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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를 꿈꿨던 10개월간의 북미 유랑

북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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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늦여름에서 이듬해 초여름까지 약 10개월간의 북아메리카 유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유랑은,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쉽게 ‘여행’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가를 즐긴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여행은 아니었다.


사우스다코타 주에서 노스다코타 주로 뻗은 85번 연방고속도로 주변 풍경.
끝없이 펼쳐지는 북서 대평원에서 나그네는 하나의 점이 되곤 한다.

초등학교 때 족히 삼십 리는 되는 길을 통학했다. 저학년 때는 버스를 탔고, 고학년 때는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통학 길은 바다를 끼고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5학년 늦봄이나 여름을 전후한 시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문득 바다를 내 것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상사병’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시작됐다. 한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바다는 이후로 한참 나를 괴롭혔다. 매일 학교를 오갈 때마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면 그냥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사춘기 남자 아이들에게서 본격화되는 소유욕의 한 변형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광기가 발동되고 있다는 걸 내 스스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살을 앓았다. 왜 바다를 그리 갖고 싶어 했는지, 그 이유는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어도 바다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사리분별 정도는 있었고, 그 같은 판단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던 기억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아무튼 바다를 소유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심리는 이성에 대한 소유욕이 최고조로 불붙은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툭하면 짜증을 내고, 혼자 씩씩거리다가 땅 꺼지게 한숨을 쉬곤 했었으니까. 그런 광기도, 그러나 세월에는 결국 힘을 쓰지 못했다. 혼자 이렇게 저렇게 발광을 하다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즈음이 돼서 바다에 대한 소유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릿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소유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그 일 뒤로 상사병 류의 속앓이가 확 도지기 시작한 것은 마흔 중반 고개를 넘어선 2006년 언저리였다. 갑자기 집을 나가 어디론가 떠돌고 싶은 생각이 하루하루 고조되더니, 마침내 객사(客死)를 꿈꾸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슨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면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을, 떠돌고픈 욕망이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상님들께 참으로 송구스런 얘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랑벽이나 집착증 같은 것들은 타고난 몹쓸 병에 속한다.

객사가 로망으로 자리잡자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도, 이름 모를 사막 같은 데를 정처 없이 걷다가 쓰러져 죽는 상상 같은 것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자신이 그토록 근사할 수가 없었다. 대학 입시가 코앞인 고교생 남매를 둔 아버지로, 또 경제적으로는 집안의 기둥이어야 할 사람이 감히 품어서는 안될 생각이라는 판단을 못할 정도로 사리 분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객사를 상상하면 할수록 즐겁고 설레는 걸 난들 어쩌란 말인가.

지나가면서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내 몹쓸 병이 그래도 이성에 대해서만큼은 발동하지 않는 점은 크고 작은 인연이 있었던 여자 분들은 물론 내 자신에게도 천만다행이다. 무슨 일이든 걸핏하면 극단으로 몰고 가곤 하는 나의 집착과 소유욕이 사람, 그것도 이성을 과녁으로 삼았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많았을 것이다.

차 안의 잠자리.
미니밴 뒷자리를 뜯어내고 그 위에 합판을 덮어 침상으로 활용했다.

2006년 늦여름에서 이듬해 초여름까지 약 10개월간의 북아메리카 유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유랑은,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쉽게 ‘여행’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가를 즐긴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여행은 아니었다. 구태여 상황을 묘사하자면, 상사병과 같은 일종의 정신 질환 치유, 즉 투병적 요소가 다분한 여행이었다.

유랑을 시작하기 전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 지역은 나에겐 적당히 이국적이고, 한편으로는 적당히 친숙한 곳이었다. 떠돌이 생활 직전까지 회사 생활을 포함해 7년 가량을 미국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미국은 아주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미는 대륙이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말 그대로 광활한 땅덩어리로 이국적인 요소 또한 그만큼 많은 곳이어서 나름 매력이 적지 않았다.

물론 북미 대륙에 대해 갖고 있던 나름의 선입견도 한몫을 했다.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하게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이 나라 정부에 대해서는 대체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으며 이 나라 국민들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좋고 나쁨의 차이가 크고, 자연에 대해서는 너무 좋다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2006년 8월 회사 생활을 접고 유랑 길에 오르면서 환상적인 북미의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북미는 연중 사계절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멕시코만 일대 지역은 겨울에도 종종 수은주가 섭씨 25도 안팎까지 오르곤 하는데, 같은 시기 북극해 주변은 영하로 온도가 곤두박질칠 때가 더 많다.

또 열사의 사막이 한없이 펼쳐져 있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평원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서부 지역에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수천 미터 높이의 산맥이 떡 버티고 있고, 태평양?대서양?멕시코 만 등을 따라 난 해안선 가운데는 아름다운 곳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마디로 북미 대륙은 자연에 관한 한 지구의 축소판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유랑 길에 오르자, 먼저 현실로 다가온 것은 대륙의 환상적인 자연이 아니었다. 2006년 8월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3일째 유타 주에 이르러 처음 시도한 노숙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후 10개월에 걸친 유랑 생활의 예고편 같은 것이었다.

마이애미 남단의 한 조그만 섬 공터에서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차 바퀴가 그만 모래에 박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내 차를 견인하러 온 트럭마저 같은 신세가 되는 바람에 대형 덤프트럭이 동원돼서야 둘 다 탈출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룻밤 숙박료, 즉 견인 비용으로 400달러를 지출해야 했다. 아름다운 섬을 1박 2일 동안 전세 낸 셈 쳤다.

유타 주에서 첫 노숙 때 한밤중 공원 경찰에게 쫓겨난 뒤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자면서 악몽을 꾸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유랑 생활이 낮의 여행보다는 ‘밤의 여행’이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도시를 혐오하는 천성 때문에 발길은 주로 인적이 없는 오지로만 쏠렸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에 사는 미국인이 별로 찾을 일이 없는 그런 시골 지역들 말이다. 그곳이 숲 속이든 허허벌판이든, 이런 곳에서는 해가 지면 적막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배가된다.

여행 초반 한동안은 고독과 씨름하는 일이 무척 괴로웠다. 물론 낮 시간에는 눈을 즐겁게 하는 풍광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밤의 고독이 낮 시간의 즐거움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유랑 생활을 시작한 지 두어 달쯤 지나자 밤의 외로움에 제법 익숙해졌다. 혼자 있는 게 그냥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테네시 주에서 만난 현대판 집시라 할 만한 한 백인 노인으로부터 차 타고 노숙하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밤마다 또 다른 형태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노인 말로는 프랑스 출신의 남자가 나처럼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미국을 떠돌다가 노상에서 살해됐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책상머리에서 꿈꾼 객사는 어딘가를 떠돌다 지쳐 쓰러져 자연사하는 것이지, 누구한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뒤부터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고 외딴 곳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사는 게 무엇인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질 수밖에 없었던 밤들이었다. 차를 몰고 수십 혹은 수백 킬로미터를 나가야 구멍가게 하나 볼까 말까 한 그런 곳에서 밤을 날 때 혼자에게 얘기를 거는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혹시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긴장해야 하는 일이 매일 밤 반복되자 알게 모르게 지쳐갔다. 당연히 잠의 질은 떨어지고, 낮 시간은 머리가 맑지 않은 날이 많았다. 여행이 해를 넘기면서 어쩔 수 없이 긴장하기를 포기해야 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매일 밤마다 찾아오는 긴장이 반복된 나머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돌아보면 모두 다 어리석고 소심한 천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진즉 운명에 맡기면 될 것을, 몇 달을 시달리고 난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다니 말이다.

알래스카의 관문인 톡(Tok)시 인근의 설산.
범접하지 못할 위엄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밤의 공포에서 벗어난 여행 후반은 몸과 머리가 제법 가벼워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목숨마저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여행 시작 후 누적된 주행거리가 8만 킬로미터쯤에 이르던 2007년 5~6월에 찾은 알래스카는 그래서 더더욱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생전 처음 가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마치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눈부신 설산, 북극을 향해 뻗어있는 타이가와 툰드라의 대평원. 그곳은 나에게 시원의 풍경을 보여주었고, 우습게도 나는 혼자서 몇 번이고 울었다. 이전까지는 맛보지 못했던 전적으로 새로운 오르가슴에 머리와 몸이 동시에 전율했다. 똑부러지게 설명할 길은 없지만, 대자연과 내가 한몸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사람 자체는 자연의 일부지만, 사람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어쩌면 위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최소한 알래스카에서만큼은 내게 확신이었다. 위작에 몰두한다면, 죽음을 앞에 두고 뒤돌아본 삶이 한결 더 허망할 것이라는 생각도 당시엔 더불어 들었다.

알래스카 북단 백야의 먼동.
1~2시간 정도 잠깐 졌던 해가 툰드라의 대지 위로 떠오르고 있다.

알래스카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아가씨로 보이는 대단한 미모의 여성이 동승을 청해왔는데, 순간이지만 솔직히 말해 받아들일까 망설였던 것은 알래스카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았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성실한 남편, 훌륭한 아빠, 착한 아들이라는 50년 가까이 지켜왔던 ‘구각(舊殼)’을 자칫하면 깨뜨릴 뻔한 10개월 여정의 피날레였다. 당시 나의 선택이 달랐다면 나는 또 다른 집착과 소유욕, 그리고 상사병에 시달리고 있었을까. 뭔가 화두는 쥔 것 같기도 한데, 혼돈스럽기는 여행 전후가 매한가지다.


김창엽
『길 위의 바람이 되다』
초등학교 시절 이래 몸은 몰라도 마음만은 항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는, 주체할 수 없는 역마살의 소유자. 20년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한 여?의 남편 두 아이의 아버지로 나이 오십이 코앞. 그러나 정신 연령은 딱 열 살 수준. 아들에게 끝없는 호기심과 역마살을 물려준 노모와 두드려보고 돌다리인 줄 알고서도 종종 건너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아버지를 뒤로하고 2006년 늦여름, 시한부 일상 탈출을 시도했다. 낡은 미니밴에 몸을 맡기고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며 가을과 겨울, 봄을 보내고 이듬해 여름의 초입에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늙기 전에 시골에 들어가 농사지을 작정을 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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