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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 조지수의 『나스타샤』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사랑 이야기지만,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삶의 여정이다. 흔들리는 정체성, 내면 깊은 곳의 고통과 상처, 견딜 수 없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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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고 소금이 안 들어간 음식과 같은 것이다. 있어야 할 어떤 것이 빠져 있는 삶이고 충족감이 결여된 삶이다. 허전하고 공허한 삶이다. 나의 언어, 나의 표정, 나의 웃음, 나의 눈물ㅡ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없다. 이것들은 고유의 것이고 동족만이 이해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름휴가 기간에 혼자서 훌쩍 떠난 여행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무렵만 해도 나는 영화 <비포 선 라이즈>의 한 장면을 상상하며 한껏 설레고 있었다. 거기서 컷(cut). 다음 장면은 일종의 반전이다.

슈테판 광장

몇 시간 후 나는 비바람을 맞으며 슈테판 광장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었다. 공황 상태가 이런 것일까. 세상 천지에 나 혼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아득하고 막막한 기분. 내가 예약한 호텔은 광장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서 도저히 그 호텔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갑자기 중앙 광장을 둘러싼 수많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느껴졌고, 독일어로 쓰인 표지판들은 해독 불능의 암호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위치를 물어봤지만 대부분이 관광객이거나 영어를 못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무거운 여행 가방을 질질 끌며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다. 저녁 무렵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패닉 상태로 광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슈테판 광장 근처 골목의 내가 찾던 호텔

결국 30여 분 만에 호텔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때의 기분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단순히 낯설다는 느낌 이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리둥절하면서도 외롭고 쓸쓸하고 두려웠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득해지는 느낌. 그리고 조금 슬펐던 것 같다.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를 읽으면서 문득 빈에서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감각이 지금까지 세포 어딘가에 문신처럼 절실하고도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었나보다. 이 소설의 화자인 ‘조지’는 캐나다의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담담한 말투로 20여 년 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삶의 의미를 찾아 고뇌와 방황, 혼돈으로 점철된 시기를 보내던 그는 대학 시절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캐나다에 정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 ‘나스타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특히 체호프의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도 그 세 자매와 똑같았다. 삶이 이렇게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데 있어서.”
이 말을 나는 충격적으로 들었다. 그녀가 몇 시간이나 사전과 씨름하며 자신의 느낌을 전달했을 때 내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어쩌면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다. 무의미한 삶을 견딜 수 없어 했다는 점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삶의 대부분의 행로를 무의미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구하지 않고 사는 오늘의 삶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600쪽이 넘는 육중한 두께에 걸맞게 책갈피마다 방대한 지식을 부려놓고 있다. 철학, 예술, 종교, 과학, 지리, 자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자의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 그리고 치밀한 묘사가 보석처럼 빛난다. 심지어 독선적으로 보이는 견해들조차 어느덧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주인공 ‘조지’가 캐나다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종의 ‘프리퀄(prequel)’인 셈. 중반부 이후부터는 ‘나스타샤’라는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섬세하고도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나스타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난민이다. 때는 80년대 후반, 냉전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 소련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이른바 반체제 인사였던 남편으로 인해 그녀는 KGB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숲 속에 버려진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캐나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남편과 어린 아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국경 지역의 외딴 커피숍에서 숨어 지내던 그녀는 그곳에서 조지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 그녀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사전을 통해 단어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우리의 대화는 느리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가 불편하다고 해서 소통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상대편을 많이 살피게 되고 둘 사이의 친근감이 증진되었다. 그녀와 나는 러시아 작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달리 나눌 화제가 없었다. 이 대화는 충분히 즐거운 것이었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심미안은 놀라웠다. 음악만 국경이 없지는 않다. 신기하게도 대화가 이루어졌다. 러시아 작가들의 이름을 그 나라 발음대로 가르친 한국의 교육제도가 고마웠다. 우리는 고골리를 얘기하며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이 여자는 단지 영어가 서툴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다. 조지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골반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나스타샤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면서 둘 사이에 본격적인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런던 동물원 입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외국어’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캐나다에 2년 동안 연수를 다녀온 한 선배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해외에 나가면 삶의 디테일이 사라진다.” 정말 그렇다. 요컨대 그것은 뭉툭한 ‘벙어리장갑’의 세계인 것이다. 웬만큼 유창하지 않고서는 외국어로 대화하는 행위 자체가 굴욕의 연속이다. 예전에 런던 동물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런던 외곽에 위치한 데다가 한국에서 가져간 안내 책자에는 제대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찾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무려 1시간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가다가 열 명도 넘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야 했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내 영어 발음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동물원(zoo)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다들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수첩에다가 단어를 써서 보여주기에 이르렀는데, 그때서야 “아, 동물원(zoo)!” 하고 알아듣는 것이었다. 나도 분명히 그렇게 발음했던 것 같은데, 왠지 비참해졌다.

외국어로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됐다면 안됐고 웃긴다면 웃긴’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누구만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영어로 열심히 얘기하면서도 문득 “왜 이렇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가게 점원이 “What(뭐야)?” 하고 큰소리로 되물을 때나, 자동차 정비공장에 가서 아저씨를 상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것저것 상태를 설명하거나(깜박이를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할 때면, 가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자국에서의 지위와 학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로서 신세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들은 닦아오고 갖추어온 모든 것들을 자국에 놓고 오게 된다. 전문직 종사자들이 막노동꾼이 된다. 만약 노동자의 운명을 거부한다면 ?의 운명은 신세계에서 그냥 시들어가는 것이 된다. (…) 삶에 환상은 없다.

외국에서 영어로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모국어처럼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 답답하고 괴롭다. 그 순간에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지식이나 논리, 감수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무력감이 엄습한다. 그것은 하루키가 지적한 바, 일종의 ‘슬픔’을 동반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은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외국어가 잘되지 않아 슬프다는 건 아니다. (…) 무슨 운명 때문인지 나에게 있어 우리말처럼 설명의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한 성격의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조지는 나스타샤에게 영어를 체계적으로 배우도록 권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언어는 영혼이야. 언어 일반은 지성이지만 각자의 언어는 각자의 영혼이야. 나스타샤의 모국어를 내가 이해한다면 당신의 영혼을 내가 좀 더 잘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러나 나스타샤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인종적, 문화적 차이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캐나다라는 타국에서 한국인 ‘조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출신인 ‘나스타샤’ 역시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러나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이 더 강했다. 두 사람 모두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했으며, 동시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방황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구원이었다.

이쯤해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인데, 그녀는 유학 시절에 만난 캐나다 남자와 결혼해서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다. 처음 그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왔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 결혼 당시만 해도 친구 집의 반대가 무척 심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늘 ‘오픈 마인드’임을 강조하셨지만, 정작 딸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부모님 때문에 결혼 전까지 친구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사실 사윗감이 캐나다인이라는 것(=한국인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조건이나 집안 배경 등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결국 그 친구가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처럼 모든 일은 해피엔드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 당시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관용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 혹은 나와 다른 인종을 스스럼없이 포용하기엔 아직 우리의 관념이 보수적이라는 씁쓸한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직접 발을 담가보기 전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통증으로 비명을 지를 때 나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같이 소리쳤고, 그녀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지을 때 내 마음에는 아득한 어둠이 가득 찼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신과도 타협할 수 있었다. 수상한 부두(voodoo)의 신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어떤 잔인한 정령과도. 그녀는 나의 행복, 나의 두려움, 나의 오늘, 나의 미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고통 받느니 차라리 태양이 없어지고 바다가 사라지고 숲이 폐허가 되는 것이 낫겠다. 나의 나스타샤. 사랑스러운 나의 나스타샤.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나스타샤와의 사랑은 주인공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고, 이후의 운명 역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저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사랑 이야기지만,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삶의 여정이다. 흔들리는 정체성, 내면 깊은 곳의 고통과 상처,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는 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노년에 접어든 화자는 캐나다에서 보낸 날들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이었던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이방인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일까. 담담한 그 말투 속에 왠지 모를 슬픔이 감돈다.

돌이키면 삶은 모두 단순하다.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추억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어찌어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빠져나온다. 열정과 불안과 동요는 거칠게 우리를 휘둘렀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행복한 젊음이란 없다. 단지 행복한 젊은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젊은이들은 그의 삶에 많은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오래 기억되듯, 불행한 젊은 시절이 우리의 삶에 어떤 흔적을 멀리까지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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