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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다

역사적 재판을 다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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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이 ‘(판결과 함께) 장벽이 무너졌다/장벽을 무너뜨린 재판(And the Walls came tumbling down)’과 ‘세계를 움직인 재판(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으로 직역되는 두 권은 역사적인 재판을 다룬다.

법에 대한 내 생각부터 밝히는 게 좋겠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내 법 감정은 몹시 나쁘다. 나는 법을 불신한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에 호소할 뜻은 거의 없다. 열정 있는 변호사의 변론에 인용된 어느 법학자의 주장에는 콧방귀나 뀔 따름이다. 흥!

“정의는 인류에게 극히 중요한 것이다. 정의를 이루어 내는 세 가지의 사회통제 수단은 종교와 도덕 그리고 법이다. 오늘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다.”(『세상을 바꾼 법정』 58쪽) 법과 종교는 사회구성원을 압박하는 수단이지 정의를 이루어 내는 사회통제 수단은 결코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이제 들여다볼 책 두 권은 잘된 판결 모음집이라 하기 어렵다. 그랬다면 나는 두 권의 책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원제목이 ‘(판결과 함께) 장벽이 무너졌다/장벽을 무너뜨린 재판(And the Walls came tumbling down)’과 ‘세계를 움직인 재판(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으로 직역되는 두 권은 역사적인 재판을 다룬다.

“재판이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소위 그 재판이 있기까지 일어난 사건이나, 당시든 나중이든 세간의 이목을 끌게 한 사건들이 집약된 형태로 드러나는 과정이라오. 큰 사건으로 부풀려진 재판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소설가 토마스 만이 쿠르트 리스에게 한 말, 『악법도 법이다』 8-9쪽)

미국의 법률가 마이클 리프와 미첼 콜드웰이 공저한 『세상을 바꾼 법정』 (금태섭 옮김, 궁리, 2006)은 그 결과가 미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여덟 가지 재판을 다룬다. 나는 이 중에서 안락사, 매카시즘, 음란물과 표현의 자유, 의료보험회사의 횡포, 정신박약자에 대한 불임시술이 쟁점이 된 20세기의 재판 다섯에 주목한다.

1장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한다. 1975년 4월 15일, 스물한 살의 카렌 앤 퀸란은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병원에 실려 간 그녀는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카렌 앤의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여 딸이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하려는 부모와 이를 반대하는 의료진이 맞선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결국 소송에 들어간다. 1975년 10월 27일 열린 최종변론에서 카렌 앤과 그의 가족을 대리한 폴 암스트롱 변호사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폴 암스트롱 변호사의 변론은 실력 있고 헌신적인 소송 변호사의 최종 변론의 훌륭한 전범과도 같다. 그의 주장은 열정이 담겨 있고 체계적이고 카렌 앤의 가족에게 모든 비정상적인 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폴 암스트롱에 대응하는 모리스 카운티 도널드 콜레스터 검사의 변론이 더 인상적이다. “‘어려운 사건은 잘못된 판결을 낳는다.’는 오래된 법언(法諺)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청구인의 처지를 동정할수록 그 청구를 들어주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생기게 되고, 그 결과 잘못된 판결이 나오는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재판에서 카렌 앤 가족은 승소한다. 뉴저지 주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고 나서 1976년 5월 22일 그녀가 입원한 병원의 의료진은 카렌 앤의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한다.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카렌 앤은 1985년 6월 11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3장 「우리 안의 적」의 주인공 두 사람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일자리를 잃은 라디오방송 진행자 존 헨리 폴크와 최고의 변호사이면서도 정의감에 불타는 루이스 나이저다. “매카시즘은 일단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유죄로 추정한다고 선언하였다.”

루이스 나이저는 괴상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극복하고 승소를 이끌어낸다. “청중들은 위대한 변론을 기다리고 있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역시 정의감에 불타는 배심원들은 매카시 ‘똘마니’들에게 변호사가 청구한 금액보다 더 많은 손액배상액수를 안긴다.

하지만 패소한 매카시 ‘똘마니’들은 거의가 파산 상태에 있었기에 폴크와 나이저는 손액배상금을 다 받지 못했다. 더구나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찍힌 빨갱이 낙인 때문에, 존 헨리 폴크는 방송가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1975년에 CBS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 당시 자신의 경험을 쓴 폴크의 책 『재판의 공포(Fear on Trial)』에 대한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권을 사들였다. 조지 C. 스콧이 나이저로, 윌리엄 디베인이 폴크로 출연한 드라마는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각본 부문 에미상을 수상했다. CBS는 평단의 찬사를 한껏 즐겼지만 20년 전에 자기들이 해고한 폴크에게 방송계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다.”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와 ‘도덕적 다수’의 우두머리 제리 폴웰 목사가 맞붙은 소송을 다룬 6장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의 결론은 이렇다. “철학자와 현인(賢人)과 포르노 제작업자 모두 똑같이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한 명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결국 그들 모두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다.”

그런데 래리 플린트를 총으로 쏴 하반신 불구자로 만든 범인을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은 것은 플린트가 아무리 허접한 잡지를 펴내는 사람이라 해도 너무하다. 래리 플린트의 저격범은 나중에 살인사건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았다지만, 플린트에게 중상을 입힌 것에 대해 전혀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7장 「생명의 가격」은 갖은 횡포를 부리는 의료보험회사 때문에 고통을 겪는 유방암 환자인 누이를 보다 못해 싸움에 나선 신출내기 변호사의 투쟁기다. 의료보험회사로부터 수술비 지원을 거절당한 마크 히플러 변호사의 누나는 모금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골수이식 수술을 받는다.

하지만 돈을 언제 돌려줄 거냐는 기부자들의 물음을 자주 접하자 가족들은 외출마저 포기한다. 보험 가입자의 건강을 도외시한 의료보험회사의 이윤추구는 배심원들의 격분을 사 천문학적인 손액배상액을 물게 된다. 히플러 가족은 이자를 덧붙여 모금액을 기부자들에게 되돌려 준다. 한때나마 히플러 가족이 기부자들의 모금액 반환 요구에 시달린 것은 짠하다.

「생명의 가격」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추진되고 있는 의료 민영화가 이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폭로한다(504-506쪽). 8장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은 1920년대 미국에서 자행된 ‘합법적 불임시술’을 거론하는데 그 양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분노가 치민다.

1924년 입법된 버지니아 주 불임시술법의 “목적은 특정인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질적 저하를 방지하고 주민들의 일반적인 지적 수준을 향상시켜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계층을 보호하고 사회복지를 증진하려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캐리 벅은 버지니아 주 불임시술법에 의해 난관 절제술을 받은 첫 번째 희생자다. 그것도 ‘시험소송’의 대상자로서 말이다. ‘시험소송’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조치를 합법화하려는 절차인 것 같다.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수양어머니의 조카부터 존경받는 연방대법원 판사에 이르기까지 한 여자의 삶을 직간접으로 유린한다. 캐리 벅의 강제 불임시술을 승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미 연방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가 쓴 판결문의 일부를 살펴보자.

“사회 전체의 이익 때문에 가장 우수한 시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도 적지 않다. 사회가 무능력자로 차고 넘치는 것을 막고자 이미 사회에 부담이 되는 사람들에게 그보다 적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금지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무슨 헛소리에다 전체주의적인 발상인가! 그러나 이 정도 갖고서 무얼.

“사회에 적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자손이 범죄를 저질러 처형되거나 혹은 저능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출산을 금지하는 것이 사회에 이익이 된다. 법률로 예방접종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나팔관 절제도 강제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삼대가 저능으로 판명되었다면 출산을 금지할 이유는 충분하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사전예방책이요 원천봉쇄론이다. 나는 이를 단순히 시대적 한계로 여기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의 발호 또한 시대적 한계가 된다. 이것을 1920년대의 미국 사회와 법제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2002년 1월 버지니아 주 의회가 상하원 합동으로 채택한 결의안에 따르면, “벅 판결 이후 미국 내에서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불임시술을 받았으며 버지니아 주에서도 8천 명이 그러한 시술을 받았다. 그 판결은 독일 우생학 지지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들은 나치 정권에서 만들어진 유사한 법률을 지지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실은 그리 놀랍지도 않지만), 미 “연방대법원은 범죄자와는 달리 ‘정신박약자’라는 이유로 실시되는 강제적인 불임시술이 합헌이라고 선언한 판결을 아직까지 파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꺼리고 반성할 줄 모르는 사법부의 ‘똥고집’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체제옹호론자의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집행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소련 붕괴 후에 해제된 비밀문서와 로젠버그 부부를 조종한 소련 지휘자의 자서전은 그들이 실제로 유죄였음을 보여 준다.”

비밀문서와 자서전에 로젠버그 부부의 새로운 어떤 범죄 사실이 담겨 있어 죄질이 얼마나 더 무거워졌는지 모르나,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할 만큼 두 사람의 죄질이 극악무도한 것은 아니다. 미국 사법당국이 로젠버그 부부에게 형 집행을 하기 전, 몇 번에 걸쳐 범죄사실을 인정하면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만 봐도 그렇다.

또한 로젠버그 부부는 오히려 죄질이 더 나쁜 공범들보다 훨씬 높은 형을 선고받았다. 다분히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며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바꾼 법정』에 나타난 구차한 애국주의보다는 쿠르트 리스의 객관적인 서술이 한결 설득력 있다.

“너무 갑자기 로젠버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푹스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모턴 소벌, 그리고 해리 골드가 형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로젠버그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그들이 만기에 앞서 미리 석방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에도 로젠버그 부부의 무죄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25년이 지난 뒤에도 당시 사법부가 중대한 오류를 범했으며, 로젠버그 부부는 기껏해야 몇 년 형을 받아야 했고, 죄를 더 많이 지은 다른 사람들처럼 형기를 반 혹은 3분의 2만을 채우고 석방되어야 했다고 믿는 사람이 그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론인 쿠르트 리스는 『악법도 법이다』(문은숙 옮김, 이룸, 2008)에서 역사적 재판의 시간과 공간을 더욱 확장한다. 소크라테스 재판과 예수 재판까지 거슬러 오르지만 22개의 역사적 재판 가운데 17개가 1892년에서 1961년 사이에 몰려 있다.

“이 책은 각 장마다 하나의 재판을 다루고 있으며, 이들은 소위 상징적인 재판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재판은 모두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벌어질 수 있었던 재판이다. 각 재판은 재판이 이뤄진 나라와 시기, 당시 상황 등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쿠르트 리스는 소크라테스 시대 배심원들의 자질을 아주 우습게 본다. “대부분의 배심원들은 법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지식이 없었고, 심지어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째 이런 비난의 화살은 그를 망명하게 만든, 나치 정권을 성원한 동시대 독일인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우리라고 뭐가 다르랴마는.

소크라테스와 오스카 와일드는 선고 형량의 집행을 면할, 다시 말해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라 밖으로 내뺄 여력이 없었다.

아무래도 마타 하리는 스파이가 아닌 듯싶다. 적어도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 5만 명을 희생시키는 정보를 적군에게 넘겨줄 정도는 아니다. 마타 하리는 인도네시아 태생의 혼혈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소도시 레바르덴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사람이다. 그녀의 약간 동양적인 외모와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색은 부계 쪽으로 유대인의 피가 섞인 때문으로 추정된다.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전기의자에 앉은 이는 진범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린드버그는 친나치 성향이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무고한 희생양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비폭력을 옹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재판했던, 그들에 대항해서 변호하거나 증언했던, 또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저지른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형벌을 받았다. 정작 전기의자에 앉혀야 하는 자들은 따로 있다. 뭐가 잘났는지 모르지만 잘났다는 인간들이다. 물리적 힘과 권력 그리고 법을 앞세워 선한 사람을 마구 짓밟은 인간들 말이다.

“저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캐리 벅의 답변, 『세상을 바꾼 법정』 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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