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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 절에 가라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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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는 가보면 무시 못 할 제주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임을 실감한다. 일주문이 없는 대신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관음상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다. 그 장면이 아주 압권이다.

“계속 이렇게 통화해도 괜찮아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음 일정 갔어요.”
“우석 씨는 안 가도 돼요?”
“네. 전 이런 출장 많이 와봐서요. 아프다고 했어요. 통화하고 싶었거든요.”
“후후, 기사는 어떻게 쓰려고요?”
“다 방법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그만 해요. 비싼 전화란 말이에요.”
“원래 그런 식으로 일해요? 전화할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니에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외국 와서 한국에 전화해본 것은. 나 안 보고 싶어요?”

***


“기억나? 예전에 나 롬복에 출장 갔을 때 전화했던 거?”
“그 좋은 데 가서 쉬거나 일하거나 하지, 왜 그렇게 나한테 전화 많이 했어?”
“그렇게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 나도 참 대단하지? 롬복이 발리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로 한 번 더 들어가는데, 공중전화 같은 거는 아예 없었거든. 그래서 그냥 리조트에서 호텔 전화로 전화 한 거야.”
“전화비 많이 나왔겠다.”
“그랬지, 아마 출장비 받은 거 전화비로 다 썼을걸. 삼십만 원 넘게 나왔던 거 같아.”
“아깝다. 그냥 전화하지 말고 그걸로 맛있는 거나 사 먹지.”
“아니야. 그 전화비 하나도 안 아까웠어. 전화하는 그 순간이 너무 로맨틱해서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 숙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자기랑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전화라도 실컷 한 거야.”
“맞아. 난 리조트 한 번도 안 가봤어. 나 한번 데려가 줘.”
“응, 그런데 잠깐 끊어야겠다. 앞에 경찰이 있어. 미안.”

***

“지금, 몇 시야?”
“미안, 이야기가 길어지네. 어떻게 사람들 아무도 안 가는데 나 혼자 갈 순 없잖아. 조금만 이해해 줘.”
“나 출장 와 있을 때 하필 이래야 해?”
“미안, 일 이야기하는 거니까. 이해해 줘. 응? 다시 전화할게.”
“야! 야!”

***


전날 통화한 통화 내용은 전과 달랐다. 시간이 지난 것을 빼고는 모든 게 그대로일 텐데 왜 통화의 내용은 달라진 걸까.

아침부터 그녀에게 화를 내기는 싫었기에 묵묵히 운전을 해서 관음사로 향했다. 전날 밤 일로 속에선 불처럼 화가 나 있어 그 불을 잠재우려고 불심을 빌어보기로 했다. 뜨거운 속은 공복이라 더 쓰리게 느껴졌다.

***

제주 옛말에 당 오백 절 오백이라고 했다.

제주에는 원래 절이 많았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무장한 숙종 시절의 제주목사 이형상이 절이란 절은 모조리 부수었다. 그래서 여전히 마을마다 남은 당집에 비해 절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생각해보면 정부와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제주목사는 나라님 수준의 파워가 있었을 것. 오백을 넘어서는 절로 걷어야 하는 세곡이 물처럼 흐르니 나라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에 무자비로 없앴을 것 같다. 그래야 자신의 창고에도 조금씩 채워 넣었을 테니까 말이다.

없앨수록 성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성 덕에 제주에는 다시 수많은 절이 생겼지만, 그중에서도 관음사는 특별하다.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왔다가 잠깐 들렀다 가는 절로 많이 알려졌지만, 관음사는 가보면 무시 못 할 제주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임을 실감한다. 일주문이 없는 대신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관음상이 양 옆으로 도열해 있다. 그 장면이 아주 압권이다.


관음상의 사이를 아카데미 시상식의 배우처럼 천천히 걸어서 들어가니 벌써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를 지켜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일깨워준다. 그녀와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별일 아닌데 왜 이렇게 화를 낸 걸까. 불편하게 잤겠군. 내려가면 전화해야겠다.

***

“어, 어젠 미안.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 잘 잤어?”
“응, 어디야?”
“관음사. 한라산에서 찬 공기가 내려와서 살짝 안개가 끼어서 신선나라에 온 것 같아. 다음에 꼭 데려와 줄게.”
“좋겠다. 나도 가고 싶다. 나 꼭 데려가 줘.”

***


그녀를 데리고 관음사에 갔다.

혼자 갔을 때보다 더 분위기 있었다. 현실을 뒤로하고 잠시 떠나온 드라마 속의 연인 같았다. 그런 묘한 분위기를 주는 것이 관음사만의 매력이 아닌가, 했다. 관음사에 들렀다 내친김에 천왕사까지 가보기로 했다. 관음사에서 십 분 거리인 천왕사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암자에 가까운 작은 절이다. 기자 시절에 우연히 들렀던 천왕사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비자림로로 불리는 1117번 도로만큼은 아니지만 절로 올라가는 양옆의 길에 삼나무가 도열해 있다.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갔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삼나무길이 북유럽 어딘가에 온 것 같았다. 조금만 올라가면 예쁜 암자가 나오고 그 암자의 뒤에서 마셨던 물맛을 잊을 수가 없었는데.

7년 전엔 작은 암자에 불과한 곳이었는데, 큰 대웅전 건물이 육중하게 골짜기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한라산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감동은 없었다. 너무 심하게 고쳐 원형을 훼손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라 했다.


관음사
- 제주에서 5.16도로를 타고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와 산천단을 지나서 우회전하면 제1산록도로다. 조금만 더 가면 관음사가 나온다.
- 특이한 모습의 절이지만 역사는 깊다. 4?3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 관음사에서 조금만 더 가면 천왕사가 있다. 눈이 오면 올라가지 않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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