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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출발선에 서면

삼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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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골에 갔을 때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면사무소에 들러서 다짜고짜 직원에게 마을의 이모저모를 물어보는 것, 아니면 노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서울에 와서 제주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계속 생각나는 것이 국수다.

쌀이 나지 않는 제주 사람들이 힘든 시절의 먹을거리로 선택한 것은 국수였다. 제주 사람들이 국수를 즐겨 먹게 된 데는 이런 씁쓸한 배경이 깔려있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더라도 제주 국수는 육지 사람의 입맛에도 충분히 맛있다. 육지(제주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에서는 영남 남부 지역, 호남 지역 일부에서만이 돼지뼈로 육수를 낸 돼지국밥을 즐겨 먹는다. 한데 유독 부산에서 가까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만이 라멘 육수를 돼지뼈로 우려내는 것을 보면 일본과 우리의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제주에 물들어 가고 있을 때쯤 맛을 들였던 먹을거리가 국수, 그중에 돼지뼈로 육수를 낸 고기 국수였다.

***

늦은 여름, 오랜만에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흥분한 일본 관광객처럼 동문시장으로 회를 먹으러 갔다. 벵에돔 한 접시와 한라산(소주) 몇 병을 나눠 마시고 우린 삼성혈 옆에 있는 국숫집에 가서 속을 해장하며 다시 한라산을 마셨다. 밤늦은 시간에 취객을 유혹하는 서울의 해장국집 모양으로 제주 국숫집들은 밤늦게까지 문을 연다. 어느새 제주 사람처럼 국수로 해장하는 우리를 보고 좀 놀랐지만 흥분된 속을 가라앉힐 때에는 쌀보다 면이 더 잘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또 한 젓가락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주 시내에서 술을 마시면 이런 식의 패턴이 늘 반복되는데 우리는 어느 날, 국수를 낮에 먹어보자고 약속했다.

국숫집이 모여 있는 삼성혈 앞에서 낮에 국수를 먹고 우린 좀 걷기로 했다.

***


“어때? 낮에 국수 먹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 근데, 소주가 없으니 이상하게 국수 한 그릇이 다 안 들어가. 역시 고기 국수에는 소주 한잔해야 되는데. 중면을 넣어서 삶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 담양에서 먹은 국수 같았어. 그게 이제야 보이더라고. 크크.”

그녀는 요리사다. 그런데 이럴 때 보면 음식보단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여자가 술을 좋아하면 남자는 행복하다. 어떤 부분에선 친구보다 낫다. 그 분위기만 좋아해 줘도 좋다. 그녀는 술 마시는 분위기보다 실제로 술을 사랑한다. 한식을 먹었다 하면 늘 소주를 찾는다. 싸우더라도 술을 마시고 곧 화해한다. 이 사실은 연애에서 꽤 중요하다. 어떨 때는 말 한마디보다 술 한잔이 낫다는 말이다.

***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술에 취해서 밤이 깊어야 찾아가던 국숫집이라 밖에 나오니 해가 떠있어 이상했다. 삼성혈까지는 오 분 거리다.

입장료 천오백 원을 내고 삼성혈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하루방과 제주 섬 모양을 닮은 열쇠고리나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세월이 가도 발전 없는 기념품이다. 너무 예뻐서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기는 힘든 걸까. 파는 사람의 잘못일까, 사는 사람의 잘못일까.

삼성혈은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등 삼신인(神人)이 솟아 나왔다는 세 개의 구멍이 있는 곳이다. 꽤 우거진 느티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제법 신성한 느낌이 났다. 나무냄새가 상쾌했다. 그녀가 삼성혈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제주 사람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라고 보면 돼. 소울이 살아 숨 쉬는 마음의 고향이지. 이런 곳이 남아 있는 게 부럽지 않아? 실제로 제사도 지내고 있고.”

마치 와봤던 사람처럼 설명해주자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경건해졌다. 절에 온 불자처럼 갑자기 잡고 있던 손도 스르륵 놓았다. 그러진 않아도 되는데. 역시 미신을 잘 믿는 그녀였다. 국수 먹으면서 반주라도 할 걸 그랬다.

***


처음 와본 삼성혈은 성지다웠다.

울타리가 쳐진 세 개의 구멍 쪽으로 백 살도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절을 하듯 엎드린 모양새였다. 신기했다. 한쪽에 있는 나무들만이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나무들이 하나같이 구멍 쪽으로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삼신인이 나왔다는 구멍은 잘 보이진 않았다.

“신기하다. 진짜, 우리도 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돌아보니 그녀는 벌써 기도를 하고 있다.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비는 모습이 택시에 붙어 있는 ‘오늘만 무사히’ 소녀 같았다. 나도 못 본척하고 눈을 감았다.

***

삼성혈을 뒤로하고 밑으로 걸어내려 오니 오현단이 보였다.

제주로 유배를 와서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제주 사람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가신 현인 5명의 업적비가 서 있는 곳이다. 송시열,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이 있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송시열밖엔 없었다.

나무가 꽤 우거진 오현단 아래쪽에는 오현단을 관리하는 노인정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낯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경계가 별로 없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들이 제일 순수해 보인다나. 처음 보는 할아버지 택시 기사님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잘해 항상 나에게 걱정을 안긴다. 그런 그녀가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걸 구경하고 있다. 그것도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웃으면서. 정말 이상한 모습이었다.

“뭐라고 하셔들?”
“자식들 욕하는 것 같던데.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로 자식들 욕하고 있어. 진짜 웃기다.”

***


어떤 시골에 갔을 때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면사무소에 들러서 다짜고짜 직원에게 마을의 이모저모를 물어보는 것, 아니면 노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짜증 내지 않고 외지인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답을 해주는 면사무소 직원이 있거나, 노인들이 한데 모여서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다면 예정을 바꿔 하룻밤쯤 묵어가는 것도 좋다. 기가 좋은 동네에서 잠을 자는 것은 특별한 테라피를 받는 것과 비슷하니깐. 삼성혈 뒤편에 있다는 제주 유일의 헌책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성혈
- 삼성혈의 대각선 쪽, 이도동의 주택가에서 바다 방향으로 보이는 개천이 산지천이다. 쭉 내려오면 동문시작과 만난다. 삼성혈에서 세 개의 구멍을 보거나 사진을 찍겠다고 굳이 펜스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지 말자.
- 삼성혈에서 나와 칼 호텔 방향으로 가서 제주시청 방향으로 100미터 정도를 가다 왼편을 보면 책밭서점이 보인다. 시간을 내서 한번쯤 가볼 만하다. 제주에 남은 유일한 헌책방이다.
- 오징어튀김으로 유명한 짱구분식을 들르자. 삼성혈에서 칼 호텔 방향으로 나와 중앙로에서 좌측으로 꺾어져 십여 분 정도를 걸어가면 제주시청이 나온다. 제주시청의 건너편에 있다.
- 국수마당은 삼성혈에서 나와 오른쪽, 제주민속박물관 방향으로 200미터를 올라가면 건너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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