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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쇼윈도에 비친 외로움 -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년 작품임에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세월의 풍상에 시들지 않는다. 뉴욕의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인 듯하고, 보석 가게 티파니 앞 거리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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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
음악: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Blake Edwards)
주연: 오드리 헵번, 조지 페퍼드

<티파니에서 아침을> 오리지널 포스터.
“음악이 없는 영화는 뭐랄까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 같아요. 당신의 음악은 우리 모두를 고양시키고, 우리를 날아오르게 만들어요. 우리가 모든 걸 단어로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할 때도, 당신은 이미 우리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편집이 끝나고 음악까지 다 삽입된 완성 필름으로 시사회를 가진 후, 오드리 헵번이 헨리 맨시니에게 보낸 애정 어린 편지의 일부다. 가식적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오드리 헵번이 헨리 맨시니의 음악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어쩌면 그녀가 편지에 쓴 내용이야말로 ‘영화 음악이란 무엇인가’ ‘영화 음악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의 핵심을 짚고 있는 게 아닐까? 음악이 들어감으로써 영화는 비로소 리듬감을 타고 살아있는 감정을 담게 된다. 음악이야말로 영화라는 거대한 동체를 움직이게 하고, 호흡과 감정을 강화시키고, 진정한 숨을 쉬게 만드는 무엇이다. 편지는 주연배우가 이례적으로 썼다는 사실보다, 영화에 대한, 그리고 영화 음악에 대한 오드리 헵번 자신의 감상과 평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관심을 끈다.

「문 리버」(Moon River)는 영화 주제가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노래다.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문 리버」는 영화보다 주제가가 더 유명해진 경우다. 노래만 좋고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지금 다시 봐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시간이 흘러가는 영화는 <로마의 휴일><티파니에서 아침을> 정도라고 여겨진다. 그만큼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고, 과도하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영화다.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가끔은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면서 고독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배경은 뉴욕이지만, 서울이든 도쿄든 대도시에 사는 영혼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한 장면. 할리(오드리 헵번)가 티파니 숍의 윈도우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다.

1961년 작품임에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세월의 풍상에 시들지 않는다. 뉴욕의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인 듯하고, 보석 가게 티파니 앞 거리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느낌이 든다. 여전히 아침이면 오드리 헵번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그 앞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커피 한잔과 베이글을 들고. 그녀의 패션은 50년이 지났지만 유행에 뒤처지기는커녕 모던하기만 하다. 뉴욕의 마천루 역시 그대로이고, 자본주의의 총아처럼 우뚝 서 있다. 고도로 세련되고 화려하게 치장된 도시 안에서 인간들은 오히려 고독감을 느낀다. 영화는 그런 절절한 외로움을 담담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헨리 맨시니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연주되고, 「문 리버」의 멜로디가 반복되어 흐르듯, 영화는 내용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분위기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감정들을 주고받지만 결국은 혼자임을 깨닫고 만다. 이별은 예정된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는 누구나 겉으로 도도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혼자만의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말 없는 고양이만이 할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의 친구가 된다.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은 트루먼 카포티의 원작을 애잔하면서도 연민이 넘치는 터치로 영상에 담았다. 헨리 맨시니는 도시의 화려함과 그 이면을 멜로디로 그려냈고, 할리는 대도시 여성의 자화상을 보여 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에 대한 그리움, 혼자 있는 순간의 표현되지 않는 외로움, 과거에 대한 추억, 그 외에도 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노래가 「문 리버」이다. 작가인 폴(조지 페퍼드)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는 중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리를 묘사하는 내용이다. “아주 사랑스럽고 겁을 먹은 여인이 있다. 그녀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제외하면 혼자 살고 있다.” 타이핑하는 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와 할리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폴은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샤워를 했는지 편하게 가운을 두르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맨 할리가 창턱에 앉아서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애잔한 표정으로 꿈을 꾸듯이 가사를 읊조린다. 때로는 엷은 미소를 띠다가, 때로는 애절한 눈빛을 드러내기도 한다. 노래 곡조를 따라 할리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난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 떠난 두 유랑자.
세상엔 참 볼 게 많아요.
우리는 같은 무지개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무지개는 나의 허클베리 친구를 애타게 기다린답니다.
문 리버, 그리고 나.


노랫말에 공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 역시 고독한 사람이다. 「문 리버」에는 어려운 현실을 같이 이겨내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가사는 영화 내용과 분위기 전체를 관통하면서 할리의 캐릭터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 리버」는 영화 주제가가 가져야 할 장점들을 절묘하게 담고 있는 노래다. 원래의 시나리오에는 오드리 헵번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없었다. 그러나 노랫말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아련해서 오드리 헵번이 직접 부르는 장면을 넣게 되었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OST LP.앤디 윌리엄스의 <문 리버> 앨범. 노래를 처음 부른 사람은 영화 속의 오드리 헵번이지만, 정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앤디 윌리엄스의 버전이다.

외로운 할리는 고양이를 기른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녀가 애정을 쏟는 유일한 대상이다. 빗속에서 고양이를 버릴 때 그녀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헨리 맨시니의 음악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들까지도 다독거리면서 여운을 느끼게 해준다. OST 앨범은 대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에는 오드리 헵번이 부른 노래가 아니라 다른 버전의 「문 리버」가 수록되어 있다. 남성 합창 버전이다. 헨리 맨시니는 OST 앨범을 제작하면서 영화에 사용되었던 헵번의 노래를 싣는 것에 반대했다. 그녀가 부른 「문 리버」는 영화 안에 있을 때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OST는 빌보드 팝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헨리 맨시니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2관왕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1962년 오스카 음악상과 주제가상이 그의 몫이었다.

먼지를 닦아내고 LP를 걸어 놓으면 모든 곡들의 흐름이 리드미컬하게 넘어간다. 첫 곡인 「문 리버」의 오케스트라 연주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볼 때의 상황으로 청자들을 끌어들인다. 눈앞에 뉴욕이 펼쳐진다. 할리가 휘파람을 불어 택시를 잡는다. 흥겨운 리듬의 「Something for Cat」을 지나 「미스터 유니오시」(Mr. Yunioshi)에 이르면 할리가 살던 아파트와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우스꽝스러운 일본인 유니오시 씨의 표정이 떠오른다. (실제로는 미키 루니가 연기했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내는 헨리 맨시니의 작곡 실력이 돋보인다. 영화와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곡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할리」는 스탠더드 재즈풍의 분위기로 고독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피아노 솔로는 군중들 속의 할리를 표현하는 것 같다. 마지막 곡은 당시의 유행을 반영하듯이 「문 리버 차차」(Moon River Cha Cha)다.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멜로디에 몸을 맡겨도 좋다. 대도시, 파티, 사람들, 고독, 이런 모든 정서가 OST 한 장에 담겨있다. 만약 이 앨범에 오드리 헵번이 직접 부른 「문 리버」가 들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엄청난 메가 히트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Tip 1] 조지 페퍼드가 연기한 폴은 원작자 트루먼 카포티의 자화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카포티는 1958년 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영화화될 때 카포티는 할리 역으로 메릴린 먼로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할리 골라이틀리 역의 메릴린 먼로라……. 상상이 안 간다.

[Tip 2]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원작의 수준과 감동을 따라잡는 영화는 꽤 드문 편이다. <전쟁과 평화><양철북>이나 영화로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과연 원작을 읽을 때의 감동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인적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 중 최고의 영화로 생각된다. 트루먼 카포티의 원작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2003년 출간됐다.) 뒷면 표지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카포티에 대해 쓴 짧은 평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소년의 눈의 존재한다.”

[Tip 3]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후에도 헨리 맨시니는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몇몇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샤레이드>(Charade, 1963), <길 위의 두 사람>(Two for the Road, 1967),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 1968)가 두 사람이 만났던 작품들이다.

[Tip 4] 극장 예고편 마지막에는 “티파니에서 아침은 맛있다”라는 카피가 등장한다. 제목과 뉴욕식 아침식사를 동시에 연상케 만드는 이중적인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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