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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커피 한잔, 이야기 한 자락을 버무렸던 풍경, 보실래요?

『노서아 가비』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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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저자’와 국가대표 ‘바리스타’ 그리고 국가대표 온라인서점 ‘예스24’의 독자”가 모인 자리. 모두가 ‘커피’로 만나는 순간.

커피는, 죽음보다 지독한 서정이다

“……커피가 위 속으로 미끄러지듯 흘러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전쟁터의 대부대처럼 몰려오고 전투가 시작된다. 추억은 행군의 기수처럼 돌격해 들어온다. 기병대 군인들이 멋지게 달려 나간다. 논리의 보병부대가 보급품과 탄약을 들고 그 뒤를 바짝 따라간다. 재기 발랄한 착상들이 명사수가 되어 싸움에 끼어든다. 등장인물들이 옷을 입고 살아 움직인다. 종이가 잉크로 뒤덮인다. 전투가 시작되고, 검은 물결로 뒤덮이면서 끝난다. 진짜 전투가 시커먼 포연 속에서 가라앉듯이……” (발자크, ‘커피송가’ 중에서)



 

독일에는 ‘BALZAC COFFEE’라는 커피 체인(1998년 시작)이 곳곳에 있다. 짐작하겠지만 프랑스의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이름을 땄다. 왜 발자크냐고? 그가 커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리라. 지난 18일, 사망 159주기(1850년 8월 18일 사망)를 맞은 발자크는 그야말로 커피에 살고 죽었다. 하루에 30잔(50~60잔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평생 3만 잔을 마셨다는 이 문호는 커피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커피로 인해 얻은 심장병. 말하자면 커피가 ‘발작’을 일으켜 발자크는 펜을 놓고야 말았다. 행복했을까. 커피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이가 커피 때문에 죽게 됐으니. 그야말로 커생커사(커피에 살고 커피에 죽는다). 누군가는 커피 애호가(예찬론자)다운 죽음이라고 했다.

발자크는 또한 다산(多産)의 작가였다. 74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하여 숱한 단편을 내놨다. 따지자면 그는 생계형 소설 노동자였다. 여러 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부 망했다. 빚을 갚아야 했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은 꽝이었단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 즉 ‘이야기하기’. 미친 듯이 써댔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그는 하루를 온통 글쓰기에 할애했다. 잠자고, 생리 현상을 처리하고, 식사 준비와 밥 먹는 시간과 그만의 커피를 위한 커피 제조 시간을 제하고 하루 15시간씩, 그것도 매일!

그런 창작의 동력? 바로 ‘커피’. 뇌 주름을 깨우고, 상상력을 발동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이 커피였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보자. “한밤중에 일어나 여섯 자루의 촛불을 켜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시작이 반.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4시간에서 6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간다. 체력에 한계가 온다. 그러면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탄다. 하지만 실은 이 한잔도 계속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다. 아침 8시에 간단한 식사. 곧 다시 써내려간다. 점심시간 때까지. 식사. 커피. 1시부터 6시까지 또 쓴다. 도중에 커피.”

커피, 커피, 커피. 시쳇말로 그는 ‘커피덕후(커피 오타쿠?매니아)’였다. 덕후질도 이 정도면 쩐다. 덕후왕이 따로 없다. 어쩌면 그는 글쓰기를 위해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위한 핑계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이 ‘특별히’ 주장한다지 않는가.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 그것이 바로 커피라고.”(p.14)

아울러 커피는 독약이라는 이 주장! “사강의 자기 파괴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죽는 방법이 있다. 들입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단, 위장이 좀 넉넉해야 한다. 한꺼번에 80잔 이상을 마셔야 하니까. 커피 속 카페인의 분자식이 ‘C8H1ON402’란다. 그거 10그램을 한 방에 털어 넣으면 황천으로 간다. 일반 커피 잔으로 80잔 정도가 10그램이다. 와우! 그러니까 커피는 독약이다. 조금씩 천천히, 한평생에 걸쳐 죽여주는 독약이다. 몸이 아픈 시인 최승자는 죽음 대신 ‘네게로’ 간다고 썼다.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 네게로 가리.” (…) 250밀리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 10퍼센트 정도의 사람에게서 불안, 초조감, 안절부절못함, 홍조, 다한증, 손발의 따가운 느낌, 구역, 구토증 등이 나타난다. 1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는 극도의 불안, 초조감, 정신착란증, 환청과 부정맥이 있을 수 있다. 10그램 이상에서는 전신발작, 호흡부전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영혼의 상처 없이 문학은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커피는 한잔의 문학이다.”(『지구 위의 작업실』 중에서)

커피는, 발자크의 목숨을 앗아간 악마적 유혹이다


그 발자크를 롤 모델로 삼은 작가 김탁환. 그 이름은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방각본 살인사건』 『열하광인』 등의 주목할 만한 역사 팩션을 선보여 왔다. 이번에는 ‘커피’를 소재로 또 하나의 작품을 내놨다. 『노서아 가비』(김탁환 지음/살림 펴냄). ‘러시아 커피’의 조선식 발음이다. 어찌 커피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내지 않을 수 있었으랴. 발자크처럼 소설 노동자를 꿈꾸며 그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마당에. “발자크는 커피의 카페인에 기대어 소설을 쓰는 에너지를 얻었기에 김탁환이 보기에 발자크에게 커피란 소설 쓰는 기계를 가동시키는 ‘검은 석유’였다.”(p.241, ‘해설’ 중에서)

책에 대한 소개를 보자. “그가 고종독살 음모사건에 이야기꾼다운 상상력을 덧보태 경쾌한 사기꾼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고종독살 음모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1898년, 아관파천 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세도를 부리던 역관 김홍륙金鴻陸이 권력을 잃고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보현당 창고지기인 김종화 등과 모의해 고종과 세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에 독약을 타 넣었던 것. 고종독살 음모사건의 주모자인 김홍륙의 일화를 보고 영감을 얻은 작가는 그 인물 옆에 러시아의 광활한 숲을 얼빠진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는 희대의 여자 사기꾼이자, 고종황제의 모닝커피를 직접 내리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된 ‘따냐’라는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창조해내어 그 상대역으로 세웠다. 이야기꾼 김탁환은 한국 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여주인공 ‘따냐’를 창조해냄으로써 박진감 넘치고 읽는 재미가 살아 있는 ‘개화기 유쾌 사기극’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문헌에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것으로 알려진 고종. 그 고종에게 커피를 따른 사람으로 손탁 여사가 알려져 있으나, 김탁환 작가는 역사적 상상력을 덧붙였다. 고종에게 매일 최고의 커피를 올리는 바리스타 ‘따냐’를 창조,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지난 12일, 홍대 부근 한 카페에서 책 출간 기념으로 ‘Book & Coffee 이벤트’가 열렸다. 출판사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자면, “국가대표 ‘저자’와 국가대표 ‘바리스타’ 그리고 국가대표 온라인서점 ‘예스24’의 독자”가 모인 자리. 모두가 ‘커피’로 만나는 순간. 2007년 대한민국 바리스타 챔피언십 대상을 수상한 안재혁 바리스타가 ‘노서아 가비’풍의 3종 커피를 선보이고, 커피향이 공간을 가득 메울 무렵, 김 작가가 ‘나의 아름다운 작업실’이라는 주제로 독자들에게 풀 이야깃거리를 내놓았다. 참고로 ‘나의 아름다운 작업실’이라는 주제는 김 작가가 십여 년 후쯤에 낼 에세이집 제목이란다.

“작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작업실인 것 같았다. 이런저런 작업실 등 그동안 거쳐 간 작업실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다. 난 처음부터 장편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내 롤 모델은 발자크다. 발자크의 책상을 봤는데, 아주 조그맣다. 발자크는 그 책상 앞에서 살았고, 그 책상 앞에 앉아서 죽도록 일했다. 발자크의 책상 건너엔 커피가 있었고. 커피를 매우 좋아한 발자크는 평생 3만 잔을 마시고, 나중엔 커피 때문에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 여행가는 여행지로, 바리스타는 커피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업실(들)로 생을 추억하고, 그 공간에서 죽도록 쓴 책만 남는 법. 김 작가에겐 그렇단다. “중요한 것은 작업실도 흐른다는 것이다. 전국을 옮겨 다니며 작업을 했다. 역순으로 작업실을 소개하고 싶다.”

커피는, 생의 궤적을 따라가는 작업실이다


카이스트 (2006.3~2009.8) : 매일 발자크 소설의 인물 관계도를 쳐다보며 마음을 잡았다.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노서아 가비』가 양 날개다. 전자가 슬픈 날개라면 후자는 유쾌한 날개다. 『노서아 가비』는 애초 탄생하지 못할 뻔했다.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을 쓰고 우울했다. 주인공이 자살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너무 아팠고, 비슷한 시기의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유쾌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그래서 『노서아 가비』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하나의 비극과 비교적 짧은 희극의 앙상블. 두 작품이 바로 내 마음의 상태였다.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은 제가 만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가장 슬픈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소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책을 내고 한동안 정말 우울했고, 제 소설의 주인공에게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리심! 꼭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합니까? 나는 어떡하라고…….’ 마음의 균형 감각 탓일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의 벽은 단단하고 높지만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개화기 유쾌 사기극’을 하나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멋지게 사기 치는 여인, 한양의 새벽을 깨우며 노서아 가비를 맛있게 끓이는 여인, 그리고 다시 조선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여인을 그려 보려 했습니다. 헌데 지금 『노서아 가비』를 마치고 나니, 기쁘고 신난 만큼 더욱 슬픈 이야기가 된 듯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느끼기엔 어떠신가요?”(p.237, ‘작가의 말’ 중에서)

한남대 (2003.3~2006.2) : 장편 다섯 편을 썼다. 칸막이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쓴다.’ 조치훈 기사가 했던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을 변용한 것이다. 그리고 ‘밀도가 전부다.’ 꽉 찬 문장, 꽉 찬 하루를 위한 것이다. 이 시기에 『불멸의 이순신』 개작과 슬럼프가 있었다. 최초의 슬럼프였다. 당시 매일 20~30매씩 글을 썼는데, 어느 날부터 1매도 안 되고, 한 문장을 쓰고 (글쓰기를) 그만두는 날도 있었다. 사람이 미친다. 엄청난 슬럼프였다. 고민하고 있는데, 한 기자가 스타일을 바꾸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염을 길렀다. 머리와 눈썹을 밀까도 고민했다. 수염을 기르니까 다 바뀌고 삶도 바뀌더라. 소설도 되기 시작했다. 여덟 개를 썼다. 그 이후 수염을 깎지 못하고 있다. (웃음)

건양대 (1999.3~2003.2) : 수염이 없는 젊은 시절이다. 이때 『허균, 최후의 19일』을 무척 열심히 썼고, 잘 쓴 것 같다. 담배를 되게 많이 피웠는데, 목에 탈이 났다. 이후 담배를 못 피우게 됐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기다. 도끼로 이마를 내리치는 글쓰기. 사랑이야기도 썼다. 『누가 내 애인을 사랑했을까』인데, 안 팔려서 절판됐다. (웃음) 『독도평전』이라는 소설도 썼다. 일본이 망언하면 확 팔리고, 초등학생들에게 팬레터도 온다. (웃음) 소설인데, 서점에 가면 역사 코너에 있다. 내가 쓴 유일한 역사책이랄까. 『나, 황진이』도 썼고, 내가 지은 소설 제목 중에서 가장 감미로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도 있다. 여성 독자들이 제목만 보고 샀다가 당한 책이다. (웃음)

해군사관학교 (1995.9~1998.6) : 교관이었다. 해군 중위였다.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 군대에 가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면 소설가가 안 되고 학자가 됐을 거다. 그때 계속 습작을 했다.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바다가 보이는 연구실에서 뭘 할까 고민하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석사 때 샀다가 읽기에 실패했던 180권짜리 소설인 『완월회맹연』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권씩, 세 시간씩, 6개월여를 읽었다. 읽다가 173권에서 문제가 생겨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서 6개월이 더 걸렸다. 1년여가 걸린 거다. 우리나라 학자 중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 다섯 명이다. (웃음) 느리고 긴 소설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이 소설은 기억의 속도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른 소설이다. 저자는 원래 1,800권짜리 소설이라고 하던데,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웃음) 이 책을 읽고 나니 1,000매 정도는 단편소설로 생각되고, 2,000매 정도 돼야 ‘좀 썼구나.’ 싶더라. 180권도 쓰는데. 첫 번째 장편소설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이야기』를 썼다. 연구실 앞에 나가면 거북선이 있었다. 안에 몰래 들어가 담배를 피웠는데, 진짜 많이 피웠다. 담배 피우면서 생각이나 몽상을 많이 했다. 해군사관학교에 간 덕분에 『불멸의 이순신』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하사탕>식으로 역순으로 구성해봤다. 지난 8일에 파주 작업실로 이사를 했다.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나만의 작업실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해사에서 첫 작업실을 가졌을 때 정말 기뻤고, 서가를 처음 샀다. 책장이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초발심(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오늘도 책을 꽂다가 서가를 마련했다. 책이 7~8천 권 된다. 지난 토요일에 이사해서 계속 책을 꽂다가 오늘에야 다 끝냈다. 어젯밤, 오늘 행사를 고민하다가 내가 어떻게 작업해 왔는가를 작업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인사를 하고 싶다.

미래의
나의 아름다운 작업실들아!
미리미리 안녕!
기다리렴.
내가 곧 갈게.


커피는,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다

작업실 예찬이 끝났다. 독자들과 이어지는 문답.


어떤 소설을 쓸 계획인가? 계속 역사소설을 쓸 건가? ‘이걸 읽으면 날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추천하는 소설이 있다면.

“지금 한 일간지에 2049년을 배경으로 한 SF소설을 연재 중이다. 9월에 끝나면 12월에 3권짜리로 나올 것 같다. SF소설도 3년에 하나씩 선보이고 싶다. 현대, 과거 가리지 않고 쓸 거다. 내 소설 가운데 가장 친숙하게 쉬운 것은 『노서아 가비』고, 어렵지만 하나의 정점은 『나, 황진이』다. 자부심이 있고, 진짜 열심히 썼고, 실험도 많이 했다. 드라마(<황진이>)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밀한 고백이고, 접속사가 하나도 없는 소설이다. 접속사를 넣으면 미칠 것 같은 거다. 그래서 쓰면서 죽는 줄 알았다. 역접의 느낌을 주면서 접속사 없는 것이 너무 어렵더라. 뒤 문장을 다 바꾸게 되고. 황진이가 읽은 7~8천 수의 시를 다 읽기도 했다. 그때는 약간 미쳤고, 지금은 그렇게 못 쓴다. (웃음)”

『노서아 가비』는 급하게 끝나는 느낌이다. 긴장감 있게 가다가 허무했다. 다른 결말을 채택하고픈 생각은 없었나.

“같은 시대를 다룬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을 통해 서구적 충격 앞에서 개화기 여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분량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연극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희극으로 썼다. 두 개 이야기가 더 있다. 개화기 희극 3부작. 끝은 고민을 많이 했다. 전체 이야기는 따냐가 뉴욕에 커피하우스를 하면서 고객들에게 조금씩 들려주는 이야기라 분량이 적다. 감칠맛 나게 해야 (고객이) 다음날에 오지 않겠느냐. 말하자면 따냐의 아라비안나이트다. 재미있으면 올 거고, 재미없으면 안 올 거고. 영화화가 예정돼 있는데, 영화가 잘 되면 이반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따냐와 함께 스타벅스를 하게 하자고 영화 관계자와 얘기하기도 했다. (웃음)”

『혜초』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장편소설은 노동이다. 체력이 돼야 한다. 아프면 못 쓴다. 몸 상태를 좋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SF소설 때문에 매일 하루에 10매씩, 일주일에 60매씩 쓰고 있는데,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SF소설이다 보니 소화해야 할 정보량이 무척 많다. 지금은 소설 쓰는 시간이 반, 공부하는 시간이 반이다. 작년 10월부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헬스를 한다. 소설 쓰는 사람 같지 않게. 그랬더니 살이 빠지더라.”

책에 보면 ‘갈범 무리’를 따로 묶어서 책을 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진짜인가.

“갈범 무리를 쓰기 위해 19세기 러시아 사기단을 따로 조사했다. 엄청 재미난 얘기들이 많더라. 당시의 ‘숲 사기’ 등 책 한 권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다. 지금은 일단 자료만 모아 놓은 상태다. 옛날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사기와 관련된 얘기도 모으고 있다.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을 팔아먹은 사기꾼이 같은 놈이다. 이 놈이 개선문까지 팔려다가 잡혔다. 그러니까 사기 이야기를 모으는 게 취미다. (웃음) 소설가도 사기꾼 같다. 소설가는 거짓말하는 사람인데, 거짓말을 멋지게 하면 감동하고, 사기를 잘 칠수록 책이 잘 팔리지 않나. (웃음)”

올해 스물다섯이다. 스물다섯으로 돌아가면 어떤 것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나.

“스물다섯이면 여행을 많이 다닐 것 같다. 사실 나는 20대 때 여행을 싫어하는 ‘방콕족’이었다. 소설이 나를 바꿨다. 『불멸의 이순신』을 쓰면서 답사를 많이 다녔다. 여행도 그냥 가는 것 말고 여행 루트를 공부하고 가는 것이 좋겠더라. 가장 좋았던 여행은 인도였다. 『혜초』 때문에 갔는데, 혜초가 간 길이 석가모니가 간 길이다. 그러니까 성지순례였지. 석가모니가 간 길을 8세기 신라의 승려인 혜초가 가고, 법정스님도 가셨다. 거기에 나도 가니까 텍스트가 네 개가 겹쳐 있으니 의미가 있지 않겠나. 가령 개선문을 가기 전에 관련된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 개선문에 가서 손을 대면 울림이 있다. 그런 문학적인 여행이 좋을 것 같다. 책과 현실이 여행 속에서 만나고, 그런 게 삶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커피는, 끝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다


행사는 이런 질의응답을 끝으로 마쳤지만 ‘커피 디자이너’가 되지 못한 ‘스토리 디자이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바리스타가 나만의 독특한 커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듯, 소설가는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이 생의 증거다. 어쩌면 그도 발자크가 그랬듯,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노서아 가비』도 ‘커피는 끝나지 않은 당신의 이야기다.’라고 맺음하지 않았던가.

커피와 이야기에 솔깃해서 이 자리를 찾았다가 반가운 것이 또 있었다. 김 작가도 ‘작업실 예찬론자’라는 것! 작업실에 대한 그의 무한 애정을 접하자니, 얼마 전 몸을 맡겼던 시인?문화평론가 김갑수 씨의 작업실 ‘줄라이홀’이 떠올랐다.(채널예스 <음악과 커피가 익는 줄라이홀에서 보낸 한철>) ‘작업실,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는 명제를 품은 그 작업실. 한없이 투명에 가깝지는 않아도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생에서 꼭 필요하다고 기어코 나를 설득했던 작업실 예찬.

줄라이홀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했다. ‘멀쩡함’의 범주에 포함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홀딱 넘어갔던 것일까.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지구 위의 작업실』 중에서) ‘작업실’이라는 단어를 다시 듣자니, 작업실 예찬론자를 며칠 사이로 만난 우연이 재미있다. 게다가 커피라는 공통점까지.

집으로 가는 길, 버스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촌의 OO나이트 앞에는 이런 플랜카드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부킹에 목숨을 걸겠습니다.’ (글을) 쓰거나 (바둑을) 두는 것 외에 목숨 걸 것이 또 있었다니, 부킹.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목숨’은 각기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을까. 노서아 부킹. 미쿡 부킹처럼 부킹을 소재로 이야기를 다뤄볼까. 아서라, 깨몽. 아마도 2할 대에 머물렀을 부킹의 기억으로 무얼 할 수 있다고. 커피라도 제대로. “커피 맛도 모르는 입이 어디 입인가.”(p.29) 그리고 커피에 대한 이 한 줄의 깨달음. “내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 나를 바꾸려 한다.”(p.91) 오늘, 가장 듣기 좋았던 이 말. “커피, 참 맛있어요.” 그 말을 건넨 오늘 다섯 분의 여성에게 축복을. 감탄하지 않는 여성들은 전혀 예쁘지도 않아.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잔.’ 따냐~ 커피 한잔 주오. 우리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그 두 번째 공책에 써내려갈 테니……. 참, 나의 주문 메뉴는 부엔까미노 혹은 루프리텔캄! (모르면 내게 물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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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독살 음모사건이 경쾌한 사기극으로 재탄생하다! 『불멸의 이순신』『나, 황진이』『방각본 살인사건』『열하광인』 등의 주목할 만한 역사 팩션을 선보여 왔던 작가 김탁환. 그가 고종독살 음모사건에 이야기꾼다운 상상력을 덧보태 경쾌한 사기꾼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고종독살 음모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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