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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고리오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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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과 출세와 아슬아슬한 범죄에로의 초대에 관한 소설처럼도 보이고, 씨 뿌려 생명을 낳는 자의 고통에 대한 글처럼도 보이는 『고리오 영감』은 내게는 대도시, 수도, 파리에서의 생존 문법과 성장에 관한 사회학적인 글로 보인다.

이 글은 지난번 YES24 독자 만남 행사(「런던이 궁금하니? 런던 대신 정혜윤을 들려줄게」 보러 가기)에서 저에게 질문을 하셨던 분들 중 두 분, “진짜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서른한 살 그녀와 “우리는 그저 책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게 아닐까요?”라고 하셨던 하얀 와이셔츠의 깔끔한 그를 생각하며 씁니다. 아마 흰 와이셔츠의 그가 끝맺지 않은 문장 뒤에는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질문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 뒤로 쭉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가 되고 싶은 우리, 책을 읽는 우리, 그런데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우리. 그때 말로 하지 못했던 것을 글로 씁니다.

***
 


 

우리들의 하숙집도 사랑과 부모의 헌신, 출세에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고급 하숙집(사실은 싸구려인) ‘보케르 집’에 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숙집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고등어를 발라먹으며 올림픽의 애국가, 움베르토 에코, 스티븐 킹, 이상문학상, 반짝거리는 포장지에 쌓인 크리스마스 선물, 고액 과외, 고시원, 주식, 파업, 고향의 아주 예쁜 여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사랑, 효도, 출세(성공)란 주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진부한 청(소)년이었던 우리는 젊고 순했고 손을 더럽힐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밤 깊은 학교 앞 거리를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으로 정처 없이 걸어 다니기만 했다. 그때 비슷비슷한 모양의 하숙집들의 창문들, 끝없이 달려드는 버스들, 학생들의 튼튼하고 무거운 가방들은 내게 ‘이곳이 서울이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나에게 대도시의 감각은 보들레르가 ‘사랑 그것은 매춘에 대한 취향이야!’라고 말한 그 말의 느낌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대도시에 이르러 부르주아니 소부르주아니 소시민이니 하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고, 인생에 승자와 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름없던 유년 시절과 고향의 조용한 냇물을 그리워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욕망과 동떨어져 사는 삶을 종종 동경할 줄 알게 되었다. 줄타기 곡예사의 슬픔을 알게 되었고, 내면의 처절한 갈등과 모순에 대해 알게 되었고, 타락에도 비애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비참한 사랑과 유혹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순수한 열정은 언제나 치욕당할 수 있었고 갈망은 죄의식을 동반했다. 양심이란 말을 들을 때는 종종 가슴이 두근거렸다. 옆방 룸메이트가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그런 평범한 밤에도 학생들은 취했고 자주 가로등 밑에 쓰러져 울곤 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겨울날의 메마른 나뭇가지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애타는 마음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거리는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가로등은 저마다 그 밑에 쓰러져 우는 학생들을 성심 성의껏 비춰주었다. 아니 어쩌면 적나라하게 비춰주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쓰러져 우는 사람을 보고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가방을 들어 드릴까요? 택시를 잡아 드릴까요? 휴지를 드릴까요?”라고 묻곤 했다. 아마 우리는 그때 눈물 흘리는 자가 있는 곳은 범죄가 시작되는 현장이란 걸 알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대도시의 범죄―누군가 혹은 모두가 부패하거나 타락하거나 헛되이, 혹은 아주 빨리 늙어간다는 것(그 해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대도시의 범죄 리스트를 파란 노트에 작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머지않아 이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공범 또는 희생자가 될 것이란 것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처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로는 절박했고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우주와 대도시는 우리에게 어쩌면 호의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젊었기 때문에 세상과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또 아주 젊었기 때문에 마음 한편에서 오로지 그것만을 갈망하기도 했었다. 세상과 나를 진심으로 한번 사랑해 보기만. 혼란스러운 내면이 뜨겁게 불타올라 날개 단 영혼으로 승천하길. 공중부양 한번 해보길. 아주 늦기 전에. 배우, 관객, 주인공, 무대. 연극의 여러 요소 중 당시의 나는 내 스스로를 텅 빈 무대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아무도 찾지 않은 무대. 그런데 누구든 올라오면 일단은 뛰어놀게 해주리라. 제일 먼저 뛰어오른 게 바로 대도시였던 것 같다. 대도시의 경험은 최초엔 나의 평범함에 대한 놀라움(나 같은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학교에 가고,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미장원에 다니고, 같은 브랜드의 청바지를 입고, 심지어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이었다. 그런데 나중엔 그 평범함이 좋아졌다. 플라톤이 “선택한 자의 탓이 아니고 신의 탓이 아니고……”라고 말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모험이 시작되는 땅이라고 선언했던 바 그대로의 의미로, 나는 평범한 나와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를 받아들였다. 신의 탓은 아니지만 신적인 것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훨덜린의 말에서 그 막연했던 내 느낌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가장 위대한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으며 가장 작은 것에 의해서도 포용되는 것, 그것이 신적인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 인간 조건은 내가 이 땅에 던져졌다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던져졌다면 솟구쳐 오를 수도 있으리라. 성공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아직 야심이란 걸 몰랐고 대신 열정만은 갖고 있던 우리들은 우리의 젊은 힘을 어디에 갖다 바쳐야 할지 알고 싶어 했다. 나를 통째로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 무엇을 위해 노력이란 걸 하고 싶었다. “눈을 감은 채 나 자신을 불의 신인 태양에게 바쳤었다”라고 랭보가 썼을 때, 그도 우리처럼 악취 나는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즈음에 『고리오 영감』을 처음 읽었던가? 1819년대의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배신과 기회주의와 기회의 땅 파리에 나만큼 어렸던 으젠 라스타나크가 도착했다. 『고리오 영감』의 으젠 라스타나크는 적어도 나보다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고 쾌활했다. 그렇지만 그는 『고리오 영감』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도 우리처럼 뭔가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럼 누가 주인공일까? 고리오 영감? 그도 아니었다.

어느 한 해 허리까지 닿는 치렁치렁 긴 머리 여인이 학교에 등장했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했다. 그녀는 깨끗한 옷차림으로 학생식당에 나타나 거울을 꺼내놓고 식당 불이 꺼질 때까지 한없이 윤기 나는 까만 머리에 빗질을 해대는 한 동작만 했다. 우리는 아무도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감히 부르지 못했다. 대신 그녀를 ‘공작부인’이라고 불렀다. 거울 앞의 그녀는 완벽하게 행복했고 우아했다. 그녀에게는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법대생과 약혼을 했는데 어느 부유한 가문의 예쁜 외동딸에게 애인을 뺏긴 뒤 법대생의 모교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는 둥 모두가 그렇고 그런 소문이었다. 어느 날 속이 좁고 젠체하기 좋아하는 남학생이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그녀의 거울을 뺏었다. 그때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딱 한마디만 속삭였는데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눈엔 그녀가 복화술사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내뱉은 말은 그대로 나에게 천둥번개가 되었다.

“너도 너를 한번 비춰볼래?”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손거울은 만화경이자 파노라마, 드라마의 무대. 원형극장, 룬문자와 마법의 용어로 기록된 기억을 퍼 올리는 통, 해리포터의 팬시브가 되었다. 나는 잠깐 그녀를 펄쩍 뛰어오르며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무녀로 상상했던 것도 같다. 그녀는 내 상상 속에서 텅 빈 진공 상태에 놓여 있지 않고 온갖 오색찬란한 상황 아래 놓여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유달리 윤기 나는 까만 머리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머리를 빗는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사회의 피조물 하나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발자크는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모든 게 상황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리오 영감』에서 저 높은 곳에서 파리를 내려다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보트랭은 이렇게 단언한다. “원칙이란 없다. 오로지 상황만 있을 뿐.”

그날 나는 그녀가 손거울을 내 손에 쥐여주길 두근거리며 기대했었다. 그런데 세상은 거울 속에서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에 내게 일어난 일을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세상이 커지면 내가 작아지고 내가 커지면 세상이 작아지는 반복되는 곡선이 나타날 것 같다. 세상과 내가 딱 맞아떨어지는 접점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한 점 불빛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적지만 많다’라고 표현할 만한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불빛 수집가 겸 그 불빛들이 결코 꺼지지 않게 지키는 내 부뚜막의 여사제가 되길 갈망했다.

세상과 나는, 그때의 푸르게 젊었던 우리들은 계속계속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그건 끝이 없는 문장을 보는 것과도 같다. 언제나 다시 시작인 문장. 그래서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문장. 으젠이 고리오 영감을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은 후 한 말,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는 완결된 문장도 아니고 마음의 결심에 관한 문장도 아니다. 한 사람을 묘지에 묻고 바라본 도시의 전경은 아마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해서 도시가 속 깊은 상실감 때문에 변할 리는 없다. 변할 수 있는 것은 도시 앞에 서 있는 우리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본 우리뿐이다.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시선이 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새삼 묻는다. 과연 상황만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 있는가?

야심과 출세와 아슬아슬한 범죄에로의 초대에 관한 소설처럼도 보이고, 씨 뿌려 생명을 낳는 자의 고통에 대한 글처럼도 보이는 『고리오 영감』은 내게는 대도시, 수도, 파리에서의 생존 문법과 성장에 관한 사회학적인 글로 보인다. 마치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통해 파리의 하수구에 기념비를 세웠듯이, 에밀 졸라가 『테레즈 라캥』을 통해 파리의 파사드에 기념비를 세웠듯이,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통해 파리란 도시의 뒷골목과 대로에 기념비를 세웠다. 발자크는 ‘호적과 경쟁한다’는 모토로 사회의 모든 피조물들을 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본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발자크는 파리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 파리는 진짜 큰 대양이다. 그래서 거기에 수심측정기를 던져보아도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이 대양을 답사해서 묘사해보라. 답사하고 묘사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쓰고 바다 탐험가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큰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처녀지, 알려지지 않은 동굴, 꽃, 진주, 괴물 그리고 잠수부 노릇을 하는 문인들이 잊었던 전대미문의 사건 등을 그곳에서 항상 만날 수 있다.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도 이런 흥미롭고 기괴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 이곳에서의 연애는 본질적으로 허풍떨고 뻔뻔스러우며 낭비적이고 엉터리이며 호사스러운 것이다. 파리라는 풍토에서 여자는 단지 정신과 관능만을 만족시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인생을 구성하는 수많은 허영심을 충족시킬 큰 의무를 지닌 사실을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
연애는 종교이다. 이 종교 의식은 다른 모든 의식보다 더더욱 비용이 많이 든다.


- “벼락출세하는 게 자네 같은 경우에 처해있는 오만 명의 청년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일세. 자네는 이 숫자의 한 단위에 불과하지.”(보트랭이 으젠 라스티냐크에게)

곰팡이 냄새, 비계 썩는 냄새, 부엌과 식기실과 요양원과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보케르 하숙집에 으젠 드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장차 이 사회의 일인자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앙굴렘에서 올라왔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관찰력과 총명한 두뇌를 가진 싱싱하고 날씬한 법대생이었다. 그의 고향집 포도나무 자라는 작은 땅에선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 생, 두 누이, 숙모가 그의 출세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보케르 하숙집엔 으젠 외에도 예순아홉 살쯤 먹은,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었다는 몰락한 전직 제면업자 고리오 영감. 배, 바다, 사업, 외국인, 법률, 관청, 감옥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는 정체불명의 보트랭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살거나 저녁을 먹으러 드나들었다. 안주인은 보케르 부인으로, 그녀는 교회의 살찐 쥐 같은 용모에 겨울의 첫 서리 같은 성품을 가진 치사하고 잇속에 밝고 밉살스러운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들 하숙생 일동은 저마다의 불행과 가난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서로의 고통을 덜어주기엔 자신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들의 가난 때문에 남들의 끔찍한 고통 앞에서도 냉정하거나 태연할 수 있는 걸로 이야기된다. 만약 우리가 무관심에 관한 주제로 한 편의 글을 쓴다면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키는 어떤 균이 날아다니는 전염성 짙은 질식할 것 같은 공기와 보케르 하숙집의 저녁 식탁 풍경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무관심의 속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다면 무관심한 사람은 어딘가 서로 서로 닮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관심한 사람들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뿌리 없는 사람들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신이다. 보케르 하숙집 사람들도 어딘가 서로 다 닮았다.

그런데 고리오 영감에게 복숭아같이 아름다운 두 딸―-레스토 백작 부인과 뉘싱겐 남작부인―이 있었다. 사랑하는 부인을 일찍 잃은 고리오 영감은 일생을 금지옥엽 딸들을 위해서 헌신했지만 두 딸과 사위들(백작과 은행가 남작)은 제면업자인 고리오 영감을 부끄러워하며 내치게 된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으젠이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해 고리오 영감의 두 딸 중 동생인 뉘싱겐 남작부인 델핀에게 접근하면서 고리오 영감과 으젠, 보트랭의 인생이 엮이게 된다. 이 일들은 대략 1819년 11월 말경부터 전개된다. 1819년 이후의 사랑과 출세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게 말로 표현한 것은 보트랭이다.

“파리에서 행세하려면 말 세필 이외에도 낮에 탈 수 있는 이륜마차와 밤에 이용하는 이인승 사륜마차가 필요하지. 거마비로만 적어도 구천 프랑이라네. 게다가 의상값으로 삼천 프랑, 향료 값으로 육백 프랑, 구두 값으로 삼백 프랑, 모자 값으로도 삼백 프랑이 들게 마련이네. 그 비용을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네. 게다가 세탁집 여주인에에게 천 프랑을 지불해줘야 하네. 유행을 좇는 젊은이라면 내복 종류도 모두 갖추어야 하네. (…) 연애와 교회는 모두 멋진 제단보를 필요로 하거든. 이제까지 계산한 것만도 일만사천 프랑이나 된다네. 자네가 도박이나 선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에 안 넣고 말일세. 용돈으로 이천 프랑은 준비해야하지 않겠나? (…) 그렇게 꼭 필요란 것 외에도 애완동물 사료 값으로 삼천 프랑, 개집 값으로 천 프랑을 보태보게. 자 여보게. 일 년에 꼭 이만오천 프랑은 옆구리에서 나와야 된다는 말일세. 안 그러면 곤경에 빠져 남한테서 비웃음을 사지. 미래와 성공과 정부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네.”

보트랭은 남작부인인 델핀 대신 머잖아 어마어마한 돈을 상속받게 될 빅토린이란 처녀를 유혹해 결혼하라고 으젠에게 충고하는데(그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마음이 순결하고 신앙심 좋은 가난뱅이 처녀인데, 보케르 하숙집에 살다가 훗날 극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그런데 그건 보트랭이 은밀하게 사주한 피 묻은 범죄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 보트랭의 철학은 이렇다.

“모든 사람들과 대적해서 혼자 싸우고 또 행운을 거머쥔다는 것은 멋진 게임이 아닌가? 나는 이 사회가 지닌 무질서한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네. 세상만사를 궁리한 끝에 취할 길이란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네. 어리석게 복종하든지 아니면 반항뿐이지, 나는 아무것에도 복종하지 않네. 우리는 몹시 배가 고픈데 우리 이빨은 날카롭네, 어떻게 우리 식량을 마련할 수 있겠나? 욕망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늘 바라기만 한다는 것은 진절머리 나는 일이네. 우리는 사자같이 뜨거운 피와 하루에도 여러 번 어리석은 짓을 할 만한 욕망을 가지고 있네. 자네는 고리오 영감 딸인 레스토 부인 집에 가서 파리 여성의 냄새를 맡았어. 그날 자네는 이마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적어서 돌아왔네. 그 단어란 <출세>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브라보! 내 마음에 드는 쾌활한 녀석이구나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네. 자네는 돈이 필요했어. 어디서 그것을 구했지? 자네는 누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했어. 오빠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이의 것을 사기 치는 것일세. 벼락출세하는 것은 자네 같은 경우에 처해 있는 오만 명의 청년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일세.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사람들은 천재의 위력에 굴복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비방하려고 들지. 왜냐하면 천재는 분배하지 않고 독점하니까 말일세. 타락은 힘을 얻고 재능은 희귀한 것일세. 타락이란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함의 무기이고 자네는 이 타락의 첨단을 여러 곳에서 느낄 걸세. 파리에서 자네가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지옥 같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네. 성실한 인간은 모든 사람의 적이 되어버렸네. 나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쫓은 둔재들의 집단이라고 부르고 있어. 나는 이 선량한 사람들의 주름살을 보네.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가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시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내가 이처럼 자네에게 세상 애기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세상을 알고 있네. 나는 위대한 시인일세. 내 시는 글로 쓰는 게 아니라 행동과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네. 돈키호테처럼 나는 강한 자에 대항하고 약한 자를 보살피는 것을 좋아하네. 원칙이란 결코 없네. 단지 사건들만 존재한다네. 법률이란 없네. 오로지 상황만이 있을 뿐이지. 뛰어난 사람은 사건과 상황에 순응해서 그것을 조종하는 법이야.”

보트랭의 이 대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으젠이 일찌감치 나의 열렬한 관심에서 벗어난 이유는(그가 적어도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앵처럼 자존심 덩어리였다면 더 끌렸겠지만) 나 자신이 어쩌면 ‘벼락출세’에 아예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벼락출세’가 그 시절보다 훨씬 불가능한 사회(나는 우리 사회가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사회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에 살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그보단 집요한 노력을 통해서 자기 긍지를 갖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임을 맘 속 깊이 믿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도 으젠에게 완전히 눈을 뗄 수는 없다. 선량하고 정이 많고 젊고 호감 가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에 감동할 줄도 알고 신을 믿고 남몰래 선행을 하고 돈에 관심은 있어도 크게 집착하지 않고 병든 노인을 정성껏 돌봐주고 단순하면서도 마음이 모질지 못한 청년인 으젠에게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원칙이란 없을까? 상황뿐일까?’ 계속계속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트랭은 『고리오 영감』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고 으젠의 유혹자이자 잔인한 논리학자, 냉소주의자, 인생의 모든 것을 아는 무시무시한 스핑크스, 루소의 후계자로 묘사되는데 그는 회의주의자이다. 그런데 내게는 보트랭이 『고리오 영감』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보인다.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의 날개 밑에서 하나의 맥락을 갖는다. 앞에서 인용한 보트랭의 말을 듣고 으젠이 보인 반응을 보면 으젠이 수동적이고 매력 없고 맥 빠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보트랭의 말에 끌리기도 하고 혼란과 무서움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 으젠이 교양소설의 또 하나의 강력한 주인공이라면 강철 늑대 같은 보트랭과 단호한 대립 구도를 세웠을 것이고, 범죄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보트랭을 기꺼이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둠을 숭배하는 불길한 사제 같기도 하고 신성 도시의 이교도 같기도 한 보트랭의 힘은, 그가 사실은 범죄자인데 동시에 고발자이자 냉정한 탐색자란 데서 나온다. 나중에 보트랭의 정체는 불사신이란 별명을 가진 자크 콜렝이란 이름의 일만 명 대도들의 은행가 겸 탈옥수로 밝혀지는데 보케르 하숙인들 앞에서 경찰에 체포될 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장자크 루소의 애기처럼 사회계약이 지닌 뿌리 깊은 기만에 반항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오. 요컨대 나 혼자만이 재판관과 헌병과 예산 집행관에 대해 정부에 반항하고 있소. 나는 놈들을 놀리고 있소.”
(보트랭이 체포될 때 공중에 펄쩍 뛰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차분해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그가 마치 한 비밀결사의 숭배를 받던 신이었던 남자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보트랭은 가장 은밀하고 잔인하게 남을 이용해 먹고 타락을 권하는 범죄자지만, 그가 냉정하게 도전했던 그 자본주의 사회는 그 뒤로도 그와 같은 결핍과 그와 같은 증오와 그와 같은 갈망을 가진 수많은 이름 없는 다채로운(사회구조의 불합리의 결과로서의) 반항아들을 탄생시켰다. 『고리오 영감』의 무대가 되는 시간대에서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이고 질서 정연한 것의 지루함과 폭력성에 대해서 알고 있고, 성공과 패배의 환멸감도 알고 있고, 순종적이기만 한 것의 생기 없음도 알고 있고, 대도시의 수많은 범죄가 차별에서 발생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법이나 힘, 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자의 논리 안에 범죄와 기만과 위선과 악덕뿐만 아니라 미덕도 복잡하게 섞여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반항만이 활력과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도 모른다. 이 저항하는 사람들의 매력은 우리에게 습관이 되어버린 정신이 있음을, 그저 굴종하려는 습성이 있음을, 고통을 참는 것보다 고통의 성격을 바꿔버리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위장된 평화 안에 고발해야 할 것이 있음을 일깨워 주는 데서 나온다. 하루 해가 지고 달무리가 달을 감쌀 때, 나 역시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슬픔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지나쳐 가는 슬픔을 보내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왜 슬플까?’ 고통 속에서 뭔가를 얻어낼 힘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자신에게 되묻는다. 그럴 때 우리는 아직은 늙지 않은 보트랭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게 정말로 개개인의 진리가 의미 없는 세상일까? 조용한 노예 상태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원한다는 것의 한계는 어디일까? 대가를 치르지 않고 뭘 얻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자유로우려면 얼마만 한 큰 힘이 있어야 할까? 현실의 불합리를 단 한 순간이라도 이용하지 않고도 저항이란 걸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정말로 ‘원칙이란 없고 상황만 있는가?’ 여부는 이 소설 끝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소설의 끝에서도 상황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앞에서 이 글을 성장소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글에 성장은 없다. 오로지 상황만 있다. 으젠은 계속 상황에 휩쓸리기만 하고 아직 성찰을 하지도 질문을 하지도 크게 괴로워하지도 변화하지도 않고 있다. 으젠은 어쩌면 순식간에 늙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성장 없는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자꾸만 인간은 언제 성장하는가를 묻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장의 순간은 가장 불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 뭔가를 거부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엄청난 의지를 보이는 것, 어렵게 얻은 것을 귀히 여기는 것, 자기 스스로에게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고집스럽게 자기를 변화시키려하는 것.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망을 갖게 되는 것, 그러나 나 혼자서는 아무런 결과물도 낼 수 없다는 걸 아는 것, 타인의 존재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기 선택에 삶 전부를 건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 능력은 기회들의 누적분이란 걸 아는 것, 빛의 흐름과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 되는 것.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 나는 인간의 성장을 믿듯이 원칙이란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상황에 저항하는 원칙. 현실이 명백히 존재한다면 그에 반항하는 패러다임도 명백히 존재한다. 상황만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세계관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런 말을 신봉한다.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가능성의 저울을 매번 가장 나쁜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보다 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만다. 수정궁이 지옥의 환상으로 변해감에 따라 증대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그래도 우리는 발자크를 위대한 소설가로 존중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의 열렬한 관찰자였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왜 성장해야 할까? 우리가 서로 묶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랑이란 이름으로 묶이게 될 타인들이 지금도 내 눈 앞에 있다. 세상과 독자적인, 고유한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필생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책이란 걸 읽어야 할까? 세상 역시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는 책. 그리고 그 책 세상에선 독자도 작가만큼 고통받는다. 그리고 작가만큼 고통받기를 자처해야 한다. 그는 결코 한낱, 지나가는 독자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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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 저/<박영근> 역9,0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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