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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모두 도망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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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히 원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꿈꾸기 때문에 남들 눈엔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으로 늙어가길 택할 수도 있다. 결국 얼마 후에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로 가득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꿈을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것은 꿈의 헛됨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십여 년의 세월을 뚫고 이 문장이 생각났다. 이 문장은 어느 여름날 워커힐 호텔 뒤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며 읽었었다. 그렇다면 뭐가 꿈을 사라져 버리게 한단 말이지? 장 그르니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상하게도 그 같은 비밀의 감정은 마치 끈질기고 숨 막히는 어떤 냄새, 심지어 창문을 열어젖혀 두어도 가시지 않는 냄새와 같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린 어떤 친구가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이 끌리는 쪽은 댄스홀이나 쾌락의 거리가 아니라 어둠이 내릴 무렵 여인들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건네 오는 한적한 골목길들이라는 것이었다. 강렬한 감정치고 깊이 감추어진 감정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태리의 어느 오래된 도시 교외에 살고 있을 적에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포석이 고르지 못하며 매우 높은 두 개의 담장 사이에 꼭 끼여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곤 했다. 시골 바닥에 그처럼 높은 담장들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는 사월이나 오월쯤이었다. 내가 그 골목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를 때면 강렬한 재스민과 리라꽃 냄새가 내 머리위로 밀어 닥치곤 했다. 꽃들은 담장 너머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꽃 내음을 맡기 위하여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두고자 했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장 그르니에는 무심코 꿈과 비밀을 착각한 것일까? 어쨌든 그건 지금은 중요치 않다. 강렬한 감정치고 깊이 감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와서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밤인가는 마치 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럴 때 도시의 불빛들은 누군가의 비밀이 깜빡이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 불빛들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 빠져들곤 했었다. 낯선 영혼 속으로의 신비로운 여행은 내 손목 끝 맥박에서부터 시작된다. 맥박이 뛰는 동안 변함없이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기 때문에 나는 이 도시의 낯섬이, 그 낯섬에 대한 나의 반응이 누군가의 비밀 때문이란 걸 다시 이해하게 된다.



 

오직 비밀만이 영혼을, 비밀만이 행복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어떤 비밀을 갖고 있을까? 지난 한 달 동안 『달과 6펜스』를 언급하는 사람을 셋이나 보았다. 예술가 한 명, 예술가급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직장인 한 명, 그리고 그냥 직장인 한 명, 그들 모두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끌린 이유가 찰스가 마흔 살이 되던 해 과감하게 집을 뛰쳐나가 버린 점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천재란 점 때문인지 잘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찰스를 동경하는 내면의 풍경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우리 도시의 사람들에겐 이런 밤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만년필을 하나 샀다. 종이에다 몇 번이고 자기 사인과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 주소, 몇 개의 물결무늬, 그리고 부모님 주소를 써보았다. 그러고 나서 새 종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적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너무 추워” “나는 남미로 간다”라고 썼다. 그런 다음 멈추었다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잉크가 마르면서 진한 색으로 변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다시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자기 이름인 파울을 그 밑에 마저 써넣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냥 앉아있었다. 교회 성가대 연습은 아홉 시까지다. 아홉 시 반이면 힐데가르트가 돌아올 것이다. 그는 힐데가르트를 기다렸다. 탁자 위 한가운데는 접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이름 파울이 흑청색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여기가 너무 추워”라고도 적혀 있었다. 이제 힐데가르트가 집에 오겠지. 아홉 시 반에, 지금은 아홉 시였다. 그녀가 그의 쪽지를 읽는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아마 남미로 간다는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 옷장 속에 든 와이셔츠 수를 세어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난 모양이니까. 그녀는 뢰벤(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볼 것이다. 그녀는 실소를 머금을 것이고 어쩌면 체념한 채 그 사실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몇 번이고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것이며 왼손 약지로 가르마를 타고 나서 천천히 코트 단추를 끄를 것이다. 그는 그냥 앉아서 누구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만년필 사용 설명서를 다시 한번 읽었다. 다시 자신의 쪽지를 들여다보며 야자수를 생각했고 힐데가르트를 생각했다. 그냥 앉아 있었다.

아홉시 반에 힐데가르트가 돌아왔다. 그녀가 물었다. “애들은 자요?”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페터 빅셀의 많은 글들은 ‘만약 ……이었다면’이란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 꽃집의 손님이 꽃집의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그녀의 딸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더라면. 찌그러진 우유 냄비를 갖고 있는 부인이 우유 배달부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우리가 피아노의 음을 한번 눌러봤더라면. 우리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버렸더라면. 모든 걸 접고 고향에 돌아가 버렸더라면. 그런데 ‘만약 ……이었더라면’ 안에 현실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진실이자 비밀인 것이 숨겨져 있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증권 중개인이고 문학이나 예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주 따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직하고 선량하고 따분하고 평범한 사람, 아무 특징이 없는 사람,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큰 관심을 가질 리 없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그의 가정 역시 중산층의 평균적인 가정이었다. 그의 아내는 명랑하고 손님 접대를 잘했고 아이들은 잘생기고 건강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다.

“기막힌 일 아니에요? 부인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지 뭐예요.”

가족들과 친척들은 그가 어떤 여자하고 눈이 맞아 파리로 달아나 버렸단 것을 기정사실화한다. 찰스는 그를 찾아 파리에 온 신사에게 이런 대화를 나눈다.

“아니 돈 한푼 남기지 않고 어찌 아내를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왜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부인께선 어떻게 살고요?”
“난 그 사람을 십칠 년간 먹여 살려왔소. 그러니 이제 자기도 혼자 힘으로 살아볼 수 있잖나?”

(…)

“하지만 아이들이 귀엽지도 않습니까? 정말 귀여운 아이들 아닌가요, 이제 그 애들과 영영 인연을 끊겠단 말씀입니까?”
“어릴 때는 귀여워했지만 이제 다 크고 나니 별 감정이 들지 않아요.”
“아주 몰인정하군요.”
“그런가보오.”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창피할 것 없소.”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라지요.”

(…)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아니, 나이가 사십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요.”

(…)

“어째서 당신에게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려야 해요.”

(…)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선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이런 맹추 같으니라고.”
“제가 왜 맹추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이것 보세요. 모두가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아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이 부분에선 찰스가 틀렸는지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 속에도 들끓는 영혼이 있다.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일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떠나지 않고는, 다시 시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순간들은 있다. 평범한 사람, 가장 무난한 사람, 가장 비참한 사람에게도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

수년 뒤 찰스는 마흔일곱 살 나이에 북서풍으로 물거품인 잿빛 바다를 건너 타히티로 건너간다. 그의 최후에 대해선 중요한 목격자가 둘 있다. 한 명은 찰스의 체스 친구인 브뤼노 선장. 그는 스트릭랜드가 사는 곳을 찾아가 하룻밤을 잔다.

스트릭랜드가 살던 곳에는 뭔가 에덴동산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 사방에는 울울창창 나무만 우거진 곳이죠.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 같았어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낙원이었어요. 그런 곳에 그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세상이나 그 사람이나 다 서로를 잊고 말입니다. 하여간 가까이 가보니 토박이 서너 명이 베란다에 누워 있더군요. 웬 젊은 녀석이 담배를 피워 물고 질펀하게 누워 있는데 몸에 걸친 것이라곤 파레오뿐이고. 내가 스트릭랜드에게 물었죠. 그처럼 되는 대로 사는 게 싫증이 나지 않느냐고 말예요. 그랬더니 전혀 그렇지 않대요. 가까이에 모델들이 있어서 오히려 좋다나요. 그때 그 밤의 죽은 듯한 적막을 나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밤에 피는 하얀 꽃들로 사방은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밤이었는지요.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영혼이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두둥실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죽음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사랑스러운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문둥병에 걸려 죽은 뒤 그의 시신을 본 의사 닥터 쿠트라. 그는 찰스가 죽은 방안에 들어섰는데 그 방엔 구역질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자신이 마법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원시림과 나무들 밑으로 벌거벗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눈이 어둠에 점점 익숙해지자 의사는 그것이 사방 벽에 그려진 그림이란 걸 알게 되었다. 방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기 때문에 그는 마치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범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 무섭고도 관능적이도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 되었다.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맙소사, 이건 천재다.’ 그는 이렇게 신음했다. 그리고 찰스의 타히티 아내에게 물었다.

“눈이 멀어 있었단 말인가?”
“네, 일 년 가까이 앞을 보지 못했어요.”


찰스는 죽으면서 그의 그림으로 가득한 집을 작대기 하나까지 태워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깨끗이 다 타버렸다. 여기까지가 찰스의 인생이다. 찰스는 마법사급에 해당하는 천재였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끈다기보다는 (그는 마법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루하루의 고된 노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약 ……이었다면’이라고 상상만 해본 마음속의 일을 실제로 해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어떤 구체적인 물질의 소유와는 아무 상관없고 차라리 마음속의 어떤 가치 때문이고 열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부함에 대한 경멸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하지 못한 일을 두고 ‘차라리 그렇게 되는 편이 나았어.’란 생각일랑 팽개쳐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꿈과 현실의 영원한 갈등 속에 있는 우리에게 이런 반항은 인간적이고 정당하게 느껴진다. 이질적인데 친근하다. 세계의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들의 가여운 꿈은 행복과 반항을 동시에 바라본다. 그래서 꿈은 비밀이 된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까뮈는 어느 날 쓸쓸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는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슴 뒤흔드는 운명을 타고난 그의 늙은 어머니, 그 역할을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고 골똘히 실천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까뮈에게 묻는다.

“너 곧 또 오겠지?”
“아직 전 떠나지도 않았는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정말 제가 아버지를 닮았나요?”
“암, 아주 쏙 빼닮았어. 하긴 넌 아버지를 모르지, 네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이가 죽었으니까. 하지만 네게 자그마한 콧수염이 있으면…….”
그의 아버지는 마른 전투에 나갔고 두개골이 터졌고 일주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신음하다가 마을의 전몰 장병 위령탑에 이름이 새겨지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 편이 나았지. 소경 아니면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테니…….”


까뮈는 우리가 누군가를 방에 붙들어두는 방법은 언제나 ‘그 편이 차라리 나았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까뮈는 그날 밤 방안을 채우던 것은 세계의 부조리한 단순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까뮈는 항만의 밤 불빛을 바라보며 쓸쓸한 카페에서 다시 과거의 방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쓴다.

나는 너무나 맥없고 안이하게 되어가는 마음의 흐름을 깨트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명철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단순하다. 사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말라. 사형받는 자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죗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 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운명을 마주 바라본단 말은 무척 신비로운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새롭고 강력한 모진 모험을 맞을 준비를 했다는 말 같기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무척이나 진실할 것이란 걸 암시하는 듯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찰스의 파리 시절엔 더크란 화가가 있었다. 그는 화가였지만 솜씨는 형편없었다. 그는 진부하고 예쁜 그림을 그렸다. 동료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경멸했지만 그가 돈을 상당히 벌었기 때문에 늘 그에게 돈을 빌려갔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그림밖에 그리지 못하는 엉터리 화가면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진짜 훌륭했고 행동은 투박했지만 감성은 유별나게 섬세했다. 그리고 남의 일에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상 놀림감이 되었다. 그래도 그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고 솔직한 인간도 없었다. 더크에겐 블란치란 이름의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수수한 매력이 있었고 몸매는 조각가가 좋아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솥이며 냄비 사이를 조용히 바삐 움직이는 평범한 동작에서도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끌어내게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말이 없고 진지한 여자였다. 더브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찰스 스트릭랜드)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세.”

병간호를 위해 찰스를 자신의 집에 묵도록 했던 더크는 어느 날 뭔가 눈치를 챈다. 집에 돌아가면 두 사람이 더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가 블란치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자 그녀가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그는 찰스에게 이젠 그만 자신의 스튜디오를 비워달라고 한다. 그러자 찰스는 짐을 꾸리게 끈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더크의 아내는 더크에게 “여보 저는 이 분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는 이제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분노한 더크는 찰스와 한바탕 난투극을 벌여보지만 안경만 날아가 버린다. 그 안경을 아내가 주워다 아무 말 없이 건네준다. 안경을 건네받으며 더크는 자신이 한없는 불행 속으로 빠졌단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방을 자기가 너무나 좋아했던 방을, 자신의 취향으로 따뜻하게 꾸며져 있던 방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가겠소.”

그런데 그 뒤로 찰스에게 버림받은 브란치는 자살해 버리고 만다. 더크는 고향집을 그리워한다. 그는 아담한 벽돌집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과 뭐든지 정돈돼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는 내가 자신처럼 목수가 되길 바랬지. 오대를 같은 직업으로 이어왔지. 어렸을 적에 나는 마구를 만들던 옆집 딸에게 장가들겠다고 했지. 그애와 결혼했더라면 아마 집안을 아주 깔끔하게 정돈하고 살면서, 나도 가업을 이을 아들 하나쯤을 두었을지도 몰라. 세상은 참 매정해,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 그러나 겸손하게 살아야지,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사랑을 구해야 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의 무지가 우리네 지식을 다 합친 것보다 나아. 지금 우리 집에 가보면 내 그림이 근사한 금박 액자에 끼워져 벽 사방에 하나씩 걸려 있다네.”

그런데 더크는 떠나기 전 찰스를 한 번 만난다. 만남의 이유는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돌아봤을 때 벽 쪽을 향해 세워둔 캔버스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찰스가 그린 누드 그림이었다. 더브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여자의 그림이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몸 위에 살며시 얹어놓고 있었다. 한 무릎은 세우고 다른 다리는 뻗고 있었다. 고전적인 자세였다. 더브는 눈앞이 아찔했다. 블란치였다. 슬픔과 질투와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림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무튼 그림에다 커다란 구멍을 내줄 작정으로 팔을 막 치켜든 참이었지. 그 순간 그걸 보았던 거야. 그림을 봤네. 진짜 예술 작품 말일세, 나는 감히 손댈 수가 없었네.”
“그래, 스트릭랜드를 만나 뭐라고 했나?”
“나랑 같이 네덜란드에 가자고 했네.”


이 태도는 뭘까? 굴종인가? 경외감인가? 위선인가? 내 생각엔 이것은 태도라기보다는 영혼의 상태 같다. 숱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인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감, 바보 같은 사랑, 세계의 냉혹함과 부조리함 앞에서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해맑음.

『달과 6펜스』를 말할 때 보통 찰스를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더브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소설에서 더브의 후일담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꿈이자 비밀을 갖고 있는 우리가 자신의 운명과 마주 바라본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더브에 대한 관심을 끝낼 수가 없다. 더브야말로 아름다움과 숭고함 양쪽 모두에서 쓰디쓴 거부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엄청나게 슬프고 순진한 사람이 앞으로 꿈을 갖게 된다면 그가 맛본 모든 슬픔을 쏟아 붓는 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운명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모든 슬픔을 쏟아 붓는 꿈을 갖는 바로 그 방면에서 천재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 떠날래.’ 하고 써보기는 해도 아직도 떠나지 못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차라리 떠나지 않는 편이 나았어.’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은 가장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열렬히 원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꿈꾸기 때문에 남들 눈엔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으로 늙어가길 택할 수도 있다. 결국 얼마 후에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로 가득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들은 괄호 안에 넣어 둘 수가 없다. 우린 우리가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승에서 우리 모두는 도망자들이다. 질병으로부터, 권태로부터, 최악의 빈곤으로부터,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없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험담으로부터, 그 무엇보다도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홑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면서 그 아래에 우리 자신들을 숨기는데 그 홑이불 밑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은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탈리아의 보로메아 제도.
-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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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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