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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은 숨비소리

조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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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크고 아름다운 새가 하늘을 날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아니, 크게 하늘을 날다가 내려앉아 연인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그녀도 나도 처음 들었다.

그녀가 떠났다.

일 때문이었지만, 떨어져서 밤을 보내는 건 5년 만의 일이었다. 허전했고, 난 그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워야 했다. 난 호기로운 사람처럼 행동했다. 오만 원을 내고 잤던 모텔에서 제주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하룻밤만 숙소를 옮겼다. 바닷가 전망의 방으로 삼만 원을 더 냈지만,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 삼십 대 중반의 나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그 정도의 투자는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사실, 숙소를 옮겨서라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고급 호텔에 장기 투숙하는 사람처럼 체크인하자마자 룸서비스를 시켰다. 침대에 눕자 바다가 보였다. 내 눈앞 200여 미터 앞 사선으로 푸른색 비행기가 지나갔다. 처음 보는 장면에 카메라를 꺼내 노출을 맞추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식사가 도착했다. 계산서에 호기롭게 서명을 하고 앉아 밥을 먹으며 비행기가 머리 위로 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비행기는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훨씬 더 높은 하늘에 이륙하는 비행기가 보였다. 괜히 짜증이 났다.

*

제주공항의 활주로의 이?착륙로는 시시때때로 바뀐다.

그 사실을 안 것은 제주도가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의 비행기 안에서였다. 기장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 뒤로 앉았을 때 한라산을 보면서 착륙해서 기분이 좋았었는데, 같은 방향에 앉은 어느 날 바다를 보며 착륙했다. 기장 마음대로인지 관제사 마음대로인지, 승객에게 착륙의 권한은 없었다. 운이 좋으면 한라산을 보면서 내릴 수도, 없으면 뿌연 바다를 보면서 내릴 수도 있는 거다.

그때 일이 이제 생각났다.

카메라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 아주머니들이 떠드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용두암 쪽에서 제주항 쪽으로 칠 인의 해녀들이 일렬종대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수다를 떨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귀한 장면에 사진을 찍었지만, 망원렌즈는 없었고 그 장면을 함께 할 그녀도 없었다.

*

전화가 왔다.

“문 열어줘.”

아침 일곱 시 사십오 분이었다.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현관문에 뚫린 작은 구멍 너머로 틀림없이 그녀가 보였다. 문을 여니 유난히 작은 몸의 그녀가 사각팬티만 입고 있던 나에게 안겼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첫 비행기로 다시 왔어. 당신하고 아침 먹고 싶어서.”

그녀가 다시 왔다. 한숨도 자지 않고 첫 비행기로.

*

많이 바쁘다고 했던 그녀가 열여덟 시간 만에 돌아왔다. 모든 일을 다 마쳤단다. 아니, 일을 잠깐 미뤄두었다고 했다. 잃었던 연인을 다시 찾은 것처럼 행복했다. 열여덟 시간 만에 만난 연인은 각자의 열여덟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입을 맞추고 아침을 먹었다. 내가 전날 본 해녀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해녀가 보고 싶다고 했다.

*

조천에 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해녀를 볼 수 있는 곳을 고민하다가 제주시에서 가까운 조천리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는 작은 어촌이 되어버린 조천리는 시간을 거스른 제주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진시황의 시대로 가면 불로초를 찾으러 서불 일행이 조천으로 들어왔고 고려시대로 가면 조랑말의 조상인 몽골의 말이 이곳으로 들어왔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육지에서 제주로 오는 모든 배가 조천에 닻을 내렸다. 달리 항만시설을 마련할 수 없었던 옛 사람들이 조천으로 들어온 것은 지리학적으로 조천의 바다가 배를 대기 가장 좋은 상황이었을 것 같다. 자연이 만든 천연적인 항구를 옛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해녀는 육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해놓은 곳에서만 작업한다. 조천리 앞바다도 그 중 하나다. 또 조천리에는 연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북쪽을 그리는 정자. 유배 온 선비나 관료가 서울의 왕을 그리며 하염없이 육지를 바라보았다는 정자다. 언제쯤이면 이 유배가 끝날까 하고.

농협의 주차장에 차를 댔다.

*

연북정의 이정표를 따라 바다 쪽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나에게 연방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마음씨 고운 아이를 야속하게 가버렸다고 원망했던 내가 더 원망스러울 정도로.

반듯한 정자 연북정이 보인다. 바다 옆의 정자라…… 멋지다.

현무암 계단을 오르니 하늘색 바다가 펼쳐졌다. 멀리 서울이 보이는 듯했다. 연북정에서 그녀에게 원래 혼자서 이곳에 오려 했다고 말했다. 이곳에 올라 당신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려 했다고. 어설픈 선의의 거짓말(멘트)을 날렸다. 그녀도 미소를 잔뜩 머금으며 행복해했다.

배를 따라 등대가 보이는 바다로 걸어갔다.


휘이이~ 휘유~ 휘이이유~

*

숨비소리였다.

마치 크고 아름다운 새가 하늘을 날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아니, 크게 하늘을 날다가 내려앉아 연인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그녀도 나도 처음 들었다.

숨비소리. 청아하고 청명하고 눈물 나는 소리였다. 들리는 소리가 숨비소리임을, 잠수를 마치고 내는 해녀들의 소리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주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소리를 들으며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대 앞, 바다 밑이 모두 보이는 맑은 바다의 둑 옆에는 네 개의 테욱을 띄운 네 명의 해녀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을 차고 들어가는 소리와 번갈아 내는 숨비소리 휘이이~휘유~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녀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
“응, 최고야. 말이 필요 없어. 제주에서 최고야. 그녀들은 놀라워. 눈물 나. 소리만 듣고 있어도.”

*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은 제주에서 해녀는 보물과 같은 존재다. 돌과 바람이 많기에 땅이 척박하고 농사가 부적당한 제주땅을 먹여 살리고 꽃단장시키고 자식들까지 공부시킨 사람들이 바로 해녀들이다. 잠수를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일부에 남아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도 해녀와 해녀 촌이 있다고 알리고 있지만, 겨울에도 물에 들어가는 것은 제주 해녀뿐이다. 임신을 했을 때도 아이를 낳은 직후라도 물속 행을 택했다. 제주 해녀의 잠수능력은 세계 최고다. 수면에서 바다 밑의 목표를 정하고 22미터까지 헤엄쳐서 들어가 오 분 동안 작업을 하고 나와, 숨비소리를 내면서 잠깐 쉰다.



location
- 제주시에서 성산 방향으로 1132번 도로 9킬로미터 정도에 있다.
- 해녀 분들에게는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안 된다.
- 조천리는 제주 3.1운동의 발상지. 항일기념관이 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낭만제주>는 링거스group과 함께하며, 매주 금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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