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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소녀, 현실에 발을 딛다(2/2)

벌써 싱글맘이 된 지 4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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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세월은 금방 지나갔다.

벌써 싱글맘이 된 지 4년이 지났다. 한동안은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세월은 금방 지나갔다. 베일리는 올해부터 학교도 다니기 시작했다. 예비학교지만, 교복을 입은 아이는 의젓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가족이 달랑 둘이라는 게 한숨이 나올 때도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점은 아이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너무 투명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기댈 곳이 없으니까. 돈을 잃어버렸다거나, 친구와 말다툼을 했을 때,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게 투정을 하고 하소연을 할 수 있을 텐데. 해결은 못 해줘도 위로라도 받았을 텐데. 그러면 아이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까 싱글맘이기 앞서 여자이자 사람으로서 너무 속상한 상황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엄마의 감정 기복에 아이가 영향을 많이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베일리는 속 깊은 아이로 성장했다. 엄마가 우울해하면 어떻게든 웃긴 짓을 해서 엄마를 환하게 웃게 만드는 녀석. 바보 같은 몸 개그를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엄마를 행복하게 만든다. 내가 처음에 봤던 명랑 100단의 생글거리는 웃음을 되찾은 것도 아이의 힘이었다.

주변의 도움도 컸다. 임신을 했을 때만 해도 출산은 결사반대라고 목청을 높였던, 넌 절대 애를 못 키우는 타입이라고 얄밉게 빈정대던 엄마는 최고의 후원자이자 다정한 할머니가 됐다. 지금은 베일리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철없었던 아이의 아빠도 이제는 한몫 거들고 있다. 이 젊은 커플은 부부 관계는 깔끔하게 끝내지만, 베일리에게 아빠를 빼앗는 건 너무 잔인하다는 데 합의했다. 크리스틴은 아이 아빠에게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찾아와서 베일리의 얼굴을 봐도 좋다고 허락했고, 어느새 수요일은 아빠의 날로 굳어졌다. 전 남자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아침에 베일리를 데려가서 저녁을 먹이고 다시 데려다 준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아빠에 대한 부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언젠가는 베일리도 이게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저는 이 상태가 훨씬 좋은 거 같아요. 아이 앞에서 엄마와 아빠가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따로 살면서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크리스틴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대단히 아프고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많이 외로웠다. 엄마, 아빠가 다툴 때, 서로 미워하는 모습을 볼 때 그녀도 형제나 자매가 있었으면 싶었다. 외동딸이라는 게 참 외롭고 쓸쓸한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자랐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크리스틴은 언제나 연애에 목이 말랐다.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서, 불 같은 연애를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미친 듯이 사랑을 갈구하며 찾아다녔으므로 베일리 아빠를 만나기 전에도 여러 번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마다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할 때마다 큰 상처는 그녀의 몫이었고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몇 배로 커져버린 외로움이었다. 그러다가 베일리 아빠를 만나, ‘와, 이건 정말 다르다.’고 느꼈다. 그전의 연애와는 달리 이번만은 진짜일 것 같았다.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데 긴 터널을 지나면서 깨달았어요. ‘나는 사랑은 꼭 불꽃 같아야 한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나는 어쩌면 사랑 그 자체보다는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을 지도 모른다고요.”

크리스틴은 지금까지 사랑을 꼭 해결해야 할 과제처럼 여겼다. 그래서 늘 조급했고 불안했다. 그런데 베일리가 태어나면서 거짓말처럼 모든 게 바뀌었다. 마음은 충만해졌다. 별로 급할 게 없어졌다. ‘남자가 뭔데?’ 하는 여유로움이 생기고 주변의 좋은 친구들도 눈에 들어왔다. 만날 삐딱하게 대립만 해오던 엄마와도 비로소 화해를 하게 되었다. 어쩌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또 엄마를 그렇게 미워했던 건 본인이 너무 엄마를 닮아서 그랬던 것이라는 답을 찾았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이고, 고집불통이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벌여놓은 일에 대해서 지독히 책임감은 강하고. 너무 솔직해서 감정을 숨기거나 거짓말 같은 것을 절대 못하는 성격. 너무 똑같은 사람이어서 둘은 항상 서로 싸우고 생채기를 냈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베일리를 키우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속으로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인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그녀는 다시 붓을 잡았다. 미술에 꽤 재능을 보였지만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는데, 정부가 운영하는 사회교육기관에서 무료 재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딱히 인정받는 학위는 아니지만, 이 코스를 통해서 피가 끓는 자신의 내부를 발견했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완성된 그림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전시회도 열게 되었다. 그림을 팔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사람들도 생겨서 올여름엔 아예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라 해봤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1인 사업체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신이 난다. 항상 의지하고 누군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재능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부 보조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


현재 크리스틴은 정부가 싱글맘에게 제공하는 무료 주택에서 살고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데 들어가는 생활비 보조금으로는 주당 140파운드(약 28만 원)을 지급받는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껴 쓰면 식비와 기본적인 옷값, 교통비 정도는 되는 돈이다. 게다가 그림이 팔리는 날에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거나 외식을 할 수도 있다. 크리스틴의 꿈대로 어쩌면 그녀는 곧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면서 아이를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정부의 보조금으로 겨우 영위하는 지긋지긋한 생활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베일리를 키우면서 얻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그림 말고 또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좀 뜬금없지만 돈벌이를 위해 괜찮은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로 한 것. 자동차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데다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했으니 자신도 있었다. 싱글맘이라서 억세진 것 아니냐고 물어온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와 얻게 된 용기와 자신감은 크리스틴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화장법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두 가지, 자동차와 그림으로 인생이라는 캔버스를 멋지게 채워 넣을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이제 겨우 스물셋. 아직도 엄마 품에서 세상 물정 모를 수도 있는 나이, 혹은 아직도 한참 공부를 할 나이, 한참 연애를 할 나이에 그녀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고 보니, 연애 이야기가 빠졌다? 어쩐지 이 여자, 스물셋 치고 사랑에 대해서 너무 거리를 두는 건 아닐까? 너무 심하게 관조적인 건 아닐까? 나는 솔직히 묻는다.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은지, 혹시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지는 않는지.

“별로 관심 없어요. 연애나 사랑 같은 소모적인 일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그럴 여력도 없고. 그냥 지금은 빨리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고 싶고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아무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이가 상처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또다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불러왔다. 그러다보니 장장 4년 동안이나 사랑의 감정과는 담을 쌓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누군가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쩐지 베일리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네 살배기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지.

아이만 보면 늘 미안하고 안쓰러운 건 단지 싱글맘 가정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베일리를 가졌을 때 너무 철이 없어서 다른 엄마들이 다들 한다는 태교를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태교가 뭔지조차 몰랐다. 임신 중이던 9개월 동안 크리스틴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아이를 포기하라는 어른들의 설득, 게다가 철없는 남자친구에게 걸핏하면 신경질을 내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제대로 된 출산 준비는 물론 출산을 앞두고 산모를 위한 운동을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못했다. 아이를 낳고도 그랬다. 동생도 없었고, 주변에 아이를 낳은 친구는 더더욱 없었으니, 아이를 낳으면 그냥 알아서 크는 줄만 알았다. 출산과 육아에는 엄청난 지식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나중에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감기 몇 번 걸린 것 빼고는 아직까지는 속 썩이지 않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준 베일리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도 넉넉지 못한 형편 때문에 해주는 건 별로 없지만, 꼭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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