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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몽땅 다 걸지 못하는 이유

『노서아 가비』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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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끝까지 이반을 믿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흔들리고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마지막까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지 않은 이유는 뭘까?

“커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 탈레랑

『노서아 가비』를 읽고 나면 갑자기 뜨겁고 진한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어진다. 동시에 ‘커피는…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어진다. 이 소설의 각 장은 커피에 대한 매혹적인 정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커피는 외로워 마라 외로워 마라, 속삭임이다.’ ‘커피는 달고 쓰고 차고 뜨거운 기억의 소용돌이다.’ ‘커피는 두근두근, 기대다.’ ‘커피는 오직 이것 뿐! 이라는 착각이다.’ 등. 저자는 독자들을 향해 이런 도발적인 물음을 던진다. “당신에게 이 검은 액체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커피는 ‘오래된 습관’이며 ‘달콤한 휴식’이다. 하루에 적어도 세 잔씩 꼬박꼬박 마시는 인스턴트커피는 그 맛이나 효능과 전혀 무관한 일상의 일부다.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이상한, 오래된 습관. 그런가 하면 커피는 달콤한 휴식이기도 하다.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는 주말이면 나는 책 몇 권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먼저 조조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근처 카페로 향한다. 대개 카푸치노와 머핀 하나를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구석 자리 푹신한 소파에 몸을 반쯤 묻은 후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커피를 홀짝이며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는 기분은 뭐랄까, 갓 볶은 커피 향을 천천히 음미할 때처럼 감미로운 만족감을 준다.

카페 ‘메종 로즈(La Maison Rose)’

이런 느낌은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좀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낯선 도시를 느긋하게 걷다가 길가에서 예쁜 카페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들러보게 되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카페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자리 잡은 ‘메종 로즈(La Maison Rose)’. ‘장미의 집’이라는 뜻으로, 한때 화가 위트릴로가 그의 어머니 쉬잔 발라동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모퉁이에 자리 잡은 이 작고 아담한 카페는 그 이름처럼 온통 연분홍빛이었다. 맞은편으로는 골목길을 따라 담쟁이가 우거진 돌담이 보이는 운치 있는 곳. 카페 밖에는 겨우 네 개 정도의 작은 나무 테이블이 늘어서 있다. 그중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카푸치노를 마셨다. 풍성한 거품 속에 여행자의 감상이 녹아 있었기 때문일까. 그때 마신 카푸치노의 맛은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아마도 소설 속 여주인공이 뉴욕에서 운영했다는 ‘따냐의 문학 카페’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매일 밤 낡은 피아노를 반주 삼아 뿌쉬낀과 러시아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를 원어로 낭송했다는 그 카페 말이다.

어둑새벽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담배 또 하나는 커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이다.
- 본문 중에서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따냐’는 희대의 사기꾼이자 매일 아침 고종에게 러시아 커피를 만들어 올렸던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그녀의 아버지는 역관이었다.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하고 문학을 사랑하며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불행히도 청나라 천자의 하사품을 훔쳐 달아났다는 누명을 쓰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건 직후, 그의 외동딸 ‘월향’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다. 청나라에서 다시 러시아로. 그 과정에서 겪은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을 그녀는 놀라운 기지와 달변, 배짱, 매력으로 모면한다. 요컨대, 그녀는 타고난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세 치 혀에 웃고 울며 속아 넘어갔다.

‘따냐’라는 이름으로 뻬쩨르부르그에 정착한 후 문학 카페에 드나들며 커피 만드는 법에 취미를 붙이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얼음여우 사기단의 일원이 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유럽 귀족들에게 주인 몰래 러시아 숲을 팔아치우는 것. 매력적인 외모와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종횡무진 활약하던 어느 날, 따냐는 자신을 능가하는 또 한 명의 사기꾼 ‘이반’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역시 조선인이었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갈범 무리라는 사기단을 조직, 러시아 대륙을 오가며 대담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목표가 니꼴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조선 사신들에게로 맞춰지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반이 사랑 따위에 목숨을 거는 남자가 아님을 안다.
사랑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집착이 곧 파멸이다.
이반은 종종 자신을 대평원을 달리는 야생마에 비겼다.
아무리 힘들어도 야생마는 결코 스스로 올가미에 발목을 넣진 않아.
집착이 곧 파멸임을 아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 솔직히 고백하겠다.
이반은 나를 흔든 첫 남자였다. 러시아를 질주하는 갈범 무리의 보스 이반에게 어떤 여자가 끌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러나 나는 남자의 사랑에 백이면 백 전부를 거는 여자가 아니다. 백 중 아흔아홉까지 마음을 준다 해도, 내게는 항상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최악을 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관주의자다.
- 본문 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조선 땅에 들어온 이반과 따냐는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을 위해 일한다. 이반이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활약하며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동안, 따냐는 매일 아침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 즉, 러시안 커피를 끓여 올리는 일을 맡아 외로운 군주의 벗이 된다. 급변하는 구한말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한 건을 노리는 이반. 그리고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이반의 행적이 겹치면서 그를 의심하는 따냐. 천부적인 사기꾼으로 그려지는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서는 은밀하게 애정을 주고받는 순간에조차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소설을 읽다보면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 등의 영화가 떠오르는데, 거기엔 속고 속이는 고수들의 세계를 눈앞에서 관전하고 있는 듯한 짜릿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끝까지 이반을 믿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흔들리고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마지막까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를 사랑하긴 한 걸까?

영화 <블러디 발렌타인>의 한 장면

여기서 잠깐, 며칠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블러디 발렌타인>이라는 공포 영화인데, 조용한 광산 마을을 배경으로 곡괭이를 든 살인마가 등장해 닥치는 대로 난도질을 해대는 전형적인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s)다. 극장에서 3D 입체영화로 관람한 날 밤, 곡괭이가 이마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악몽을 꿀 정도로 생생한 전율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공포스러웠던 장면은 따로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광산 깊숙한 곳 막다른 통로에 세 사람이 대치하고 있다. 총을 든 여자 앞에 서 있는 두 남자. 한 명은 그녀의 남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옛날 애인이다. 그런데 두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 곡괭이 살인마다. 살인마는 마스크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그녀는 둘 중에 누가 범인인지 확신할 수 없다. 서로 상대방이 살인마라고 주장하는 두 남자. 누구를 쏘아야 할 것인가? 여자 주인공은 총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세 주인공의 삼각 구도를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순간이 아닐까 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알고 보니 살인마였고, 그가 나를 죽이려 한다. 살인마를 죽여야 한다. 그런데 둘 중에 누가 살인마인지 모른다. 더구나 선택을 잘못하는 순간 내가 죽게 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따냐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이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아마도 두 남자 모두에게 총알을 선물하고 혼자서 표표히 떠나지 않았을까. 그것도 심장 깊숙한 곳에 총알을 박아 넣고서. 그녀에게 미련이나 망설임, 흔들림 따위는 곧 생명의 위협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此鳥安可籠哉(이 새를 어찌 조롱 속에 가두랴!)’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문장처럼 따냐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삶이란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노서아 가비』는 잘 읽히는 소설이다. 굳이 줄거리를 요약하고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없는, 손에 잡으면 주인공과 함께 말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대한제국 시대라는, 우리 민족이 거센 외세의 도전을 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결코 무겁거나 둔중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인 배경이 주는 무게 위를 미끄럼 타듯이 경쾌하게 미끄러진다. 예사롭지 않은 여주인공 따냐 때문이다.
- 강심호, 「러시안 커피-소설노동자가 ‘따냐’와 함께 내달린 세계」(작품 해설) 중에서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에 눈길이 먼저 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빨간 목도리를 길게 휘날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기묘한 표정의 여인. 그녀의 얼굴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조금은 공허해 보이기도 하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일단 재미있다.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탄탄한 이야기의 힘과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대담한 활약에 힘입어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무엇보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강한 비주얼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것은 세세한 묘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가 갖고 있는 생명력 자체로 충분히 부각된다. 『노서아 가비』는 이른바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그동안 가져왔던 나의 고정 관념을 한 방에 날려버린 작품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난 못 속여. 따냐! 너도 막판을 노리는 거지? 내 사랑을 짓밟고 얻어내려는 네 마지막 판은 뭐야?”
- 본문 중에서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녀는 과연 그를 사랑했을까?”
이 말을 가만히 치환시켜본다. “그는 과연 그녀를 사랑했을까?”

어차피 정답은 없다. 진실은 거짓말과 사기와 의심 속에 뒤엉킨 채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작가는 모든 결론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이반은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따냐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말한다. 연인 사이도 비밀은 있는 법이며, 비밀이 많다고 사랑이 변한 것도 아니라고. 후에 이반의 아이를 가졌을 때에도 그녀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다. “아이는 아이고 사기는 사기죠.”

세상에는 어느 한 가지 목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동시에 그들은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이렇게 몽땅 걸었던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의 삶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므로. 그러고 보면 따냐의 선택은 늘 옳았고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어떤 대상이든 간에 전부를 거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믿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 그런데 왜일까. 어느 것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따냐의 삶이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고독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유로운 뮤즈의 선물을
웃음으로 받아다오, 벗이여.
추방당한 리라의 노래와 내 한가로운 영감의 시간을
나 그대에게 바쳤으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방의 소리 들으며
무고한 나 우울하게 파멸해갈 때,
차디찬 배신의 칼이
무거운 사랑의 꿈이
나를 찌르고 짓누를 때
나 그대 곁에서 평온을 찾아
편히 쉬었다, 우린 서로를 사랑했다.
- 뿌쉬낀, 「까프까즈의 포로」 (본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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