 ‘독자가 알아서 해라’는 고답적인 자세보다는 계속해서 만나게 하는 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문학의 풍토가 확장되는 게 아닌가. 그런 노력을 하는 작가들을 칭찬을 못 해 줄망정 비난하는 것은 굉장히 경직된 자세라고 봐요.”



일당 천만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야

Keyword 3: 디테일과 감수성…… 그리고 츄리닝 바람

언어에 느낌표를 찍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딱히 ‘다른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작은 기호의 차이부터 출발을 해요. 삶 속에서 저만이 볼 수 있는 눈들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제가 좋아하는 질감을 안 놓치려고 노력하고. 굉장히 은밀한 언어들을 찾으려고 하죠. 은밀하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이의 틈, 대상과 대상 사이에 있는 것을 말해요. 희미한 듯하면서 선명하다든지, 선명한 듯하면서 희미해지는 대상이요. 그런 것이 기억, 추억, 사물 속에 굉장히 많죠.

제가 최근 <씨네 21>에 연재하고 있는 글이 「김경주의 섬세함을 옹호하다」예요. 작은 섬세함과 디테일에서 때로는 전체를 볼 수도 있다는 믿음, 의지, 용기가 예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디테일한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이 예술가들을 존중하고 격려해 주는 지점이 하나 있다면, 그들의 섬세함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의 학식, 그들의 총체성, 바운더리는 아닌 것 같아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섬세함 하나 만큼은 나쁘건 좋건 배려해 주려고 하죠. 그래서 예술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요. 예술가들은 자신의 섬세함을 끝까지 옹호할 수 있어야 해요.”


디테일을 발견하는 감수성이 중요하겠네요.

“문학을 시작하려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재능의 문제를 탓하지 말고 용기의 문제를 탓해라. 재능이나 용기도 없어도 좋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갖고 가야 한다. 계발해야 한다. 감수성이다.’ 서울의 인구가 천만이잖아요, 서울에서 예술을 하려면 일당 천만의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돼요. 천만 명 중에 한 명밖에 나올 수밖에 없는 감수성을 내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돼요. 그거는 1등이라는 게 아니라 뛰어난 게 아니라, 나밖에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거죠. 그것도 없이 어떻게 시작해요. 감수성을 가꾸려면, 여러 가지 채집을 해야 돼요.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잡지를 보고 책을 보는 것은 남들의 감수성을 채집하는 거예요. 그런 훈련들을 계속해야지, 자기가 예민하고 민감하기 때문에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일 수 있어요.”

감수성도 훈련이 필요하겠네요. 작가님은 어떤 훈련을 하시나요?

“강연을 할 때나 ‘츄리닝 바람’ 식구들과 많이 하죠. 감수성 훈련은 독학으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저만의 매뉴얼이에요. 굉장히 효과를 보는 친구도 있고, 저를 빙의하는 친구도 있어요.(웃음) 저 스스로도 그런 훈련을 해요. 여행에서 녹음하는 여행법을 만든다거나, 어느 방을 옮길 때마다 항상 욕조가 있는 집을 찾으려고 하거나. 욕조가 갖고 있는 질감이 집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이라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소리, 음악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요. 이런 것들이 사람을 견디게 해 주는 것 같아요.”

나는 욕조에 들어가서 평상시 나의 집에서처럼 앉아 있어본다.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물담배를 한 대 피운다. 등단을 한 후 야설 작가와 대필 작가를 전전하면서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집에 욕조를 하나 갖는 것이었다.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따뜻하고 편안한 물의 질감의 한가운데로 가라앉히는 상상을 하면서 그 시절을 견디곤 했다. 그때 내게 사막은 따로 있질 않았다.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욕조에 들어와보니 사막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거대한 욕조 같다는 생각이 든다.(p.97)

섬세함을 옹호하는 집단을 계속 만들어 오셨어요. 독립영화사 ‘청춘’이 그랬고, 지금의 ‘츄리닝 바람’도 그렇죠.

“가까운 사람들과의 작은 커뮤니티를 좋아하고, 예술이라는 건 등 토닥거릴 수 있는 몇 명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우리끼리 말로, ‘우리는 6두품이다’ 해요.(웃음) ‘진골도 아니고 성골도 아니기 때문에 갑신정변을 일으키든 삼일천하를 하든 우리끼리는 즐거우면 된다’는 말을 해요. 저는 이 안에서 항상 코미디언에 가까운 희극지왕 캐릭터예요.

저뾽 축구단 회장을 8년 했는데, 축구팀 이름이 ‘주성치 축구팀’이에요. 주성치를 굉장히 좋아해요. 주성치 영화를 보면 희극과 비극이 섞여 있어요. 다른 배우들이 폼 재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을 때 주성치는 늘 망가진 캐릭터였지만, 찰리 채플린, 짐 캐리, 잭 블랙, 주성치, 이 네 명은 30년 가까이 자신의 코믹 철학을 외도하지 않고 해 온 사람들이라고 봐요. 그들은 비주류였지만, 자기 색깔을 잃지 않은 친구들이에요. 그런 주성치에 대한 오마주 때문에 주성치 축구팀을 꾸렸어요.”


커뮤니티가 지속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돈 문제도 있고, 관계 문제도 있고. 어떠세요?

“굉장히 어렵죠. 기본적으로 다 친구 개념으로 출발해야 되고, 욕심을 버려야 돼요. 저도 그래요. 항상 만들었다 깨지고, 만들었다 깨지고를 반복하는 거죠. 언젠가 또 설렘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또 헤치게 되겠죠. 우리가 무슨 하나회도 아니고.(웃음) 같이 많이 웃자, 즐거운 작업을 같이 하면 된다, 이런 거죠.”

단체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나요? 예전에 몰랐는데 알게 된 것이 있다면요?

“오래하면 안 된다. 뭐든지.(웃음) 항상 함께 만드는 고아원이라고 생각해요. 어디론가 입양되어야 한다.(웃음) 자기가 스스로 입양되었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나가는 거죠. 새 아비를 찾아, 새 부모를 찾아서. 동정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고아원은 굉장히 쓸쓸한 곳이지만, 환경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했던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움직이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좋은 곳이 될 수 있죠.”


시가 짧아야 된다는 생각, 해본 적 없었다

Keyword 4: 시인과 용기

이전에 ‘향긋한 북살롱’ 행사(☞ 보러 가기)에서, ‘시인은 뭔가? 어떤 건가?’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이 시대에 글을 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과거처럼 혁명을 시도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저항성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런 고민 중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걸 떠나서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시를 쓴다는 건 이 시대에 굉장히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일단 이렇게 미디어와 영상이 발달한 시대에 문장으로 세상과 승부를 하겠다고, 20평도 안 되는 문장으로 세상과 ‘맞짱’을 뜨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용기 없이 시작할 수 없는 일이죠. 한량이 되려고 시인되려는 사람은 없으니까,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견뎌야 할 점이 많죠.

오늘날까지 시인 이상(李霜)을 존경하고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그의 시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 시대에 그런 시를 쓸 수 있었던 용기를 격려해 주는 건 아닐까 싶어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많은 때에, 그런 시를 썼다는 건 대단한 용기죠. 지금도 자본의 메커니즘 때문에 시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잖아요. 지금도 시를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죠.”


작가님도 처음부터 문학청년은 아니었죠? 어떻게 용기를 내셨나요?

“저는 좀 반골 기질이 있었어요.(웃음) 25살에 제대를 할 때까지, 굳이 문학적인 삶이었다고 한다면, 연애편지를 쓴 것 정도?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간 친구들이 바윗덩어리 위에서 원고를 쓰고 있으면요, 뒤에 가서 뒤통수를 때리며 ‘뭘 바윗덩어리 위에서 쓰고 있냐?’고 놀리던 장난꾸러기였죠. 그러다 제대를 하고, 뭘 하고 살까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 제 학점이 선동률 방어율이었는데, 0점 몇.(웃음)

그때 연극하는 친구들이 폐교에 모여서 연극 연습을 하는데, 그 무모한 열정이 근사해 보였어요. 저들을 저렇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뭘까? 그렇게 기웃거리다가 연극을 하게 됐어요. 그때 문학 동아리를 하던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너도 들어와라. 일기라도 고급스럽게 쓰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굉장히 그 말이 자존심에 상처를 줬어요.(웃음) 나는 문학이라는 데에 목숨을 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런 친구들을 탐색하고 기웃거리게 됐죠. 마침 그때 오랜 짝사랑이 거의 끝날 무렵이기도 했어요. 짝사랑을 하다 보면, 그윽하잖아요. 그런 걸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고시 공부하듯이 독학했어요. 혼자 하면서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 무시한 발언이 저를 쓰게 한 셈이죠. 하다 보니까 이게 나하고 맞는구나, 싶기도 했고.”


그때 글을 써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저 내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었어요. 소설, 희곡, 시를 쓰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엄청 부었죠. 3년 가까이 말도 안 되는 시를 썼어요. 제 시집을 보고, 형식적 파괴가 심하다고 하는데,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시가 짧아야 된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A4 용지 30장짜리 시도 쓰고 그랬거든요. ‘시적인 느낌이 중요한 거지. 무슨 형식이 있어’ 하면서.(웃음)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웠던 것 같아요.”

소설도 쓰고, 희곡도 썼는데, 시에 특히 매혹을 느낀 이유가 있다면요?

“제일 어렵고, 하면 할수록 안 다가오더라고요.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 계속 달아나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가 ‘글쓰기와 짝사랑은 닮아있다’는 말을 하는데, 둘 다 대상과 너무 만나고 싶어 하는 과정들이잖아요. 글쓰기도 대상과 내 언어가 만나려고 하는 작업이니까요. 정말 아슬아슬하게 어긋나고, 어긋나는 작업들이죠. 짝사랑과 글쓰기에서 중요한 게, 나중에는 대상도 필요 없어져요. 감정을 옮기는 작업이 돼요. 그러니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상대를 좋아하고 생각하는 자기감정을 사랑하는 행위가 짝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되게 비극적인 건데, 글도 쓰다 보면 그런 것 같아요.”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글쓰기와 짝사랑은 비슷하네요.

“저는 문학의 고백을 잘 믿지 않아요. 진실을 꼭 문학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아직까지 열려 있는 입장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대화의 장르라면, 시는 고백의 장르죠. 이때 고백은 진짜 진실을 보여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백의 느낌에 가까운 느낌을 말해요. 그건 허구일 수도 있어요. 우리의 기억이 대부분 허구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허구를 고백하는 데 있어, 진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최근에 한 후배와 이런 얘길 했어요. 그 친구는 시가 입김 같대요. 소설은 목소리 같고. 그거 되게 근사한 표현이라고 했어요. 시는 되게 까칠한 애인 같아요. 조금 잘해 주면 올 것 같다가 조금만 방치해 놓으면 금방 다른 손가락을 찾아갈 것 같은.(웃음) 소설은 표절이 많은데 시에는 표절이 많이 없잖아요. 시인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으니 네가 쓴들 내가 못 쓰리’(웃음) 어떤 세상을 내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거 너만 봤느냐. 너의 눈으로? 나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느낌들이 있는 거죠.”


그런 생각이라면, ‘시인’이란 타고남보다는 노력함에 가까운 존재겠네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운명론적인 문학의 감수성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을 때, 문학을 선택하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쪽을 선택한 것뿐이지 자신이 잘할 수 있어서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동급이겠죠. 어느 시절에 했건 이후에 했건 간에.”


저는 시 쓰는 사람입니다


여: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도 되나요?
남: 물론이죠. 저는 타이피스트예요.
여: 주로 무엇을 치시죠?
남: 음…… 수평선, 어제 본 소녀의 발목, 딸기 시럽, 저녁에 불 꺼진 임대 아파트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리코더 소리, 부풀고 있는 빵 냄새, 제가 치는 건 아주 다양해요.
여: 아주 재밌는 일을 하시네요.
- 『패스포트』 중 (p.317)

시를 쓰기 전에는 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시보다는 시인의 존재에 대해 많이 생각했죠. 도대체 시인이 뭐지? 글을 쓰진 않았지만 독서는 되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외국 작가들에게서 느낀 시인이라는 개념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시인들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헤르만 헤세니 괴테니. 총체적인 측면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시인이 아닐까 생각했었고. 정작 공부를 하면서 시인을 물을 때는 굉장히 다양한 생각을 했죠.”

지금은 어때요? 스스로는 절대 ‘시인 김경주’라고 하지 않으시잖아요. ‘시 쓰는 김경주’라고 얘기하시죠.

“‘시 쓰는 김경주’라고 할 때, 제가 제일 당당해요.(웃음) 은행이고 병원이고 불공정, 불평등한 상황이 임박해 있을 때 저를 규명해 주는 말이죠. 남들은 ‘내가 뭐 하는 사람인데 말이야~’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저는 시 쓰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물론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하지만(웃음) 저한테는 그거 하나가 굉장히 큰 힘을 줘요. 저 스스로가 되게 좋아요.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해요. ‘어느 술자리건, 어느 결혼식이건, 어느 장례식이건 네가 시인이라면 너는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웃음) 사람들이 한때 시를 썼던 사람들이, ‘나도 한때는 시를 썼단 말이야’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 심리가 뭘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시를 순정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도 한때 순정을 바쳤던 시절이 있었어’ 하는 거죠. 그런데 저에게는 그런 의미가 아니거든요. 이 시대에 무모한 열정을 시로 펼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중요한 건강성을 갖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용기에 대한 당당함이겠죠. 저는 시 쓰는 김경주로 끝까지 남고 싶어요. 그 상태를 계속 즐기고 싶고, 어떤 것보다도 시를 열심히 쓰고 있을 때가 제일 기뻐요.

사실 시집 한 권을 내고 나면, 시 쓰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좀 걸려요. 전 남들보다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칼럼, 비평, 에세이 등 여러 글들은 이제 쉽게 쓰지만, 시는 안 그래요. 이번 시집에도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썼는데, 정말 거리에 쓰레기 봉지를 두고 온 기분처럼 창피할 때가 있어요. 이런 시적인 느낌들을 평생 가지고 살려 하는 자들이 펼치는 언어가 시 쓰기죠. 시인이라는 존재가 거대하거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 때문에 죽고 살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자꾸 엄마는 시를 놓으라고 울고 나는 고양이를 울린다
자꾸 시 가지고 생활을 반성하는 놈 좀 없었으면 하는데
시 때문에 30분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도 참혹해지고
시 한 편 발표하고 나면
몰래 거리에 쓰레기 봉지를 두고 온 기분이 든다

시 때문에 살 일 좀 생겼으면 하는데
사형수가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간수들에게 갑자기
자꾸 밀지 말라고 울먹이는 광경처럼

밀지지도 않았는데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시만 짜서 이대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시 때문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오래 시 안쓰다가 다시 쓴다는 놈 생각
좀 하고
다시 쓴다는 놈치고
세상의 속물 다 겪은 후 오만하게 돌아온 것 못 봤다
그게 시의 구원이라면
시 때문에 형편없는 연애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도 해보지만
시 때문에 죽어서도 까불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따지고 볼 것도 없이 신파란
내 쪽에서 먼저 부러우면 지는 법이다
이기고 지고 살 일도 아닌데 시 때문에
이름 없는 무덤 옆에 가서 잠도 자 보았다

시 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 (p.112)

인간적인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외롭지 않으신가요?(웃음) 여행도 혼자 떠날 때가 많다고 들었어요.

“혼자 있는 것 좋아하는 편이고요. 호불호가 없어서 친구들과도 같이 많이 가요. 외로움은 감수성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나일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들킬 때의 감정, 그게 외로움인 것 같아요.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나를 딱 들킬 때. 그래서 나일 수밖에 없구나, 느끼는 순간. 그것은 여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느끼는 감정이죠.”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어, 그렇구나’ 생각하죠. 과거에 첫 시집을 낼 때만 해도 외로움이 참혹할 정도였죠.(웃음) 천만 서울 인구 중에 나의 시를 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싶어서, 밤마다 114에 전화해서 내 시를 읽어 주겠다고 했어요.(웃음) 이걸 공연으로도 만든 적이 있어요. 한 시인이 시를 써서 114 직원에게 만날 읽어 주는 거야. 114는 이쪽에서 끊지 않으면 절대 끊지 않아요.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대답해 줘요. ‘네네, 고객님.’

그러다가 114가 안 되면, 전화번호 책을 사서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요. ‘저기 죄송한데 제가 시를 쓰는데 시를 좀……’ 그러면 ‘뭐? 이 새끼야?’(웃음) 그런 과정을 제가 모노 공연으로 혼자 연출하고 연기한 적이 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그 공연에서 이런 요소도 들어갔어요. 실제로는 못한 일이지만. 114에 전화를 걸어서 ‘1976년 7월 14일 저녁 9시에 태어나 전남 광주 산수동 15번지 사는 친구를 좀 바꿔 주세요.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저였죠.(웃음)”


‘무사같이 시를 쓰는 사람’은 자주 웃음을 흘렸다. 익살스런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토록 좋아한다는 주성치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닮아있는 사람이었고, 이제껏 봐왔던 이미지나 사진을 배반하기라도 하듯, 유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한편 어쩐지 지쳐 있는 듯도 싶었다. 시를 쓰고 있을 때의 자신을 가장 예뻐한다는 사람이니, 시를 많이 못 쓰고 있다는 요즈음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지난해, 열두 번의 연출, 네 권의 책 집필로 소진된 에너지가 아직 채 충전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거대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어쩐지 시인, 이라고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전해져 오는 특유의 감상을, 김경주는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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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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