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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 신파, 지독한 사랑(2/2)
처음 우울증이 어떻게 왔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멍한 눈빛이 된 그녀가 툭 던지는 대답이 의외였다. “사랑 때문에요.”
사실 조안으로부터 세 번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내가 참을성 있게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했던 데에는 그녀의 우울증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리빙 라이브러리〉 현장에서 계속 대출 요청을 받아 끊임없이 바빴던 조안이 잠시 차를 마시러 나온 사이 재빠르게 ‘처음 우울증이 어떻게 왔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멍한 눈빛이 된 그녀가 툭 던지는 대답이 의외였다. “사랑 때문에요.” 하마터면 나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사실 조안으로부터 세 번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내가 참을성 있게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했던 데에는 그녀의 우울증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리빙 라이브러리〉 현장에서 계속 대출 요청을 받아 끊임없이 바빴던 조안이 잠시 차를 마시러 나온 사이 재빠르게 ‘처음 우울증이 어떻게 왔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멍한 눈빛이 된 그녀가 툭 던지는 대답이 의외였다. “사랑 때문에요.” 하마터면 나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사랑 때문에 우울증이 걸려 정신질환을 앓는 오십 대 여자가 있다니. 그럼에도 진지한 조안을 보니 다른 이들에겐 유치하고 통속적인 드라마일지 몰라도, 사랑의 끝에 찾아온 지독한 후유증에 아파하는 오십 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왠지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난한 인터뷰 약속 파기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기다릴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한숨 쉬듯 내뱉었던 ‘사랑’이란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조안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데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낯선 타인에게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해도 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분명 일상도 소화해내기 버거운 그녀가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 출신이냐?’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고 예전에는 어디 살았느냐’는 쉬운 화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집 이야기와 함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원래 햄스테드 히쓰Hampstead Heath 출신이고, 결혼하고도 그 동네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어요. 젊었을 때는 그 동네에서 내 손으로 만든 옷을 파는 작은 양품점을 열었죠. 그게 대박이 나면서 앤틱 패션과 보석까지 손을 댔어요. 그렇게 한참 잘나갈 때 헤어 드레서인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당시 영국 최고의 헤어 드레서였다. 런던에서도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동네에서 일을 했고, 비달사순에서 강의를 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남편. 특히 커트는 영국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몇십 년 전 그 시절, 그의 커트 가격이 50파운드(약 10만 원)였는데도 꼭 그에게만 머리를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을 정도였다.
잘나가는 동갑내기 젊은 의상 디자이너와 헤어 드레서의 로맨틱한 만남. 게다가 아직 그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이십 대였다. 불 같은 연애를 거쳐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동시에 사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조안은 남편과 함께 런던 시내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메이페어Mayfair’ 안에 있던 헤어 & 뷰티 살롱을 인수했다. 남편은 헤어를, 조안은 뷰티를 맡았다. 그리고 철저한 고급화 전략으로 손님을 끌기 시작했다. 젊고 감각 있는 이들 부부는 금세 유명해졌다. 그들의 살롱은 유명한 영화배우나 연예인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그들은 누가 봐도 잘나가는 최고의 커플이었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될수록, 돈을 많이 벌수록 결혼 생활은 오래된 가구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공식적인 자리나 외부세계에서는 누구한테나 친절한 영국 신사였고,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영리한 사업가였지만 집에만 오면 180도 달라지더군요. 괴팍한 성격도 성격이지만 질투심이 강하고 소심했어요. 아내인 저에겐 무례했고, 아이들에겐 무관심했어요.”
남들이 볼 때 조안은 부자 동네에 좋은 집과 화려한 직업을 다 가진,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모님이었다. 거기다 예쁜 아들 하나, 딸 하나까지 두어 모든 친구들이 너는 참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남들이 조안의 인생을 화려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녀의 마음속 함선은 조금씩 침몰해갔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지옥 같았고, 재미 따윈 온데간데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때문에 이혼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자식들에게 이혼한 엄마, 아빠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참고 견디며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파경의 씨앗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싹을 틔웠다.
어느 날, 남편의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수첩. 거기에는 남편이 결혼 후 투자한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그만의 재산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수첩을 전부 읽기도 전에 조안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둘이 열심히 일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은 혼자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신이었다. 철저한 배신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부의 끈끈한 애정이 식은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기본적인 신뢰마저 무너졌다. 그 순간 조안은 선 하나를 그었다. 이런 남자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겠다고. 이제 헤어질 때가 온 것이라고.
“정말 신파 같은 이야기죠? 나도 유치하고 통속적인 거 참 싫어하는데, 가끔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로 내 인생 자체가 신파인 거 같아요.”
나는 조안의 마음속 병이 여기서 생겼으리라 짐작하고 가슴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안은 이혼 후 오히려 그녀의 삶에 환한 빛이 찾아왔다고 밝게 말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것 같더니 행복한 표정이 얼굴 가득 퍼진다. 아이들을 자주 못 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결혼생활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헤어져 보니 더욱 확연해졌다. 조안은 원래 전공을 살려 작은 신발 가게를 차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펑키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젊게 살며 잃어버렸던 여유와 자유를 되찾았다. 주말이면 살사 춤을 추러 다녔고, 친구들과 와인 파티를 벌였다. 조안은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절정의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에 말이다.
“이탈리아 남자였어요. 정말 멋진 남자였는데, 뭐랄까, 난생처음 해보는 불꽃 같은 사랑……. 최고의 연애였죠.”
조안이 제2의 인생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은 캠던 마켓Camden Market은 런던을 찾는 이방인에게도 명소인 젊은이들의 거리다. 카페와 펍도 많고 예쁜 와인바도 많은 곳. 그중에서도 조안이 유독 좋아해서 자주 들렀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늦은 아침을 먹기도 하고, 혼자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기도 했다. 그곳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어떤 날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들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곳에 자주 오는 어떤 남자와 자꾸 마주치기 시작했다. 멜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설레는 만남. 조안이 들어가면 그는 예의 바르게 일어나 자기 자리를 내주기도 했고, 손님이 많을 때는 둘이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캠던에 커피숍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신사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둘은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가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장대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우산도 없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어요. 그날따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죠. 도로는 빼곡히 들어선 차들로 꽉 막혀 움직이지도 않았어요. 차들의 행렬 어디에 섞여 있는지 기다리는 버스는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이 끔찍한 빗속에서 얼마나 더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이놈의 구질구질한 인생이 정말로 슬퍼져서 눈물이 핑 도는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따뜻하게 말을 건넸어요. 이렇게요. ‘우리 비도 오는데 와인 한잔할까?’”
그날 밤 이후 그들은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오십 대의 조안은 두근거리는 십 대 소녀의 마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어떤 거였을까? 그를 몇 시간만 안 만나도 명치끝이 뻐근해지고 너무 그리웠으니 불꽃보다 화려하고 뜨거운 사랑이라 해야 할까? 그와 함께라면 고리타분한 흑백 고전영화도 마냥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허름한 펍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불안하지 않았으니 완숙한 연애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른의 몸속에 살고 있는 소년과 소녀가 만나 풋풋하게 치렀던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안에게 그 남자는 삶의 전부였고, 이제야 만난 인생의 반쪽임이 분명했으니까. 그녀가 50년 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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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저12,4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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