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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도시의 공기가 무거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 『보바리 부인』

나는 지금도 엠마의 자매들, 엠마의 변종들, 엠마의 모방범, 가짜 엠마들이 우리의 도시를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밤마다 본다. 그녀들은 불투명한 저마다의 욕망에 몸부림치며 바싹 긴장한 채 혼란스럽게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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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발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무척 반가웠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어머니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내 아이는 자기가 얼마나 믿음직한지를 알게 된다. 그는 믿음직한 지배자로서 그에게 속한 세계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 아이가 타고 있는 동물은 주인에게 헌신적이다. (…) 만물의 영겁회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의 지혜가 되었다. 그리고 삶이란 지배에 대한 태곳적으로부터의 도취로, 중심에는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리온이 왕실 보물로 자리 잡고 있다. 음악의 속도가 느려지면 공간들이 떠듬 떠듬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하고 나무들은 감각을 되찾기 시작한다. 회전목마는 불안정한 땅이 된다.

-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어린 시절』 중 「회전목마」

어느 해 우리 마을 장터에 간이 회전목마가 세워졌다. 한쪽 팔이 빠진, 심청이란 이름을 가진 바비 인형을 안고 있던 나는 참새와 메추라기 구이, 번데기 냄비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설탕, 생강, 오징어 냄새와 함께 하늘로 치솟아 오르던 그 밤에, 앙증맞은 꼬마전구들 불빛 너머로 회전목마의 유혹적인 음악 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것은 금속성의 찌그러진 음악이었지만 명백히 축제로 초대하는 음악이었다. 멋진 갈기를 가진 흰색 말들과 이국의 공주와 왕자들이나 타봄직한 황금마차, 보라색과 초록색 줄무늬로 휘감긴 기둥, 풍성한 술이 달린 안장들, 그것은 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도회적이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바로크와 로코코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 밤에 회전목마를 타고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게 운명인 (즉 영겁 회귀가 지혜인) 모험을 즐기고 또 즐겼다. 최초의 흥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팔을 올리는 동작이나 몸을 뒤로 젖히는 동작을 바꾸는 등 몇 가지 사소한 변화를 줘야했다.

몇 년 전 고향에 가서 다시 그 장터에 가봤더니 이젠 간이 회전목마 대신 간이 바이킹 한 척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녹음된 바람 소리와 비명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환각과 과장에 있어서는 나에게는 늘 회전목마가 최고였다. 그 밤 장터의 회전목마에서 상기된 얼굴로 내려서는 내 코를 동동주와 해물파전, 도토리묵과 들기름의 냄새, 어떤 취객의 트림 냄새가 건드렸고,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어색해진 나는 멍하니 잠시 서 있었다. 어쩌면 그 냄새들은 과장과 거짓이 없으면 현실은 이토록 빈약하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트럭 엔진 냄새와 함께 밤바람에 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끝나가는 장터 바닥에 아이스크림 막대기와 쓰레기와 신문지가 날리고 회전목마의 주인은 딸랑딸랑 동전을 세고 있었다. 도취와 공허 사이의 거리는 어린 마음에도 그토록 가까웠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아서왕와 렌슬롯과 귀네비어 왕비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닥터 지바고와 라라가, 차타레 부인과 산지기 맬더즈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가,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스타일리쉬하게 자기 삶을 개척하고 강해져 전설이 되는 숱한 시간들 속에, 프랑스 루앙 근처 시골 마을 용빌의 의사 부인인 엠마 보바리는 회전목마 위의 소녀처럼 오로지 자기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그녀는 어느 마을에나 하나 있기 마련인, 그저 그런 스캔들의 예쁘장한 여주인공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잊혀질 수도 있는 운명이었는데 묘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환각 속 전설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그녀는 거짓말쟁이였지만 사랑의 환상에 관한 한 그녀만큼 가식 없이 투명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녀는 성에 탐닉했지만 영혼에 관한 한 그녀만큼 어린아이 같은 여자도 없었다. 그녀는 육체적 황홀경과 쾌감은 알고 있었지만 사랑의 형이상학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몰랐다. 그녀는 은세공업자처럼 자기 몸을 다듬고 멋을 부릴 줄 알았지뢸 정신에 있어서는 어떤 기교도 부릴지 몰랐다. 그녀는 여러모로 ‘참한 정부’의 대표 주자였다. 백치미가 제일 좋다는 능글맞은 남자들이나 이기적인 남자들이 성적 판타지로 삼을 만한 순진무구한 관능의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다른 면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 성숙한 여인들에게 이 지상에는 더 이상 사랑할 변변한 남자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고,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바칠 마땅한 대상이 없이 희망 없이 늙어갈 거란 예감만큼 불길한 것도 없다. 이런 여인들의 대표 주자도 바로 엠마다. 그녀에게는 한 남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은 사랑 이상이었다.

그녀는 회개 후 종교에 진심으로 귀의한 적이 없고, 회개 후 남편이나 자녀 교육에 헌신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시시한 유혹이나 충동에도 손쉽게 무너졌지만 그녀의 남자들이 지리멸렬한 회개와 얕고 상투적인 타협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아가는 동안, 엠마 혼자 고집스럽게 끝까지 정신 차리지 않았고, 어리석게 몰락해 갔다. 오늘날의 머리 회전 빠른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자멸적인 행동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매력은 또렷하다. 나에게는 언제나 비타협에 대한 애호가 있지만 내가 엠마를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지루했지만 그녀의 인생은 거대한 열정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는 도발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의사의 아내인 그녀는 차갑게 식어빠진 여자가 아니었다. 예법과 의무와 사람들의 시선에 질식해 ‘여자의 일생이란 그런 거예요.’ ‘세상에 별 남자 있나요?’라고 말하며 심술궂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생생했던 것은 현실이 아니라 언제나 ‘욕망’이었다. 욕망 때문에 그녀의 육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에로틱하게 착색되었다. 욕망 때문에 그녀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불안정한 신비를 갖게 되었다. 환각과 과장으로 범벅된 욕망 때문에 그녀는 어리석었지만 동시에 빛났다.

엠마는 어느 날 무엇엔가 눈을 뜬 여자다. 농장을 운영하는 루오 영감의 딸인 엠마는 열세 살에 수녀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녀는 전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그녀의 기질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인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녀는 사소한 풍경을 보더라도 뭉클한 감동을 받고 싶어 했다. 그녀가 공부하던 수녀원에는 속옷이나 시트를 빨아 주러 오는 노처녀가 있었는데, 몰락한 대귀족의 후예인 그녀는 지난 세기의 사랑 노래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의 호주머니에 소설책을 숨겨 가지고 와 학생들에게 빌려 주곤 했다. 소설의 내용은 ‘한결같이 사랑, 사랑하는 남녀, 쓸쓸한 정자에서 박해받는 귀부인, 역참마다 살해당하는 마부들, 페이지마다 지쳐 쓰러지는 말들, 어두운 숲, 마음의 혼란, 맹세, 흐느낌, 눈물과 키스, 달빛 속에 떠 있는 조각배, 숲 속의 밤꾀꼬리, 사자처럼 용맹하고 어린 양처럼 부드럽고 더할 수 없는 미덕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말쑥하게 차려입고 물동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 신사들뿐’이었다.

엠마는 열다섯에 처음 그런 소설에 입문한 뒤로 줄곧 해묵은 장원에서 긴 드레스를 입은 성주 마님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홍예문의 클로버 무늬 장식 밑에서 돌 위에 팔을 기대고 턱을 두 손으로 괸 채 들판 저 끝에서 흰 깃털로 장식한 기사가 검정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밤마다 수도원의 침실에서 아름다운 비단 표지로 장식된 책을 읽었다. 삽화를 보호하는 얇은 종이를 입김으로 호호 불면 그 안에는 고지식한 귀부인들이 뺨에 눈물을 한 방울 매달고 새장 속의 산비둘기에 키스하는 그림, 무희의 팔에 안긴 술탄이 누워 있는 그림들이 신성하게 드러났고 그런 밤에 한길을 달리는 늦은 마차의 바퀴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곤 했다.

수도원의 계율이 짜증스러워질 무렵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인생에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것도, 느낄 것도 없다는 환멸감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때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치료하러 의사 샤를르 보바리가 찾아온다. 그녀는 그를 보면서 ‘위대한 연인들의 멋들어진 정열을 드디어 자신도 갖게 되었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둘은 결혼하게 되는데 남편 샤를르는 그녀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밋밋했고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엠마는 어떠한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낼 수 없었다. 그는 수영도, 검술도, 승마도 할 줄 몰랐고 권총도 쏠 줄 몰랐다. 그는 파리에서 온 배우들을 보러 극장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모르는 게 없고 정열과 세련됨, 온갖 새로운 경험과 자극의 세계로 그녀를 인도해 줘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녀의 눈에 선량하고 성실한 샤를르는 한심할 정도로 둔감한 남자에 불과했다. 이제 그녀의 생활은 무척 단조로워졌다.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수도원의 친구들은 거리의 소음, 극장의 술렁거림, 무도회의 광채를 도시에서 만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녀가 결혼했을 수도 있는 미남이고 재기발랄했을 수도 있는 미지의 남편 생각에 그녀는 괴로웠다.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1991)의 한 장면

어느 날 그들 부부는 유명한 후작의 파티에 초청을 받았고 다이아몬드 눈물 같은 샹들리에 아래서 빙글빙글 왈츠를 추던 그 화려한 하룻밤은 그녀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사고 부인용 신문을 정기 구독했다. 여자 가수의 데뷔나 상점의 오픈 소식. 새로운 유행, 솜씨 좋은 의상실의 주소까지 엠마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파리의 생활만이 인류 전체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길게 끌리는 드레스와 미소 속의 고뇌, 오후 네 시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세계를 동경할수록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은 그녀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권태로운 풍경, 평범한 이웃, 우매한 대화들.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삶에 재수 없이 걸려든 우연들이었다. 그녀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파리에서 살고 싶기도 했다. 남편이 유명해져서 신문에 나고 프랑스 전역에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넥타이와 장갑에도 신경을 썼는데 그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길 매일 매일 기다렸고, 아침마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놀라곤 했다. 그녀는 후작의 파티에서 봤던 공작부인들을 떠올리며 그녀들이 엠마 자신보다 몸매도 못하고 태도도 천했던 것을 떠올리며 하느님의 불공평함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떠들썩한 생활, 방자한 쾌락은 마땅히 자기 몫이어야 했으니, 이제 그녀는 병을 앓게 되었고 남편 샤를르는 아내의 신경성 질환은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단 선배 의사의 말을 듣고 용빌로 이사를 간다. 용빌은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도시지만 금발의 애송이 청년 레옹 뒤퓌가 있었다. 그는 용빌에서의 생활이 무척 따분하다고 생각해 엠마를 처음 보던 날 엠마에게 ‘도대체 용빌에는 즐길 만한 일이라곤 없으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들의 대화는 파리의 연극, 소설의 제목, 새로운 춤, 알지 못하는 사교계까지 모든 것에 대해 다 골고루 이어졌고 마침내 그들은 둘이 똑같은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용빌에 올 때 이미 임신 중이었던 엠마는 딸을 낳는다. 레옹과 엠마는 점차 서로 사랑하게 되고, 엠마는 레옹을 사랑하게 되면서 남편에 대해 더 큰 증오심을 품게 된다. 모든 불만을 남편 탓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대체 누구를 위하여 정조를 지키고 있단 말이야? 남편이야말로 온갖 비참의 원인, 사방에서 자신을 옥죄는 가죽 벨트의 가시 바늘 같은 존재 아닌가?’ 언제나 무사태평한 남편이 그녀에게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레옹과 함께 어디 먼 곳으로 달아나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엠마는 자기 내부는 이렇게 출렁거리는데 주위의 사물이 한결같이 질서 정연한 게 놀랍기만 했다.

바로 그 무렵 보답 없는 사랑에 지친 레옹은 파리로 떠나고 레옹이 떠난 얼마 뒤 떠들썩한 행사장인 농사 공진회에서 엠마는 놀아볼 만큼 놀아본 남자인 로돌프의 유혹을 받는다. 로돌프는 커다란 우단 저고리, 부드러운 가죽 장화,승마용 말 같은 것을 엠마에게 보여주며 ‘저 여자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을 거야.’라고 우쭐대는 형의 남자였다. 그런데도 엠마는 눈물에 젖은 채 전율에 몸을 떨며 얼굴을 가리고 그에게 처음으로 몸을 맡기고 난 이후, ‘내게 애인이 생긴 거야, 내게 애인이.’ 이렇게 희열에 가득 차 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그날 밤 엠마가 거울을 보는 장면이야말로 내가 읽을 때마다 『마담 보바리』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장면 중 하나고 놀라운 관찰자 플로베르에게 경탄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녀의 눈이 이토록 까맣고 이토록 깊어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마침내 체념해 버렸던 행복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일상은 저기 아래 처박혀 버린 것이다.

이 문장은 단지 간통의 육체적 짜릿함만을 말해주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다른 각도로 이 문장을 보고 싶다. 이 문장을 단서로 우리는 욕망의 정체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지루한 일상을 가진 사람, 해결될 수 없는 욕구를 가진 사람의 눈동자에 빛을 다시 지펴 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비참하다고 생각해온 사람에게 깊이와 활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똑같은 일상을 사는데 왜 어떤 사람은 특별히 활기 있고 왜 어떤 사람은 늘 맥 빠진 모습일까? 이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관찰 대상이었다. 나는 발레리가 『춤과 영혼』에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수, 겉모습, 마음의 굴절이 비참한 인간들에게 깊이와 활력을 줍니다. 그 관념은 존재하는 것에 존재하지 않는 것의 기운을 불어 넣습니다.” 존재하는 것에 존재하지 않는 것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 이것이야말로 욕망의 신비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계속계속 욕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변화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있던 세상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 그것보다 자극적인 것은 없다. 우리 개인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면 평생 가졌던 욕망과 절망감의 형상화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예감도 든다. 그래서 우리 가여운 인간들의 절망감은 거의 숭고할 지경이다. 불가능했던 모든 것들도 숭고하다.

그런데 지난 시대의 위대하고 고귀한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엠마가 선택한 남자, 로돌프의 천박함과 시시함은 돈키호테가 못생긴 농사꾼 아낙 둘시네아를 만나기도 전부터 그녀를 아름다움의 화신이자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삶의 목표로 여기고 있는 것만큼이나 사랑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특정 대상을 원한다는 것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사랑하는 한 쌍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는가? 사랑에 있어서 타인은 얼마만큼 중요한 존재일까? 사랑은 아예 특정 대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일까? 사랑은 단지 자기 욕망의 우연한 투영에 불과한가? 역시 사랑은 운명과 우연이 살살 짓궂은 날개를 펄럭거린 어느 날의 해프닝에 불과한가?

로돌프는 밀애의 약속이 있는 밤마다 커다란 망토를 들고 찾아와 엠마의 전신을 푹 감싸 안고 정원의 어둠 쪽으로 사라져 갔다. 한밤의 정사가 습관이 되어 버렸던 그 무렵만큼 보바리 부인이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는데 쾌락과 환상이 그녀를 바야흐로 탐스러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만개시켜 놓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옷의 주름살 펴는 동작 하나, 다리를 굽혀 앉는 동작 하나에도 야릇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같이 달아나기로 약속한 날 로돌프는 가짜 눈물방울을 찍어 바른 이별의 편지를 보내며 엠마를 배신해 버렸다. 그리고 잠깐 엠마는 종교에 빠지고 자선 활동에도 매달린다.

그녀는 성녀가 되고 싶었다. 그 옛날 그녀가 닮고 싶어 했던 귀부인들도 화려한 긴 옷자락을 끌면서 고독 속으로 물러앉아 상처받은 가슴 속의 눈물들을 그리스도의 발밑에 쏟아놓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하나의 공덕을 늘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엠마가 얼마나 초지일관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는지는 이 책 전편에 수시로 나오지만 신앙심에 대한 그녀의 태도, 그리고 얼마 뒤 남편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서 자신은 일등석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보통 사람들을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엠마는 좀처럼 성찰이란 걸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페라를 보러 간 그날 엠마는, 다시 고향에 내려온 레옹을 만나게 된다. 오페라를 본 다음날 엠마와 레옹이 만나는 장면이 바로 세계 문학사상 가장 에로틱한 루앙 노트르담 성당 마차 장면이다. 성당지기가 두 사람을 지겹게 쫓아다니며 성당의 유물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자 사랑의 열병에 들뜬 레옹은 성당에서 도망쳐 나오며 급히 마차를 부른다. 그리고는 성난 목소리로 마부에게 마차를 절대로 멈추지 말고 그저 달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미 비탄에 젖어 지난날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고통을 과장스럽게 거짓말을 섞어가며 토로했던 그 애달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커플을 실은 마차는 루앙의 거리를 달리고 달린다.

대체 무슨 미치광이 같은 격정에 사로잡혔기에 이 손님들은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채 내처 달리고만 싶어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멈춰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등 뒤에서는 어서 가라고 호령하는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흠뻑 젖은 두 마리의 야윈 말을 한층 거칠게 채찍질하면서 마차가 흔들리든 말든 여기저기 무엇에 걸리든 말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은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목마름과 피로로 거의 울상이 되어 마차를 몰았다. 그리하여 선창가의 짐마차나 술통들 사이에서 한길의 수레막이 돌 모퉁이에서 거리의 사람들은 이런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 광경에, 셔터를 내린 마차 한 대가 무덤보다도 문을 단단하게 걸어 닫은 채 흔들거리면서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또 끊임없이 다시 나타나는 이 광경에 어리둥절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 장면ㅡ달리는 마차, 닫힌 문, 욕망에 타오르는 두 남녀, 단조로운 거리, 지켜보는 사람들의 동그랗게 뜬 눈ㅡ이 당대 사람들의 상상력을 어찌나 충격적으로 자극했던지 그 뒤로 파리에선 보바리 마차란 것이 대유행했다고 한다.

이제 매주 한 번씩 레옹을 만나러 가는 동안 그녀는 용빌에서 루앙으로 가는 길을 끝에서 끝까지 외우게 되었고, 십이만 루앙 시민들의 정념의 열풍이 모조리 다 그녀에게 쏟아져 오는 것 같다고 느꼈고, 그때 노르망디의 해묵은 도시는 마치 바빌론의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큼이나 그녀에게는 뜨겁고 생생했다. 엠마가 새벽 마차를 타고 용빌에서 루앙까지 달리는 장면은 나에게 텅 빈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미감을 제공했다. 도망자의 시선으로 본 거리와 추적자의 시선으로 본 거리가 다르듯이, 미친 듯이 빠져 있는 애인을 만나러 새벽길을 달려가는 여인의 시선으로 본 거리의 미감은 또 다르다. 그 거리는 아주 우아한 날도 있고 아주 거짓인 날도 있을 것이다. 마치 엠마가 매주 찾아들던 여관방의 가구들을 보면서 내 의자, 내 침대, 내 화장대라고 했듯이.

그러나 별 볼일 없는 남자인 레옹과의 연애 역시 환멸을 가져왔다. 도취와 공허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졌다. 그녀는 엷어진 정열을 되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엠마는 더욱 탐욕적이 되어 옷을 거칠게 벗어던졌고 코르셋을 잡아 뜯었고 어느 날에는 옷을 한꺼번에 홀라당 벗어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레옹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밖에 나다니지 말고 우리 일만 생각하세요. 나만 사랑해줘요!’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녀가 간통 속에서도 결혼 생활의 진부함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파국을 맞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사랑에만 집중하느라 주변 세계를 이해하지도, 판단하지도 못했던, 아니 주변 세상에 아예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물질적 쾌락과 정신의 행복을 구분하지 못했고 애인에게 선물을 주고 집안을 치장하고 몸을 가꾸느라 써 버린 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놀아나다가 파국을 맞게 된다. 그 경제적 파국을 안 뒤에 그녀가 전 재산인 오 프랑짜리 금화를 거지에게 던져주면서 그걸 그렇게 던져주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장면, 집이 경매당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공증인의 집으로 쫓아가서는, 크리스털로 된 유리문 손잡이나 은으로 된 접시 데우는 기구를 보면서 ‘이런 부엌이 우리 집에도 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보면, 지독한 (그래서 진정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내면을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엠마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절정의 어리석음을 함께 보여주는데 그 둘은 같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욕망의 열정으로 흥분한 사람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하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다. 계산이라곤 없다. 미래도 없다. 결정처럼 순수하다. 구체성도 없다. 그때의 욕망은 차라리 무에 가깝다. 그러나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엠마의 욕망은 늘 환각과 과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비극은 아주 컸다. 더 이상의 욕망의 추구의 불가능함, 그 자체가 그녀에겐 이미 사형 선고였다. 욕망에 눈멀고 귀 멀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아! 너무나 갖고 싶다.’ 이 문장을 몸으로 아는 사람은 엠마가 자기 욕망에 얼마나 한결같이 윤리적이었는지 알 것이다. 모든 범죄가 자기 윤리를 갖듯이 자신의 손으로 초래한 모든 파멸도 자기 윤리를 갖는다.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1991)의 한 장면

『마담 보바리』를 읽는 사람들은 그 손으로 만져지는 듯한 심리 묘사에 압도될 텐데, 특히 일상의 지리멸렬함에 관한 플로베르의 묘사는 너무나 예리하다. 그는 세계의 집요한 관찰자였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일상의 진부함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해서만 그레이하운드 개와 벽지의 무늬와 저녁 식사와 저녁 식사 후의 규칙적인 키스에 대해 나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일상의 진부함의 바닥에까지 내려가 보자고 우리 손을 잡아끈 이유는, 어쩌면 차라리 일상을 단 한 순간도 그 자체로 무한히 참고 눈감고 견뎌 나가야 할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엠마가 죽어버린 후 불쌍한 남편이 보인 애틋하다 못해 처량할 정도의 행동들을 통해 플로베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엠마 편에도, 샤를르의 편에도 서지 않고 철저하게 가치중립적이었기 때문에 선악을 말하기 위해,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샤를르에게 아내가 죽은 후 밝혀진 진실, 즉 아내의 ‘간통’은 잔인했다. 자신은 행복하다고 끝없이 믿었던 남자의 추락은 차라리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쉬운 문제가 아니란 것, 선량함만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세상에서 타인과 무언가를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면 세상은 그토록 황량하다.

『마담 보바리』를 떠올릴 때 약제사 오메를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재빠른 타협과 기회 포착과 자기선전으로 결국 레종 드뇌로 훈장을 탄, 그야말로 그 시대의 ‘성공적’인 시민이었다. 그의 성공은 엠마 보바리 사망 이후 특히 두드러진다. 그런데 묘한 것은 ‘철없는 간통녀’ 엠마를 멸시하기는 어려웠어도 ‘성공적이고 명예로운 시민’인 그를 멸시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점이다. 그 맛은 씁쓸하다. 엠마가 너무나 다채로운 현실과 관계 맺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이었다면 오메는 너무나 다채로운 현실과 부조리하게 만나는 인간이었다.

한때 우리나라를 그 순애보적 사랑으로 강타한 <너는 내 운명>의 모델이 되었던 실제 두 주인공을 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추적해 인터뷰를 했다. 그 둘은 이제 헤어졌다. 남자는 병들고 홀로 고향에 남아있다. 그의 사랑은 아직도 식지 않았고 여자가 돌아오길 원하고 있었다. 도시로 떠난 여자는 그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 답답한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요?” 그 순간 공기가 수상했다. 엠마의 냄새가 났다.

나는 지금도 엠마의 자매들, 엠마의 변종들, 엠마의 모방범, 가짜 엠마들이 우리의 도시를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밤마다 본다. 그녀들은 불투명한 저마다의 욕망에 몸부림치며 바싹 긴장한 채 혼란스럽게 대기 중이다. 도시의 공기가 너무나 무겁다. 즐거움, 슬픔, 무서움, 두려움, 떨림, 회한, 불안, 막연한 기대가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다. 그 공기 속으로 우리의 엠마들이 떠올랐다 추락했다를 반복할 것이다. 부디 욕망이 우리들을 굽어 살피사 우리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구원해 주기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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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저/<민희식> 역10,800원(10% + 5%)

평범한 일상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공상에 사로잡혀 허영과 불륜으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한 여인의 비극적 종말을 리얼하게 묘사한 플로베르의 대표작. 작가가 30세에서 35세까지 5년 동안 완성시킨 고심의 역작으로 빈틈없는 조사와 치밀하고 정확한 연구, 다듬고 다듬은 아름다운 문체가 돋보이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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