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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1930년대 고품격 막장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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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는 한자로 三代, 즉 한 집안의 세 세대를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주인공은 세 사람으로, 돈 많은 거부 조의관과 그의 아들 조상훈, 그리고 사실상 관찰자적 주인공 입장에 가까운(소설은 삼인칭 전지적 시점입니다만) 조덕기입니다.

고단한 하루를 끝낸 사람들이 집에 와서 모이는 곳은 거실 TV 앞입니다. 가끔은 과일도 깎고 가끔은 음료도 마시면서 옹기종기 모여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보는데, 역시 하이라이트는 뉴스 끝난 직후에 벌어지는 방송사 간의 드라마 경쟁입니다. 월화 드라마, 수목 미니시리즈 등으로 편성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 드라마 시청률 경쟁이야말로 방송가 안팎을 좌지우지하는 힘겨루기입니다.



 

비단 TV만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온라인 주요 포털들은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웹툰과 칼럼을 통해 유저 사이의 페이지뷰 경쟁을 펼치고 있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가 보면 주요 신문사의 만평들이 이끌어 온 인기도 매체 간의 경쟁 요소였습니다.

오늘은 그 미디어 간 경쟁의 아주 오래전 한 축을 이끌었던 소설 한 편을 돌이켜 보려 합니다. 1930년, 가장 대중적인 매체가 신문이었던 시절 한반도의 양대 신문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당대의 소설가 두 명을 전면 배치하여 연재소설 전쟁을 벌입니다. 동아일보는 이광수의 『흙』, 조선일보는 염상섭의 『삼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중 염상섭의 『삼대』를 들춰 보고자 합니다.

『삼대』는 한자로 三代, 즉 한 집안의 세 세대를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주인공은 세 사람으로, 돈 많은 거부 조의관과 그의 아들 조상훈, 그리고 사실상 관찰자적 주인공 입장에 가까운(소설은 삼인칭 전지적 시점입니다만) 조덕기입니다. 소설은 약 10여 달에 걸쳐 신문 연재를 통해 이 세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풀어나가면서 독자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소설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도 현실성이었고, 그 현실성 덕택에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명작의 반열에 손꼽힐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조덕기는 갑부 집안의 자제로, 당시 좀 있는 집안이라면 누구나 기본 코스였던 일본 유학을 하고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소설은 있는 집 자식인 조덕기가 방학을 맞아 잠시 조선에 돌아오는 지점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려지는 『삼대』 속의 조선은 정말 1930년대의 조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는 아시다시피 일제의 무단 통치가 서서히 ‘황국 신민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윽박지르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 식민지인을 일본인의 하위 계층으로 편입하려 했던 이러한 시도는 『삼대』와 같은 소설의 자유로운 인쇄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일제 테두리 안에서의 상거래와 교육 또한 허용했습니다.

특히 주인공 조덕기 집안처럼 어느 정도 돈깨나 있는 집안이라면 그 혜택은 서민과는 또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일본인 서기와도 뇌물로 친해진 사이였고, 지금으로 본다면 일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재벌 집 정도와 맞아떨어질 듯한 위치였습니다. 그런 개념이라면 『삼대』의 조덕기는 이른바 재벌 2세 유학파, ‘엄친아’쯤 되겠습니다.

엄친아 덕기가 귀국해서 맞이하게 된 집안 상황은 그러나 좀 꼬여 있습니다. 소설의 두 번째 재미는 바로 이 인물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당장 조부 조의관은 아직까지도 신문물과 제도에 마음이 곱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양반 출신은 아니지만, 엄청난 돈으로 족보를 사고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가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명예라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따로 후처를 두어 늘그막에 어린 자식을 보기도 하는 등, 전근대 조선에서 익숙했던 생활양식과 사고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조상훈은 아버지인 조의관과는 일면 비슷하면서도 일면 다른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돈으로 일본도 아닌 미국 유학을 마친 모던 보이이자 인텔리인 조상훈은 심지어 기독교 신자입니다. 신문물의 세례와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기독교 신자로서의 상훈은 인텔리 계층으로서의 일반적인 행동 양태를 고스란히 따라갑니다.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고, 그 선교를 통해 미개한 민족을 개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이기에 조의관과는 잘 맞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훈은 인텔리계층의 또 다른 특징, 위선성 또한 보여줍니다. 가진 재산으로 한편에선 민족운동가를 후원하면서도, 한편에선 그 운동가의 딸과 은밀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의 취미는 노름과 술이고, 이런 방탕함은 집안 재산에 심대한 위협이 되어 조의관과의 관계를 계속 악화시킵니다.

조의관의 손자이자 조상훈의 아들인 조덕기는 그야말로 30년대의 ‘모던 뽀-이’입니다. 동경대학과 와세다를 중심으로 젊은 층에 크게 확산되던 마르크스주의가 소설 속 덕기와 친구들 사이에서 계속 등장하고(당시의 마르크시즘은 혁명론보다도 일종의 지식인에게 필요한 액세서리로도 기능 했습니다.) 신세대 직종이자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판검사, 변호사를 꿈꿉니다. 아버지처럼 방탕하지도 않고 할아버지처럼 핏줄에 집착하지도 않는 덕기는 삼대의 마지막 세대이자 이들 모두의 미래가 되는 입장에서 사건들을 맞이하고 헤쳐나갑니다.

이 오묘한 인물 관계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앞서 말한 현실성과 맞물리며 사건의 전개를 농밀하게 만들어 갑니다. 가진 돈으로 명예를 사고자 했던 할아버지는 세월을 못 이겨 결국 쓰러지고, 이른바 ‘예수쟁이’ 노름꾼인 아들이 가산을 탕진할 것이 두려운 할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합니다. 거기에 할아버지의 늘그막 애첩이 유산을 노리고 암살극을 벌이고, 아들에게 넘어간 유산을 탐내는 아버지는 아들의 재산을 훔치기 위한 방법도 도모합니다. 아, 이쯤 되면 요즘 말로 ‘막장’ 소설일 수도 있겠습니다.

염상섭(1897~1963)
‘막장 소설’이란 말은 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 실제 당시 인기를 겨루었던 라이벌 소설 『흙』 또한 일견 막장스러운 스토리를 다룹니다. 『흙』은 유학파 변호사인 주인공 허숭과 재벌 집 고고한 따님 윤정선이 결혼하고, 따분한 남편에 싫증 난 정선이 남편 친구인 카사노바 김갑진과 바람을 피우다 아이가 생기고, 자살 시도까지도 벌어지는 불륜 치정극입니다. 그리고 실제 당시의 인기는 이런 아리아리한 남녀관계의 묘사가 두드러진 『흙』 쪽이 좀 더 높았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 소재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여튼 『삼대』 또한 그러한 막장스런 분위기를 그려내는 데에는 한몫 빠지지 않습니다. 더불어 『삼대』는 일종의 스릴러물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는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소설은 직접적으로 주인공을 개입시키지는 않으나, 주인공의 절친 김병화의 행적을 그리면서 암약하는 ‘불령선인’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김병화는 조덕기와 동창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독립운동을 숨어서 몰래몰래 진행하는 젊은이입니다. 병화는 특히 앞서 조상훈이 후원하다가 겁탈한 경애와 독립운동 현장에서 만나 사랑을 싹 틔우게 되면서 스토리의 본진으로 난입합니다.

이 두 사람과 관계 인물들이 펼치는 독립운동에 관한 에피소드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치명적인 시선의 함정, ‘영웅화’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독립운동은 결국 독립을 가져왔고, 우리는 그 독립 이후에 세운 정부의 역사 방침에 따라 학습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자체를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삼대』는 그 독립운동을 정말 옆집 아저씨 하는 것처럼 바라봅니다.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면 이렇습니다. 옆집 사는 내 친구가 웬 외계인 지구 방문 운동을 펼칩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데, 어느 날 진짜 그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인류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계인의 지배 이후에 써진 역사에선 나의 그 옆집 친구는 새 시대를 열어준 선각자겠지요.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나’ 는 그를 정말 그렇게 보았을까요?

『삼대』에 등장하는 독립운동 또한 그렇습니다.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소설 속 독립운동은 거대한 결과론을 배제한 채 매우 담백한 서사를 통해 묘사됩니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게 읽히는 『삼대』가 주는 또 다른 재미이자, 색다른 시각일 수 있습니다.

사실 소설가 염상섭의 문체는 국어 교과서에서 만연체의 대표 케이스로 삼을 만큼 질질 늘어집니다. 세로쓰기 신문 지면을 통해 이 긴 문장들이 축축 늘어지는 걸 생각해 보면 참 지루하기 그지없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만하다는 과찬까지도 가끔 나오는 인물들의 묘사(물론 그조차도 매우 지루하고 늘어지게 구사합니다만)와 그 인물들이 이제는 가상이 되어버린 30년대를 살아가는 리얼리티를 그려내는 것만 따라가 보더라도 책 읽는 재미를 아는 독자들이라면, 아니 책 읽기가 싫더라도 드라마틱한 ‘막장’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즐거운 독서가 될 시간의 소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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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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