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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90년대 한국 젊음의 대표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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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던 소설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일본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 베스트셀러 『상실의 시대』(또는 『노르웨이의 숲』)가 그런 영향력 있는 소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소설 한 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란 건 쉽게 그 범위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비극적인 주인공의 자살이 전 사회적으로 유행을 일으키면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사회현상까지도 만들어 낸 바가 있을 정도로 가끔은 그 위력이 무지막지합니다.



 

가까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던 소설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일본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 베스트셀러 『상실의 시대』(또는 『노르웨이의 숲』)가 그런 영향력 있는 소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소설이 돌풍을 시작했던 90년대에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감명 깊게 읽은 책에는 늘 『상실의 시대』가 자리했고, 청춘 남녀의 사랑 고백은 ‘봄날의 곰’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심지어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모 이동 통신사의 인터넷 서비스 광고에선 기차 옆자리의 여자가 읽는 『상실의 시대』를 모바일로 검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니 그 위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수준이었습니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은 사실 한글 번역판이 나오면서 글 전체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새롭게 잡아낸 제목입니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인데, 이는 소설 시작에서 주인공의 귀에 흘러들어 오는 노래가 비틀스의 「norwegian wood」라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사실은 ‘숲’이 아니라 ‘가구’이지요. 원곡 가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norwegian wood’는 사실 이 문맥으로 보면 여자가 가구를 자랑하면서 ‘이거 노르웨이산이야’ 하는 정도의 뜻입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노르웨이의 숲’으로도 읽기가 가능한 이 단어는 오히려 소설 전반이 풍기는 뉘앙스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 현상을 만듭니다. 아름다운 말장난이지요.

하루키는 사실 이렇게 팝송 가사를 뒤집어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시도를 자주 보여 줍니다. 역시 비틀스의 명곡인 「O bladi O blada」의 후렴구는 ‘Obladi, Oblada, life goes on blah!’입니다만, 하루키는 ‘blah’를 ‘bra’로 바꿔 버리면서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라는 소설을 낸 바도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는 지금 잠깐 언급한 저자의 특성대로 상당한 분량의 서구 문화 인용을 보여 줍니다. 비틀스에 대한 애정은 깊고도 넓어서 「penny lane」이나 「fool on the hill」 같은 노래들이 마치 BGM처럼 군데군데 끼어들고, 바흐의 「푸가」나 「말러 교향곡」 같은 클래식부터 밥 딜런, 비치보이스 같은 어지간한 팝 아티스트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음악만이 아니라, 『위대한 개츠비』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영문학의 주요 아이템들도 상당한 비중으로 소설 속에서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실 서점에서의 분류는 ‘일본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등장하는 아이템만으로 본다면 완전한 무국적의 소설이 되는 셈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일본의 60~70년대 언저리입니다.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는데, 일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조직이 창설된 해가 1968년, 전공투가 동경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때가 1969년입니다. 일본에서도 한참 학생 운동의 열기가 달아올랐고 전 세계적으로도 변화를 원하는 청년들의 움직임이 들끓던 딱 그 시대가 『상실의 시대』가 펼쳐지는 배경입니다.

거시적인 문제에 온 세상이 집중하고 있던 때, 거의 자폐에 가까운 수준으로 얕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던 주인공에게 시대상은 배경으로 휙휙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그에게 시대란 그저 룸메이트가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 정도(심지어 어떻게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일 뿐이며, 주인공이 서 있는 주변을 그리는 그 시대의 공백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서구 문학과 음악으로 채워집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입니다.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위치시킨 시대가 1960년대라는 격변의 시대였는데도 주인공은 그런 세계와 소통하려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주인공을 둘러싸는 콘텐츠는 음악과 문학입니다. 거시적인 문제로 돌아갔던 세계에 살던 개인의 입장을 조명하려는 의도인데, 사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지금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사람들의 위치가 됩니다.

실제 80년대에 격변을 치른 한국에서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는 방법을 논하자면 『상실의 시대』 주인공과 같은 형태의 낭만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얼마 전 종영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묘사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연찮게도 『상실의 시대』가 그려 낸 젊음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 격인 신세경과 이지훈, 두 사람이 나름의 데이트를 즐기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장소가 독특합니다. 두 사람이 하필 간 곳은 학림다방이라는 곳인데, 70년대 학생 운동권의 주요 논쟁 중 하나였던 ‘무림-학림 논쟁’의 시발점 중 하나가 이 학림다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이킥의 두 주인공은 그런 격랑의 현장에 들어와 벨벳언더그라운드 LP를 틉니다. 나중에 신세경은 혼자 자리에 돌아와서 다시 LP를 트는데, 이때부터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신세경이 상상하는 환상의 영역을 보여 주면서 드라마는 에피소드를 마칩니다.

재미있게도 『상실의 시대』가 보여준 이러한 모습은 이른바 ‘쏘쿨’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90년대를 뒤흔들었던 주제어는 ‘나는 나’라는 말도 있었는데, 『상실의 시대』가 표현하는 그 세계와 단절된 자폐 같은 주인공의 모습은 사실 한국의 90년대가 보여 주던 새로운 세대의 모습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세상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이 나만의 길, 나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독립, 또는 고립된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그래서 하루키 소설은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 이후 대중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90년대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 붐은 폭발적인 문화 소비를 일으킵니다. 재즈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한편에서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돌이라는 거대 대중문화 상품이 음반 매장을 휩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문화 소비 세대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큰 줄기는 유지된 채 흘러오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상실의 시대』의 영향력은 대중과 동떨어지지 않은 유행으로서의 사조에 있어 선구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꼭 집어 『상실의 시대』가 이러한 트렌드를 이끌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어 새로운 문화 소비 패턴이 나오려고 하던 찰나에 적절하게 터진 『상실의 시대』 베스트셀러 붐은 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 아이콘으로 이야기가 될 만한 소재임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시대로부터 감각을 차단한 주인공과 그의 주변은 다분히 일상적인 젊음의 이야기를 펼쳐 갑니다. 갓 어른이 된 이들에게 펼쳐지는 새로운 시대는 음악과 섹스와 술과 사유와 책과 그밖에 우리가 손쉽게 20대의 것이라 부를 만한 많은 고민, 상념들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고, 때론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런 친구 또는 친구 연인의 자살에 상처 입습니다. 뭔가 큰 흐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매 순간의 스케치와 상념에 집중하는 소설의 묘사 방식은 때론 매우 정적이며, 마치 묵직한 규율에 맞추어 흐르는 바흐의 선율이 재즈 형태로 변주되는 듯한 흐름을 이어 갑니다.

한국 90년대의 20대는 대중문화를 이야기하는 많은 글이나 논문 등에서 주요한 소재입니다. 급격한 근대화의 열매를 먹고 자란 풍요의 세대는 ‘신세대’라는 정의로 다시 태어났고, 이들로부터 사실상 한국은 ‘post 산업화’의 시대라 불릴 만큼의 새로운 생활양식을 얻었습니다. 그 세대의 모습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겠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대유행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매우 사실에 근접한 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하고 분석하는 기법이 아니라, 실제 그 대상을 고스란히 스케치하고 대상이 가지는 감상을 작가 또는 독자 안에 몰입시켜 버리는 문학의 기법이란 가끔은 엄정한 논문이 분석하는 것 이상의 느낌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의 가치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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