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주물럭 먹어봤어?”
“아니, 오징어불고기 같은 거 아닐까? 오징어불고기라면 먹어봤는데. 제주도에서 나는 한치로 주물럭을 만들었다면 맛있겠네. 왜? 한치주물럭집 있어?”
대화의 시작이 늘 그렇듯 생각을 상대방에게 묻는다. 난 성의 있게 열심히 대답해주려고 언제나 노력하지만, 늘 그녀가 원하는 정답을 주진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그녀는 나의 대답에 만족했을까. 결론을 말해야 하는 특별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대화는 정상일까. 정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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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주제가 한치주물럭이었기에, 한치주물럭집을 시작으로 걷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용연이 있었고 그곳까지 걸어가는 데는 이곳에서 차를 주차하는 것이 맞았다.
관광명소를 찾아갈 때 명소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대는 것은 초보자나 하는 짓이다. 십여 분을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가 좋다.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십여 분을 걸어가면 다른 여행이 된다. 십여 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차를 쉽게 주차할 수 있는 곳도 많고 명소까지 걷는 십여 분은 정말 달콤하다. 여행에서 십여 분 더 쓴다고 해서 뭐 특별하게 달라질 건 없으니. 음, 왕복 이십여 분으로 정정.
한치주물럭집의 건너편에는 당집으로 보이는 작은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길을 건너서 구경하고 싶은 충동을 감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정면에서 불었다. 그녀가 춥진 않을까.
“안 추워? 바닷가 바로 앞이라 바로 바람이 드네. 감기 걸리면 어떡해?”
진짜 걱정이 됐다. 추위를 많이 타는 작은 그녀는 감기가 쉽게 드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안쓰럽다. 하지만 반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 추위에 많이 강해졌어. 옛날에 내가 아니라구. 자, 출발하자구.”
갑자기 개그맨 흉내를 내서 우스웠다. 대화가 끊어졌다. 이런 부류의 단절은 유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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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과 용두암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갔다. 바닷가 마을의 골목을 걷는 느낌은 즐거웠다. 한두기는 제주의 옛 지명이다. 용의 설화와 관련된 용연과 용두암인 만큼 한두기 길의 담벼락엔 위트 있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어프로치’법은 참 즐겁다. 한두기에 사는 동네 사람처럼 동네 길을 따라 용연으로 가는 방법. 그녀도 즐거운지 발걸음이 경쾌했다. 신났을 때 나오는 용수철 걸음. 처음엔 그녀의 저 걸음에 반했었다. 작지만 탄탄한 뒷모습. 남자는 사실 얼굴보다 여자의 디테일을 더 유심히 본다는 사실을 여자들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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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에 다다른 우리. 파랗다 못해 남색 물감을 풀어버린 듯한 진한 파란색 물이 정말 용이 살았을 것 같았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구멍으로 성난 파도가 몰려들었다. 용연 앞바다는 다른 제주바다에 비해 유난히 물살이 거셌다. 해변의 파도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못의 풍경에 우리 둘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구름다리에는 몇 되진 않았지만, 연인들의 한 것으로 보이는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두기 길에 들어오기 전에 철물점 같은 열쇠가게가 보였었다. 그럼 여기 있는 자물쇠는 거기서 사온 것일까, 여행을 오기 전에 사온 것일까. 그럼 둘이서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이 자물쇠를 달았을까. 열쇠는 용연으로 던졌겠지. 그녀를 옆에 두고 잠깐이나마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자물쇠를 달고 간 사람들이 부러워서일까.
두 사람의 튼원을 담은 그 정성스런 쇳조각들이 진한 파란색 물 위에 바람 속에 바다를 보며 매달려 있는 모습이 꽤 감동적이었다.
“다음에 여기 올 때에는 가장 큰 자물쇠를 사서 오자.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어.”
다른 연인의 어떤 것이 부럽기는 칠 년 연애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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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상상의 동물인데 동양에도 있고 서양에도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서로 기억하는 모양도 비슷하고. 난 그래서 공룡이 몇 백만 년 전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2만 년 전 이내에도 살아있던 것 같아. 모세의 방주 알지? 모세의 방주에 공룡을 배에 싣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은 장면도 실제로 나오거든. 그러니까, 공룡의 모습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용으로 묘사하는 거야. 진짜 용연에 공룡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용이 상상의 동물이었어? 난 진짜 있던 건 줄 알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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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두기와 서한두기. 옛 지명 한두기는 용연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나뉜다. 용연의 구름다리에서 바닷가로 내려오니 바다 바로 옆으로 횟집들이 몇 군데 있었다. 여름에는 바깥에서 먹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제주시에서 가장 아트적인 바다를 볼 수 있는 서한두기에서 용두암 쪽으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왔다. 유료전망쌍안경이 비치된 전망대에 오르니 바로 왼쪽으로 용두암의 용, 오른쪽 뒤통수가 보였다. 유료주차장과 입장료를 안 낸 것이 기분 좋았다. 대화는 계속됐다.
“차까지 언제 가지? 인제 추운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의 대화는 몇 점 정도였을까.
용연
- 용두암과 용연은 걸어서 다닐 수 있다. 웬만하면 걷자.
- 사랑의 자물쇠를 미리 가져가거나 혹은 서문 사거리 길에 가기 전에 있는 부산열쇠가게(011-696-2618)를 이용한다.
- 한두기마을에 복신미륵이 숨어 있다. 제주 사람의 미륵신앙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 고전 떡볶이를 맛보자. 한두기 길에서 탑동로를 따라 한라산 방향으로 한 블록을 걸으면 관덕로 사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