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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불량 식품이 더 맛있다 - <황야의 무법자>

서울에 앉아서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이자 마카로니 웨스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을 ‘비’가 내리지 않는 깨끗한 프린트로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 팬들에게는 행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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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1964년)
음악: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서울에 앉아서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이자 마카로니 웨스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을 ‘비’가 내리지 않는 깨끗한 프린트로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 팬들에게는 행운이 아닐까.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콤비를 이루어 찍은 초기 대표작 <무법자> 시리즈 세 편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세르지오 레오네 특별전> 때의 일이다.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관객 중에는 유난히도 중년 남성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떤 기억을 찾아 어두운 극장으로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그들의 어릴 적 기억 속에서 마카로니 웨스턴은 이소룡 영화와 더불어 그때까지 알고 보아왔던 영화의 틀을 완전히 깨버리는 새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70년대를 관통하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뿐 아니라 국내에서 유독 인기를 끌었던 테렌스 힐 주연의 <튜니티> 시리즈는, 아직 가난했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몇 안 되는 재미였다. 40대의 아저씨가 되어버린 그들은, 속사로 총을 쏴대고 무표정하게 유유히 걸어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흉내를 내면서 놀던 기억을 안고 극장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을까. 황량한 벌판, 초라한 마을, 꾀죄죄한 인간 군상들, 거기에 퍼지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까지 되새기면서.

개인적으로는 정통 서부극을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마카로니 웨스턴을 보고 있으면 가끔 군것질도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마카로니 웨스턴을 접했을 때 낄낄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던 관객들이 얼마나 될까. 불량 식품 서부극. 지금이야 세르지오 레오네 표 영화들이 고전으로 분류되지만 처음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서부극이었다. 주인공들은 먼지에 찌들고, 지저분하고 흉측하게 생기고, 아무 데서나 총을 갈겨대곤 했다. 불문율을 깨고 등 뒤에서 총을 쏘기도 했다. 기존의 정통 서부극에서는 볼 수 없던 장면들이었다. 특히나 <황야의 무법자>의 라스트 신은 상식을 깨버렸다. 방탄조끼처럼 철갑을 두르고 총을 맞아도 끄떡 않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강렬한 것이었다. 모든 게 규범화되어 있던 미국 영화의 서부만 보다가 무협지와도 같은 새로운 환상의 서부를 발견했으니까. 이는 장발도 안 돼, 미니스커트도 안 돼, 모든 게 ‘안 된다’로 일관되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일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탈리아에 앉아서,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모여서 서부영화를 찍자고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그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하지만 <황야의 무법자>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경우이다. 레오네는 나름 스타 캐스팅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헨리 폰다와 찰스 브론슨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제안을 했지만 다 거절당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시나리오가 엉망이었으니까. 당시에 서부극에 출연하던 인기 배우들이 이처럼 파격적인 시나리오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세르지오 레오네는 이 황당한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길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관습과 틀을 깨는 행위였다. 스타들을 기용하지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찾은 배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TV에서는 괜찮게 팔렸지만 그를 찾아주는 영화는 없던 때였다. 어떻게든 스크린에 진출하고 싶어 노심초사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황과 <황야의 무법자>는 딱 맞아떨어졌다.

<황야의 무법자> 프랑스판 포스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입에 짧게 물린 시가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레오네는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던 엔니오 모리코네를 설득해서 음악을 맡긴다. 그러나 타이틀에 음악감독으로 댄 새비오(Dan Savio)라는 낯선 이름이 뜬다. 이렇게 일부러 ‘댄’이라는 영어 이름을 쓴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아류작 같은 느낌을 지우고, 관객들에게 미국 언저리에서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약간은 사기성이 농후하지만, 영화 역사에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번에 본 새로운 프린트에는 크레디트 타이틀에 감독 이름으로 세르지오 레오네라는 본명이 올라온다. 그러나 개봉 당시에는 그 역시 밥 로버트슨(Bob Robertson)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감독이나 음악가가 아예 자기 본명을 걸지도 않은 작품이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기적은 그렇게 일어난다.

저예산으로, 싸구려로 만든 서부극이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는 것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가장 놀란 건 그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들이었을 것이다. 감독과 음악은 물론 주연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까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 속에서 ‘이름이 없는 사나이’로 등장한다. (‘이름조차 없는 사나이’라고 표현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수목이 서 있는 음산한 마을로 들어선 고독한 총잡이. 시작부터 마을 입구에서는 건달들이 비신사적으로 애를 패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그 광경을 쳐다본다. 그가 누구인지, 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 없는 사나이는 묘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언제나 판초를 걸치고 짧은 시가를 피우면서. 이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총잡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원한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변방에서 영화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한 인물이 엔니오 모리코네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웨스턴 음악을 얘기할 때 더 훌륭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나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8)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음악은 더 원숙해졌고, 사운드 면에서도 웅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야의 무법자> 사운드트랙이 점하는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머지 모든 작품들의 원형이자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강이 시작되는 발원지처럼 <황야의 무법자>는 영화음악가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과감한 시도가 전체적인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경우이다.

<황야의 무법자> OST LP. 이 음악으로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음악의 대부로 우뚝 선다.<석양의 무법자>의 OST LP. 한국 영화 <놈,놈,놈>의 원조격인 영화다.

모리코네라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걸 제로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음악가는 없었지만, 할리우드 텍스트들을 보면서 어떤 음악이 좋은가를 연구했다. 그는 특히 웨스턴 음악의 거장인 디미트리 티옴킨의 음악을 많이 참고했다. 특히 <리오 브라보><OK 목장의 결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 영화의 스타일은 다르다. 음악도 음울한 분위기에서 장쾌한 분위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모리코네는 어떻게 하면 서부라는 분위기와 마초다운 남성성을 살릴 것인가에 주목했다. 또한 할리우드와 달리 예산상으로도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황야의 무법자>는 저예산으로 제작되어야 했고, 음악에서도 풀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궼 오케스트라 대신 악기 편성의 전체적인 규모를 가볍게 가져간다. 전자 기타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운드들이 고전적인 관악 편성을 대신한다. 거기에 휘파람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종소리와 총소리가 간간이 긴장감을 주며, 남성들의 묵직한 보이스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렇게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시원하게 울려 퍼진다.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처럼,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전혀 다른 형식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충격을 동시에 선사한 것이다.

작업 과정도 남달랐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례적으로 영화 촬영이 끝나기 전에 모든 스코어들을 작곡했다. 레오네가 음악을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여기고 작업 시간을 단축시켜줄 것을 요청한 탓이다. 그래서 음악이 영화에 맞춰서 따라간 게 아니라, 음악에 맞춰서 촬영한 필름들을 편집하는 방식으로 후반 작업이 진행되었다. 음악의 독창적 분위기를 살리고 곡들의 길이에 맞추다 보니 각각의 신들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실린 클로즈업 커트들이 훨씬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같은 커트를 반복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자연스레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낳게 되었다. 마치 연출과 음악이 대화라도 나누듯이 치밀하게 구성한 것 같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름 없는 사나이’가 등장하는 특이한 영화 <황야의 무법자>는 장르나 음악 모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모리코네의 곡은 유행가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휴고 몬테네그로 같은 악단들은 베스트셀러 음반을 냈으며, 아이들은 거리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주인공과 동일화됨을 느꼈다. ‘이름 없는 사나이’와 같은 캐릭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렇게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대가 열렸다. 이탈리아 패션처럼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었다.



[Tip 1] <황야의 무법자>에서 캐스팅을 거절했던 헨리 폰다와 찰스 브론슨은 후일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찍으며 비로소 레오네와 함께 일하게 된다. 도입부에서 ‘하모니카 맨’ 찰스 브론슨이 황량한 기차역에서 들려주는 연주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Tip 2] 서울아트시네마는 특별전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작품 몇 개를 아예 구매를 해버렸다.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할 수 있는 권리를 구입한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다시 뜬 깨끗한 프린트를 국내에서도 소장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다음번에 다시 레오네 작품들을 상영하게 된다면 연대기별로 관람하기를 바란다. 레오네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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