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다(2/2)
그렇게 ‘여행’이라는 화두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어느 날.
진에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폐쇄적인 남편과 살면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옛 친구들을 찾아내기로 한 것.
그렇게 ‘여행’이라는 화두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어느 날. 진에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폐쇄적인 남편과 살면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옛 친구들을 찾아내기로 한 것. 그들을 찾아 차례차례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친구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통신의 발달이 눈부신 시대가 아니던가. 몇 번의 통화와 편지 왕래로 어린 시절 친구들을 하나둘씩 발견해냈고, 그제야 진은 전국에 퍼져 살고 있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방문하는 여행을 실행할 수 있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순례 여행’ 정도? 전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여행은 자연스럽게 장거리 여행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진은 매 순간 감동했다. 40년 넘게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살던 친구들과의 해후도 물론 감동적이었지만, 혼자만의 여행은 그동안 살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신비의 세계였다.
그걸 시작으로 일상을 훌훌 털고 혼자 떠났다가 돌아오는 진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홀로 미국을 횡단하기도 했으며, 유럽 여행은 셀 수도 없이 많이 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죽이 맞아 끊임없는 수다를 떠는 게 너무 좋았다. 선술집에서 맥주 한잔 기울이며, 낯선 이들과 시와 문학, 음악과 영화를 논하며 그녀는 마냥 행복했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동안, 진에게는 특별한 습관이 생겼다.
그건 바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노트를 꺼내 들고 끼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였다. 결혼 생활 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지만, 일상에 치여 고작 일기 수준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신기할 정도로 글이 술술 써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의외로 시간의 공백이 자주 생긴다. 예를 들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린다거나, 기차가 예고 없이 연착되거나 하는. 언제부터인가 진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시키고 기다리는 시간에 노트를 먼저 펼치게 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습작들이 꽤 쌓였을 무렵, 우연히 한 친구가 진의 노트를 보게 되었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친구였다.
“글이 형편없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이거 나쁘지 않은데?’라고요. 조금만 다듬어서 출판하면 좋겠다고.”
출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 출판이라니. 그건 정식으로 책을 만들어 남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아닌가.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하지?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다고 상상하니, 발가벗은 느낌이 들어 얼굴을 빨개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친구와 헤어진 후, 며칠 동안 ‘출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뱅뱅 돌며 떠나지 않는 게 아닌가. 진은 가출을 할 때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용기를 내 친구를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글은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 거야? 출판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그날 이후 진은 그 친구에게 정식으로 시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무려 23년 동안 단 하루도 글쓰기를 멈춰본 적이 없단다. 노트에도 쓰고, 컴퓨터에도 쓰고, 혼자 프린트를 해 제본을 해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진은 다양한 글쓰기 재미에 푹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고민이 생기거나, 머릿속이 복잡해 정리가 안 될 때마다 진에게 그 골칫덩이들을 들고 찾아오지만 진은 그럴 때마다 글쓰기를 시도했다. 언제부터인가 글쓰기는 그녀에게 더없이 좋은 치유이자 안식이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치유’로서 글쓰기를 해오던 진에게 작년 어느 한 출판사가 접근해왔다. 그동안 썼던 시를 모아 시집을 내보자는 거였다. 그렇게 81살이 되던 해, 다시는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이에 진은 시인으로 데뷔하는 기적을 만났다.
“제 책을 읽고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독자’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오빠 장례식에서 당신의 시를 낭독했어요.’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던 적도 있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어서요.”
그전에도 자신의 책을 묶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작업은 해왔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일부러 자신의 책을 찾아서 읽어줬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읽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해주는 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한 일이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제 정말 진의 인생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진은 불과 4년 전, 상담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78살이 되는 해였다. 사실 60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언제 은퇴를 할 거냐고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계단 올라갈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진 할 거야.”라고. 근데 78살이 되는 해의 어느 날,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말 숨이 가빠오고,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일을 그만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나면 정말 시간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진의 일상은 훨씬 바빠졌다. 우선 은퇴를 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 친구들을 집에 불러 함께 시를 쓰고, 낭독을 하는 ‘시 낭독회’를 한 달에 한 번씩 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번 달에 행사를 끝내놓고 뒤돌아서면 금방 다음 달 낭독회를 준비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낭독회가 쌓이면서 1년에 3번 정도는 이웃들을 초대하는 ‘문학의 밤’을 열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넓었던 인간관계는 훨씬 더 확장되었고 이제 진은 비공식으로 그 친구들의 사적인 상담가가 되었다. 직업으로 운영하던 상담소는 문을 닫은 지 오래지만, 친구들은 늘 무슨 일만 생기면 진에게 연락해서 상의를 해온다는 거다.
“진, 남편하고 오늘 싸웠어,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든가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하겠어?” 같은 사소해 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진의 의견을 구하는 친구들. 그들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진은 그들의 고민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 가며 살아갈 수 있어서 여전히 기쁘다. 그들에게 진정한 친구로 인정받는다는 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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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저12,4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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