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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소설을 넘어 ‘주제어’로 자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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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그러한 해석의 흐름 덕분에 늘 애독자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더욱 풍부한 컨텐츠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는 무려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한자 문화권이라 불리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소설이라면 『삼국지』가 빠지지 않겠습니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화교 식당 입구에는 요즘도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관우가 재물을 부르는 신격으로 묘사된 그림과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고, 한국에서는 누구를 모실라 치면 ‘삼고초려’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게 등장하곤 합니다. 심지어 말이 안 통하는 타국 사람들끼리도 필담으로 『삼국지』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박수를 칠 정도니, 그 대중적인 인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삼국지』는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 역사가 아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쓴 일종의 팩션 소설을 가리킵니다. 명칭 또한 정확한 명칭이 아닌데, 『삼국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소설이 아닌 실제 정사正史로, 위-진-남북조시대로 일컬어지는 시대 중 진나라 시대의 학자였던 진수라는 저자가 기록한, 후한 말기부터 진나라 건국까지의 혼란기 역사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삼국지연의’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타당한 소설 『삼국지』는 그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 명조에 들어와서 나관중이라는 저자가 새롭게 각색해 낸 소설입니다. 진수의 정사와, 정사에 부족한 내용을 보완한 주석, 각종 야사와 설화들을 참조하여 창조해 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나관중의 소설본은 청나라 대에 들어와 모종강이라는 또 다른 작가가 가독성을 높이는 형태로 편집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삼국지』의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로서의 『삼국지』가 명대에 와서야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중국 4대 기서에 『삼국지』와 같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수호전』의 배경은 북송 말기인데, 이 『수호전』에는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주요 고사들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수호전』의 주인공들이 북경 대명부에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축제 중인 거리에서 『삼국지』의 한 장면인 관우가 독화살에 맞아 다친 팔을 화타가 수술로 치료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와 극장이 묘사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삼국지』는 문자화된 텍스트 이전에도 길거리 배우들이나 낭송자들이, 적어도 소설 『삼국지』의 주요 장면들을 능숙하게 묘사할 수 있는 정도로 숙지하고 있었고, 소설화 이전에도 매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야깃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는 한편으로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리학의 발달이 두드러졌던 송대 이후, 그중에서도 유독 성리학의 이상국가로서 서고자 했던 욕망이 남달랐던 조선에서는 그 반발이 꽤나 큰 편이었습니다. 사림의 대표주자였던 조광조는 아예 임금 앞에서의 경연(임금과 대학자들이 마주앉아 유학의 주요 내용을 토론하는 일)에서 ‘시중에 도는 『삼국지연의』와 같은 잡소설은 시정잡배들이나 읽는 껄렁한 내용’이라고 폄하한 적도 있습니다. 수시로 역성혁명과 폭력이 넘쳐나던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정중동을 지향하는 성리학적 국가 이념과는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였는지, 걸출한 조선의 문장가 중에서도 안타깝게도 『삼국지연의』를 번역하거나 보급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삼국지』가 대중들에게 그토록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말 그대로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딱딱하고 어렵고 지식인들이나 쉽게 읽을 수 있었던 지루한 역사책에서의 교훈을 넘는 내용이 연극과 거리 무대, 읽기 편한 소설문으로 실려 있고, 이른바 지식인들로부터 잡문 취급을 받을 정도로 현장감 있는 인물과 상황 묘사는 읽는 이에게 흥분과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흥분과 감동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배척받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 간간이 양념처럼 섞여 들어가는 과장과 허세는 이야기의 맛을 더욱 돋우어 읽는 이에게 실제 역사가 아닐지라도 마치 실제 역사가 그랬던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합니다.

얼마 전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던 『삼국지』의 주요 장면, ‘적벽대전’과 같은 경우가 극적 재미가 역사적 사실을 넘어 어떻게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삼국지』 재미 요소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조조의 백만 대군과 유비/손권의 연합군 10만 수준이 대결하는 구도지만, 실제 역사 연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조조군의 규모는 후하게 잡아 봐야 20만, 잘해야 10만 규모였고, 유비/손권의 연합군은 대략 5만 명을 상회하는 수준이어서 소설만큼의 극적 대결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설은 나중에는 대놓고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어오게 만들기 위해 단을 쌓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까지 연출하는데,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럴듯한 각색과 흐름을 타고 『삼국지』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전투의 한 장면으로 적벽대전을 그려 냅니다.

『삼국지』의 재미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과장과 허세입니다.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은 뭔가 대단한 존재가 묘사될수록 그럴듯한 재미를 보여 주는데, 『삼국지』가 그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대표 사례입니다. 여포가 타던 세계 최고의 명마 ‘적토’는 여포가 죽은 후 관우가 받아 죽을 때까지 타는데, 무려 그 기간이 60년입니다. 하지만 적토마와 같은 명마가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까운 저자는 적토마의 생명을 마구 연장해가며 삼국지 중반부 전체에 관우와 함께 늘 등장시키는 서술을 택합니다.

이러한 과장은 적어도 그 과장에 동의하는 이들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촉의 장수인 조운은 조조의 백만 대군 사이를 유비의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르며 탈출하고, 제갈량은 남만 지방을 정벌하면서 적장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고도 일곱 번 다시 놓아 주는 아량으로 항복을 받아 냅니다.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울 법 하면서도 뭔가 일어났으면 감탄할 만한 사건들을 극적으로 과장해 배치하면서 『삼국지』는 읽는 이들에게 실제 역사를 넘어서면서도 현실감 있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단순한 과장만이 아니라 『삼국지』는 그 서술과 흐름, 인물에 나름의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과장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삼국지』의 흐름은 촉의 건국군주인 유비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는 한나라 황실의 혈통으로 망해가는 한나라의 왕조를 되살리겠다는 고전적인 가치를 따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사기열전』을 항상 끼고 살면서 충과 의를 온몸으로 말하는 관우와, 남자답고 거친 호탕한 매력의 장비가 의형제로 서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왕조의 복원을 위해 의로 뭉친 세 남자가 겪는 온갖 고초와 그 성공 스토리는 주인공을 동일시하는 독자에게 비장함과 뿌듯함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대립점에 있는 인물인 조조는 당연히 당대 최강의 악역으로 만들어 극적인 대립감을 끌어올립니다. 친절을 베풀어준 아는 사람 가족을 의심 하나만으로도 몰살시키고, 충직한 부하들을 잔인하게 숙청하는 등 조조의 간악함을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삼국지』는 매우 고전적인 갈등 요소로 주인공 유비와 악당 조조의 대립을 만들어 내고, 그중 악역 쪽에 보다 강한 힘을 실어줌으로써 악당에게 핍박받는 정의, 그리고 정의가 이길 때의 승리감을 고조시키는 서술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인 대립은 그러나 『삼국지』 컨텐츠가 갖는 특이점, 곧 정사와 소설이 혼용되었다는 점과 시대가 바뀌었다는 점에 힘입어 다양한 변주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장 유비 중심의 촉한정통론이 상당수 부정되면서 현대에서의 『삼국지』 평역본들은 상당수가 간웅으로만 묘사되던 조조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조명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인덕으로 포장되었던 유비의 매력 또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로 읽는 흐름도 늘어나면서 이제 『삼국지』의 해설만으로도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2차 컨텐츠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삼국지』는 그러한 해석의 흐름 덕분에 늘 애독자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더욱 풍부한 컨텐츠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는 무려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삼국지』 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논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흥분의 도가니가 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비냐 조조냐’와 같은 큰 줄기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서,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우유부단함이 성격 탓이냐 참모 탓이냐’는 세부적이고 고차원적인 논쟁까지, 논쟁의 테두리도 다양합니다. 늘 결론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한 편으로 그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만드는 ‘거리’라는 것만으로도 『삼국지』는 놀라운 컨텐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지』는 소설을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어로 자리합니다. 서기 190년대, 벌써 2천여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 흥미로움은 아직까지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감이 잘 안 오시겠지만, 서기 190년이라면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의 태동기였고 서구에서는 로마제국의 시기였습니다. 꽤나 오래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랜 생명력으로 진화하고 있는 『삼국지』이기에 감히 소설을 넘어 주제어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영어권에서는 ‘romance of three kingdoms’로 번역되는 『삼국지』, 그 영어권에서의 romance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본다면 넷상에서 농담 삼아 떠도는 ‘로망’이라는 단어와 『삼국지』가 꽤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새삼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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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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