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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의 『샤넬, 미술관에 가다』

나만의 키워드, 미술관에서 재미있게 노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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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미술관에 열 번을 방문해도, 열 번 모두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너무 신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쉽고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산이 되었을 걸…….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1999년 겨울, 대학시절 난생처음 떠난 유럽 배낭여행. 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유럽 5개국을 돌아오는 패키지 상품이었다. 파리에서 2박 3일을 묵었는데, 그 안에 참 많은 관광명소를 숨 가쁘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단 몇 시간 만에 초스피드로 둘러봤는데, 그 많은 명화들 가운데 정작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단 한 점도 없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뒤, 다시 파리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혼자서, 열흘간의 휴가 기간을 오로지 파리에서 보내는 일정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센 강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면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시기도 하고, 뤽상부르 공원에 있는 나무 그늘이 넓게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다. 어떤 날은 퐁피두 도서관에서 음악을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것처럼,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피카소 미술관. 작고 아담한 규모였다. 방문한 시간이 좀 이르기도 했지만, 관광객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그림에 다 눈길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느낌이 오는 작품 위주로, 천천히,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실제로 그때 보았던 피카소 작품 가운데 하나는 나중에 프로그램 타이틀을 제작할 때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비로소 나는 파리에서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5년 전에는 미처 느낄 수 없었던 진짜 나만의 추억을.

피카소, 「figure and profile」 EBS <생방송 시선> 프로그램 타이틀


『샤넬, 미술관에 가다』가 유독 눈에 들어온 이유는, ‘패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미술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특별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명화를 소개하는 책들은 이미 너무나 많다. 그러나 무조건 많이 접한다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핵심은 차별화된 관전 포인트를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 그런 점에서 ‘패션’이라는 키워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차분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자그마한 장신구나 사소한 디자인 하나에 숨겨진 의미와 상징적 코드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패션 트렌드를 통해 당시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나 권력관계, 인간의 욕망 등이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동복의 역사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순진무구하고, 귀여운 아동의 이미지는 바로 근대에나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말한다. 아동복 분야에서 오랫동안 현장 경험을 쌓아온 저자의 이력 때문일까. 많은 복식 설명 중에서도 아동복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사례로 등장하는 벨라스케스의 「안토니아 부인과 그의 아들 돈 루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림 속 남자 아이가 예쁜 스커트를 입고 줄로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까지 6세 미만의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같은 드레스를 입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을 끈으로 묶어서 다녔다는 설명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림 속 아이의 얼굴은 또 어떠한가. 사이즈만 작다 뿐이지 생김새는 완전히 어른이다. 거기다가 표정마저 굳어 있다.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여겼던 당시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 복식을 ‘감춤과 드러냄’을 통한 유혹과 욕망의 기제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자못 흥미롭다.

복식심리학자 플뤼겔은 여성의 복식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선택적으로 드러내거나 감춤으로써 남성을 유혹해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선택적 노출과 감춤의 역사를 플뤼겔은 이동하는 성감대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 본문 중에서

플뤼겔은 ‘에로틱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는 것에서 유발되는 스릴과 흥분’을 뜻한다고 한다.

복식사를 통해 미술 속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강조하는 신체 부위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에드먼드 버글러는 『패션과 무의식』에서 패션의 역사는 일곱 가지 신체부위ㅡ가슴, 목선, 허리, 엉덩이, 다리, 팔, 신장ㅡ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순열조합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 본문 중에서


특히 저자는 ‘블랙’과 ‘레드’를 팜므파탈을 위한 색으로 지목하고 있다. 관능미의 정점을 보여주는 빨강과 검정색의 앙상블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불어 닥친 스페인풍 패션의 영향. 제임스 휘슬러가 그려낸 보아 목도리를 걸친 여성의 초상화(「빨강과 검정-부채」)는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책에는 유난히 휘슬러의 작품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가 그려낸 여성들은 모두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덕분에 좋아하는 화가가 한 명 늘어나게 된 것도 나름의 수확이랄까.

이 책에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패션도 언급되고 있다. 17세기 구두 산업의 발전 등 사치재 시장의 활성화에 앞장섰던 루이 14세의 빨간색 하이힐을 비롯해, ‘대량생산 시대와 도시의 익명성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 보울러 해트의 의미(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즐겨 등장하는 바로 그 모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무채색의 남성용 슈트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등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남성들에 의해 편제된 사회 경제 구조들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남성복의 간소화 경향은 강해진다. 노동과 자본의 집약을 위한 효율적인 패션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로 남성들은 더욱 능률적인 복식을 선호하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한다. 이것을 가리켜 흔히 ‘위대한 남성성의 포기’라고 부른다.
- 본문 중에서

몇몇 미술작품들은 나에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 본 유명한 작품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그림에서 ‘텍스타일’에 주목한다.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입고 있는 옷자락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섬세하게 표현된 옷 주름과 더불어 ‘마치 군청색 수레국화가 날염된 듯한 세련된 느낌의 텍스타일’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여신의 옷자락에서 나부끼고 있는 꽃무늬의 아름다운 군청색에 잠시 주목해보자. 보티첼리는 청금석을 갈아서 이 색깔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라피스라즐리’라고 불리는 이 청금석은 투탕카멘도 그의 스핑크스에 사용했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보석이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1485)

쳀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림을 재발견한 기분이랄까. 보티첼리의 그림을 ‘텍스타일’이라는 키워드로 감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수레국화의 감청색 무늬로 표현된 의상이 없었더라면, 과연 봄의 여신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새삼 든다. ‘꽃무늬가 발산해내는 저 로맨틱한 봄의 시간과 질감, 여성미는 투명에 가까운 시폰 느낌의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여인의 살빛과 더불어 소생의 기운을 뿜어낸?.’는 묘사를 읽으면서, 새로운 종류의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달리의 마지막 작품 앞에 서서 사쿠라이가 말했다.
“이 사람, 나한테 시비를 걸고 있어. ‘네가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말이야.”
마지막 그림은 인간의 몸을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는 서랍으로 희화한 그림이었다.
“그림의 의미 같은 것은 전혀 모르겠지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은 아니까, 굉장히 가슴이 두근거려. 이것 봐.”
- 가네시로 가즈키, 『GO』 중에서

이것은 소설 『GO』에서 남녀 주인공이 미술관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그림 감상법은 아주 대조적이다. ‘나’는 한 작품 한 작품을 꼼꼼하게 바라보는 스타일인 반면, ‘사쿠라이’는 순간적으로 싫고 좋음을 결정해 버린다.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서는 꼼짝 않고 서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 앞은 바람처럼 휙휙 지나가’버리는 식이다. 어차피 사람마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은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키워드를 통해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선택하는 필터에 따라 나의 경험치도 매번 바뀔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상의 발견이다.

얼마 전 예전에 같이 작업했던 음악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매번 영화를 ‘음악’이라는 키워드로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근에 본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전반적인 스토리와 연출 스타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득 다음에 그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나도 음악에 초점을 맞춰서 감상해 봐야지, 하고. 분명히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 감상이 될 것 같아 심지어 설레기까지 했다. 이런 태도는 무한 적용이 가능하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가 ‘패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동안 내가 무의미하게 지나쳐왔던 인물화에 숨결을 불어넣고 한껏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 것처럼. 때로는 자신만의 키워드로 미술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같은 미술관에 열 번을 방문해도, 열 번 모두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너무 신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쉽고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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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미술관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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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미술관에 가다』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의 패션을 다루고 있는 미술관 속 그림들을 통하여 미술사와 복식사를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 속에는 정교하게 수를 놓은 뮬, 모피로 만든 케이프, 목걸이 대신 이용했던 벨벳 리본, 팜므 파탈을 위한 검정색과 붉은색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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