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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무서운 순간

한라산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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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간밤에 채비했다. 섭지코지에는 유채꽃이 활짝 핀 따뜻한 3월의 첫째 날을 디데이로 삼았지만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한겨울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장비를 챙겨야 했다.

눈이 한창 내리던 2월의 어느 날, 우리는 체인을 낀 채 1100도로를 넘고 있었다. 체인을 장착해야 오를 수 있었던 1100도로에는 역시 차가 별로 없었다. 천천히 20여 킬로미터 내외로 움직이던 우리는 함께 눈꽃을 봤다. 감동이었다. 휴게소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다시 차를 몰았다. 어승생악에 못 미쳐 차를 세우고 우린 똥개처럼 뛰어다니며 서로 사진을 찍었다. 하나도 춥지 않았다. 하얀 세상의 연인은 우리뿐이었다.

돌아와서 인화한 사진을 보던 그녀가 제주에서 드디어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라산이다.

***

제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간밤에 채비했다. 섭지코지에는 유채꽃이 활짝 핀 따뜻한 3월의 첫째 날을 디데이로 삼았지만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한겨울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장비를 챙겨야 했다. 아이젠과 스패츠, 렉키와 도시락, 접어서 넣을 수 있는 배낭을 챙기자 어느새 배낭이 빵빵해졌다. 게다가 1킬로그램이 넘는 카메라와 렌즈까지 넣으니 배낭이 아주 무거워졌다.


산방산도 헉헉대던 내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난 보병 중에 가장 힘들다는 강원도 양구의 어느 부대에서 체감온도 영하 40도를 견디며 GOP 근무를 했다. 하루하루 1,000미터가 넘는 능선을 1,000개가 넘는 계단을 따라 소총과 방독면, 실탄과 수류탄을 매고 등산하듯이 근무를 섰다. GOP 경계근무 임무를 8개월 동안 성공적으로 마치고 7박8일의 위로휴가를 떠났다. 그랬다. 꽤 강했다.

십 년 전 이야기다.

***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중문에 들러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혹시 몰라 늘 마시는 소주는 마시지 않았다.

성판악휴게소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 삼일절이라 그런지 등산객이 많았다. 차에서 내리자 갑자기 너무 춥게 느껴졌다. 이렇게 추운 날 저 큰 산을 꼭 올라야 할 것인가. 정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스패치를 종아리에 붙이며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주의 어떤 곳을 다녀본 중에 가장 신나 보였다. 갑자기 아찔했다. 그녀는 분명히 금메달이 확정된 이신바예바처럼 웃고 있었다.

***

4-1에서 시작하다.

산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됐다. 준비운동도 하질 못했다. 제길. 해발 750미터에서 시작하는 거니까 1,200미터만 오르면 된다.

길을 따라 구난표지판이 이어졌다. 4-1, 4-2, 4-3,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조난이 된다면 저 표지판의 번호만 알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표지판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약간 온 눈 때문에 바닥은 걷기 좋았다. 아이젠을 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딸나무 숲이 이어지더니 큰 팽나무와 서어나무 숲이 나왔다. 이 정도만 올라와도 좋은걸. 굳이 끝까지 올라가야 하는 건가. 아까 ‘나 먼저 간다’고 말했던 그녀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외로운 산행이 시작됐다. 함께 오르지도 않을 산행에 보디가드가 필요했던 걸까. 없어진 그녀를 욕하면서 한발씩 내디뎠다.

삼나무 숲까지 오니 화장실이 있었다.

***

4-20을 지나다.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약수가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다. 물론 나 혼자 결정한 일이다. 그녀도 이 약수를 마셨을까.

난 천성적으로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군 생활 3년 동안 산에 살았다. 내 인생에서 산에서 보낸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더는 산을 오르지 않기로 한 거였다. 이전에 산을 갔던 것은 전주를 갔다 들른 진안의 마이산이었다. 그때도 그녀를 따라 운동화를 신고 늦겨울에 올라갔다가 죽을 뻔했다. 산을 오를 때 유난히 걸음이 빠른 그녀에게 템포를 맞추려 하자 80킬로그램의 몸무게에 짓눌린 하체에 쥐가 났었다. 내리막길에서 구를 뻔했다.

또 그때와 같은 양상인가.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다. 조금 쉬기도 했으니 오기가 났다. 걸음을 빨리해서 앞에 가던 등산남녀들을 추월하기로 했다. 20여 분간을 달리듯이 걸었다. 나에게 추월당한 사람들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는 건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질 때 40미터 앞에 그녀의 핑크색 목도리가 보였다. 더 힘을 내야 했다.


씩씩대고 그녀를 쫓았다. 돈 떼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씩씩댔다. 느낌인지 체력이 바닥난 건지 그녀는 더 속력을 내는 것 같았다. 나랑 해보자는 건가. 그녀를 크게 불렀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더 빨리 속력을 냈다. 제발, 나에게 이러지마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가까스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머릿속이 노래질 정도로 힘들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뭐야, 난 이상한 아저씬 줄 알았잖아. 멀리서도 숨소리가 너무 크게 쫓아오기에.”

그녀는 젖어버린 내 얼굴을 보면서 깔깔대면서 말했다. ‘같이 가자. 이제, 제발 좀. 천천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태연하게 웃어줬다.

***

체력이 바닥났다. 그때 진달래대피소가 나왔다. 커다란 고원처럼 눈부시게 비치는 햇살이 대피소의 밑쪽으로 이어진 숲을 비추고 있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눌렀다. 밝은 햇빛이 찬란하다고 생각했다. 대피소 안에는 라면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괜히 들어 가봤다고 생각했다. 땀 냄새와 라면냄새가 뒤섞여 불쾌했다. 울타리에 걸터앉아 뜨거운 물을 마셨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제주에서 가장 환하게 웃는 미소였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 삼십분 정도를 쉼 없이 걸어왔다.

***

4-35에 오르다.

더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녀의 보챔에 다시 출발했다. 대피소에서부터는 아이젠을 끼워야 했다. 경사도 상당했고 눈도 제법 쌓여 있었다. 옆으로 발을 헛디디면 깊숙하게 눈밭으로 다리가 빠졌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는지 사람이 제법 많아졌다.

군대에서 훈련 때마다 넘어야 했던 천미리가 생각났다. 하늘의 끝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길을 훈련 때마다 완전군장을 매고 넘어야 했는데 정말 오르면서 매번 울고 싶었다. 지금이 그때와 같았다. 아무리 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1,200미터만 오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1,2000미터쯤의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오르막이 끝나갈 때도 그녀는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길의 양옆 키 작은 전나무에는 눈꽃이 아주 크게 자리 잡았다. 그나마 잠깐 즐길 수 있는 여운이었다.


더는 못 올라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데크계단이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나를 압도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눈과 나무, 구름과 하늘, 바다가 보였다. 바람 소리와 눈 날리는 소리가 얼어붙은 귀에 들렸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잊지 못할 공간에 그녀와 함께하는 사실에 그녀가 다시 좋아졌다.

***

테크계단을 한 발씩 오를 때 바람은 우리를 날려버릴 것 같았다. 저 바람을 버티고 묵묵히 올라가는 그녀가 용했다. 나보다 30킬로미터나 덜 나가고 20센티미터나 작은 그녀가 위대해 보였다.


정상이다. 시계를 보니 세 시간 삼십 분이 지났다. 바람이 너무 세서 얼어붙은 눈밭에 눈을 날려 눈이 오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것이 기특했다. 그녀도 내가 기특했던지 차가운 입술을 내밀었다.

삼 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도 봤다. 흰 사슴이 살고도 남았다. 그곳은 이미 인간의 세계를 떠난 곳처럼 느껴졌다.


한라산 산행
- 등산코스는 모두 네 개. 이중 관음사코스와 성판악코스만 정상인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다.
- 눈꽃을 보려면 2월에서 3월 초, 진달래, 철쭉을 보려면 5월이 등산시기다. 겨울에 오를 때에는 장비를 철저히 준비한다. 산의 입구에 파는 장비는 비싸다.
- 입산마감시간이 정해져 있다. 하루 전 전화로 입산마감시간을 물어보고 타임스케줄을 짜도록 한다. 064-713-9950
- 한라산을 오르지 못한다면 어승생악 정도를 오르는 것도 좋다. 왕복 한 시간에 한라산을 웬만큼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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