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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의 작품 세계

고전과 현실, 시간을 달리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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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입담에 의한 전승이 희귀해진 요즘 같은 때, 시간을 달리는 남자 고우영이 남겼던 고전의 재해석은 우리에게 훌륭한 길잡이로 자리합니다.

대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서사’,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입니다. 손주를 무릎베개로 눕혀 놓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긴긴 겨울밤 화롯가에서 칭얼대는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단한 콘텐츠가 없었던 시절, 아이가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유일한 타임머신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으며 살아온, 또 그 한구석에서 전승되어 온 옛날이야기라는 통로였습니다.

고우영 (1938~2005)

그 ‘옛날이야기’를 가장 예스럽고 구성지게 전해주었던 어른은 누구였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TV와 영화, 책을 통해 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되새기고, 삼국 시대의 영웅들을 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옛날이야기를 꼽으라면, 저는 돌아가신 고우영 화백을 꼽습니다. 유구한 옛날이야기를 덩실덩실한 장단과 가락에 맞추어 겨울밤 화롯가 이야기처럼 풀어나가던 그의 만화는, 그가 주로 다루었던 주제인 ‘옛날이야기’에서 강한 매력을 발산하며 지금까지도 그는 최고의 옛날이야기꾼의 자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1938년 만주에서 태어난 고우영 화백은 정통으로 미술이나 만화를 배워본 적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천부적 재능만큼은 두각을 드러냈는데,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 피난지에서 『쥐돌이』라는 단행본 만화를 16세에 발간하며 데뷔 기록을 세웁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형들의 그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곁다리로 배우던 고우영은 셋째 형(필명 추동식)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그의 유작들을 물려받아 이어 나가며,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만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추동식-추동성으로 이어지는 이 만화가 『짱구박사』입니다.)

만화가 고우영만이 가진 독창적인 매력이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소년만화 쪽이 아닌, 성인만화 분야에서였습니다. 1972년, 고우영은 일간스포츠에 성인용 장편극화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만화가 ‘망가’ ‘애들이나 보는 것’쯤으로 치부되던 시기에, 처음 일간지를 통해 장편 연재되는 성인극화를 대중들이 접하게 되면서 만화의 독자층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고우영의 작품 세계라 불릴 수 있는 전문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가장 두각을 드러냈고 또 대중과 공감할 수 있었던 주제는 바로 ‘고전’이었습니다. 한학에도 능통했고, 여러 가지 고전과 야사에도 밝았던 그는 주로 동양의 주요 고전과 한반도의 야사들, 민담과 전래동화 등을 새롭게 읽어내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과 위트를 가미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 시킵니다.

 최근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일지매』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임꺽정, 홍길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 시대 의적 일지매는 실제 역사 속에서는 두 줄의 문장에 잠깐 언급되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조차 일지매에 대한 인상들ㅡ매화가지, 검은 복장, 날렵하고 민첩한 도적ㅡ은 한결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지매는 순전히 고우영이라는 한 작가가 창조해 낸 캐릭터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작품 『일지매』는 게다가 단순한 시대 판타지물이 아닙니다. 실제 작품을 들춰 보면, 일지매라는 인물 하나에 활동과 사건을 엮기 위해 작가가 끌어다 쓴 컨텍스트들의 방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광해군 이후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공신들과 반대파의 당파 싸움, 그 와중에 희생되는 민중의 아픔들까지, 고우영은 모두 쓸어 담아 만화 안에 집어넣습니다. 이로 인해 캐릭터 일지매는 비로소 생동감을 얻고, 마치 진짜 역사 속에서 활동했을 것 같은 착각을 후대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역사 속의 작은 꼬투리 하나로 방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대표 사례가 『일지매』라면, 고우영의 만화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높은 『삼국지』는 그의 현대적 감각과 재해석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1970년대에 신문 연재된 고우영의 『삼국지』는 정통 『삼국지연의』에 입각하면서도 그 해석과 표현에 있어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패러디와 인용의 미학을 보여 줍니다.

모반에 가담한 복황후를 죽이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가는 병사들이 ‘엔테베를 상기하라!’(주1)고 외치는가 하면, 여포의 군마를 빼앗아 간 장비는 인디언 분장을 하고 ‘올올올’ 소리를 내며 약탈을 자행합니다. 이외에도 비행기는 수시로 등장하고, 각 군의 장교들 계급장이 현대식인 등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용과 패러디를 통해 고우영은 삼국지의 이야기와 현실을 묘하게 대비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삼국지』는 단순 인용에서만이 아니라 해석에서도 대단히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합니다. 덕망 높고 인자한 캐릭터인 유비라는 인물에 메스를 대며 ‘가식적’ ‘목적을 위해 인간의 마음까지 이용하는’ ‘무능자’ 등의 해석을 내립니다. 또 정신 없는 난세를 꼿꼿하게 헤쳐 나갔던 간웅 조조라는 인물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제갈량과 관우가 가질 수 있었던 서로 간의 대립 의식에 대한 의구심도, 대중매체 중에서는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최초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이렇듯 이 작품은 텍스트를 읽으며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내용까지도 읽어내어 재창조하는 고우영 만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일지매』를 통해 보여준 방대한 스토리텔링과 『삼국지』에서 드러나는 현대적 재해석과 인용뿐 아니라, 고우영 만화는 ‘생생한 캐릭터’라는 또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어 독자들의 찬사를 멈출 수 없게 합니다. 그가 창조해낸 캐릭터,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재가공한 캐릭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제각기 말투와 버릇, 행동양식을 또렷하게 부각하고 있어, 다소 거친 그림 풍에도 불구하고 인물에 대한 정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고전 판소리를 재해석한 『가루지기전(변강쇠전)』의 주인공 변강쇠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민담과 판소리에서 정력의 대가로 나오는 변강쇠는 아예 말뚝 같은 (사실은 남근을 의도했을) 캐릭터로 그려지며, 정말 생긴 대로의 행동을 통해 스토리에 일치감을 부여합니다.

 단순 묘사나 설정이 아니라 이는 작가의 애정에서 기인합니다. 고우영의 역사물 『초한지』에 등장하는 항우의 경우, 비열하고 치사한 유방의 맞은 편에서 냉철하고 강인한 장군으로 등장합니다. 모든 캐릭터에 항상 웃음 코드가 가득했던 고우영은 적어도 『초한지』의 항우에게는 단 한 컷도 가벼운 풍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죽음을 그리는 장면에서 누구보다 슬퍼하며 캐릭터에 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우영의 텍스트가 갖는 이러한 강점들을 고우영의 천재성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사실 대단한 노력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늘 느긋하고 낙천적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마감 직전에 후다닥 작업해내는 속도 하나는 놀라웠다고 하는 것이 주변의 증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게으른 천재’로 연결되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작가 고우영이 가졌던 방대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작품 곳곳에서 수많은 한시와 현대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고, 옴니버스물의 경우에는 그 다루는 소재 자체가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왕조 야사를 다루었던 『오백년』과 같은 시리즈입니다. 고려 초기부터 조선 단종까지 있었던 일들을 야사 중심으로 다룬 이 작품에는, 『태평한화골계전』(서거정 정리) 같은 일반인이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에서 발췌한 에피소드도 등장하고, 사료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알기 어려운 인물들(변계량, 정수동 등)에 대한 묘사도 상세합니다.

단순히 그가 게으른 천재가 아니라, 그의 일상 전체가 늘 아티스트의 시각을 견지해 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실제로도 고전을 좋아했고, 기록으로 남은 옛 이야기를 읽으며 그 배경에 깔려 있는 알지 못하는 부분을 상상으로 메우는 것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 독서와 상상으로 받아들인 세계와 시간은 그의 작품이라는 출구를 통해 새롭게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이 모든 과정은 작품을 그리는 시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 고우영의 인생 전체에 걸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읽고 내뱉는 작업에서의 위대함이야말로 작가 고우영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빛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일제 시대와 태평양 전쟁 중에 태어나 해방을 유년 때 맞이했던 노세대로서 그는 후학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가 가졌지만 후대는 갖지 못한 경험과 지식들을 그는 유머와 위트, 날카로운 시선을 통한 재해석으로 남겼고, 유구한 ‘말빨’에 힘입어 그의 이야기는 선대와 후대를 잇는 가교가 되었습니다. 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그의 이런 시선은 단편 『놀부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 놀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고우영의 ‘흥부전’은 제목부터가 『놀부전』입니다. 작품에서 놀부는 억척스럽고 고집 센 농부로, 흥부는 공부 좀 했다고 손에 흙 묻히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인텔리로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산으로 받은 땅으로 놀부는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지만, 그런 형을 비웃는 흥부는 사업하겠다는 욕심과 자만에 흙을 사겠다는 외국인에게 속아 땅 전체를 팔아버리는 사기를 당하고 거지로 나앉습니다. 그런 흥부를 돕기 위해 형은 몰래 숨겨둔 땅을 다시 슬쩍 찾아 돌려주지만, 흥부는 그마저도 팔아서 사업자금을 만들어 버립니다.

반전은 그런 흥부가 결국 성공해 버린다는 아이러니입니다. 결국 흥부는 사업이 크게 성공해 (원전에서도 흥부는 박이 터지지요) 갑부의 대열에 올라 앉고, 놀부는 동생이 망했다고 생각하며 동생을 돕는다고 하다가 그만 특허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갑니다.

개인적으로 고우영 작품 중에 가장 감동을 받았던 『놀부전』이야말로 고우영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추구했던 작품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할아버지 세대가 겪고 엮어온 오래전의 이야기들, 조부모 세대는 그 이야기에 자신만의 색채와 생각을 덧씌워 무릎 위의 손자손녀에게 전승합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내려온 이러한 전승은 재미라는 채널을 타고 아이들에게 삶과 인생의 교훈을 남겨 줍니다. 대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입담에 의한 전승이 희귀해진 요즘 같은 때, 시간을 달리는 남자 고우영이 남겼던 고전의 재해석은 우리에게 훌륭한 길잡이로 자리합니다.


주1) 엔테베를 상기하라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발생한 사건. 이스라엘 여객기를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공중 납치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으나, 이스라엘 특공대가 국제사회의 우려를 무릅쓰고 전광석화 같은 작전 전개로 테러범을 몰살하고 인질을 구출해낸 사건이다. 『삼국지』에서는 ‘빠른 작전’을 의미하기 위한 현대적 인용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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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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