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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찾아주는 시계

시간 앞에 인간은 언제나 정도를 벗어나 있다. 미치도록 바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지루하거나, 너무 일찍 왔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왔거나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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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소담한 정원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매일 똑같은 정원을 산책하지만, 거기서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신선한 들뜸과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 말예요.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시선도 가지 않는 맥 빠진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너무 멀어 희망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꿈은 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사랑이라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요.

자신의 정원에 핀 꽃에는 자기만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시시하고 건조한 일상에 탐스럽고 촉촉한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추억뿐이죠. 여러분의 일상이 향긋한 추억으로 가득한 정원이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마칩니다.

***

나는 정각 오전 11시에 태어난 모양이다. 누렇게 바랜 병원 아기 수첩에 간호사의 글씨로 그렇게 씌어 있다. 오전 11시는 사주와 궁합을 볼 때 조금 문제시 되는 시간이다. 자, 축, 인, 묘, 진, 사, 이렇게 따져볼 때 사시는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 오시는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를 뜻하고, 11시는 정확하게 사시와 오시의 경계에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약혼할 때 사주단자를 써 보내면서 처음으로 그 시간 때문에 어머니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나를 낳고 있을 때 혹시 벽에 시계가 걸려 있지는 않았나요?” 어머니는 시계를 본 기억이 없다고 답하셨다. “그럼, 간호사가 아이를 받고 나서 시계를 보니 그게 11시였을까요, 아니면,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나온 것은 11시였을 것이라고 추정해서 기록한 것일까요.” 우린 마치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사건을 캐고 들어가듯 따져보았다.

그래도 해결이 나지 않자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우리 모녀는 용하다는 어느 역술인을 찾아갔다. 내가 사시에 태어난 사람 같은지, 오시에 태어난 사람 같은지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 사람을 해시계 시대의 사람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다. 그때 역술인의 대답 역시 참으로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근본적으로 글을 가까이 하는 운세를 타고 났는데, 만일 내가 사시에 태어났다면 분석적인 성향이 있어 학자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고, 오시에 태어났다면 창조적인 성향이 있어 작가의 길을 가리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사시가 맞는 것 같네.” 하셨다. 당신 딸이 학자가 되길 은근히 바라셨던 모양이다.

숫자판을 가진 기계시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무렵, 유럽 사람들에게는 교회 종소리가 시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수도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치기를 고용했는데, 말하자면 그가 일종의 인간 시계였던 셈이다. 보통 사람들은 숫자판을 볼 필요 없이 새벽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만종의 소리와 함께 일손을 멈추었다. 종이 몇 번 칠 때 물방앗간에서 만나자라는 식으로 약속을 하기도 했다.

교회의 종탑은 곧 시계탑을 겸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후 시민을 위한 광장 문화가 발달하면서, 시계탑은 교회의 종탑에서 독립되어 시청사의 중심부에 드높이 세워졌다.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가장 잘 보이고, 그래서 가장 지배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시계탑을 소유하는 건물은, 교회이건 정부이건 당대 권위를 행사하던 주체의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권위를 행사하는 자의 주변에는 언제나 희생자도 있게 마련이다.

시계탑에 얽힌 희생자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체코 프라하의 심장부에 위치한 구시청사 건물의 시계탑과 관련된 것이다. 이 건물에는 15세기에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가 제작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천문시계가 있어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이 시계는 15세기에 만들어진 후 400년 동안 저주받은 듯 멈춰 있었는데, 거기에는 전설적인 사연이 깃들어 있다.

체코 프라하 구시청사의 천문 시계탑

유럽 각 도시에서 소문을 듣고 시계를 만든 수학교수에게 똑같은 것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자, 프라하 시청은 아름다운 시계를 독점하고자 사람을 시켜 교수의 눈을 멀게 해버렸다. 시계를 만들기는커녕 볼 수조차 없게 된 교수는 안타까운 뚸음에 첨탑으로 올라가 자신의 유일한 걸작품을 만져보려다 그만 실수로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 날부터 시계는 갑작스레 작동을 멈추었다나. 여행 안내서에 재미삼아 나오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편이다.

왠지 시계라는 모티프는 가장 생생하게 ‘바로 지금’을 가리키는 것 같으면서, 또 어느 한편으로는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를 지켜보는 어떤 존재 같기도 하다.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돔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시계가 아직도 전시되고 있다. 정확히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바늘이 멈춘 그 시계……

이탈리아의 형이상학파 화가였던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작품을 보면 더더욱 시계가 무슨 초시간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조르지오 데 키리코, 「시간의 수수께끼」
캔버스에 유채, 55×71cm, 1910~11, 개인소장

「시간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the Hour」에서는 시계가 태양처럼 아케이드 위로 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빛과 어둠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건물 아래쪽으로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사람이 둘 보인다. 흰 옷을 입은 여인과 아케이드 안에 서 있는 잿빛 남자다. 어쩌면 이 그림은 현실이 아니라 희미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래, 맞아, 거기에 시계가 있었어. 시계바늘은 3시 5분 전쯤 가리키고 있었지.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뒷모습을 보이면서 서 있었어. 그리고 한 남자가 아케이드를 지나가고 있었고, 이층에도 형체를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

회상에 대해서라면, ‘현대문학의 이해’ 시간에 배웠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른다. 1909년 1월의 어느 눈 오는 저녁, 마르셀은 과자를 차에 찍어 먹다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광휘와 행복감에 가득 찬 감정으로 벅차오른다. 이 감정에 집중하자, 그동안 까맣게 드리워져 있었던 스크린이 싹 걷히고, 갑자기 행복했던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던 때로 생생하게 돌아가 있었다.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완전히 초월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늘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잊힌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머무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Salvadore Dali, 1904~89)의 그림 「기억의 연속성 The Persistence of Memory」을 보자.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연속성」
캔버스에 유채, 26×35cm, 1931, 뉴욕 현대미술관

이 그림에도 시계가 여러 개 등장하는데, 이 시계들은 화가가 좋아하던 카망베르 치즈처럼 늘어져 흐느적거린다. 쉽사리 뇌리에서 떠나버리지 않는 미련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탁자 위에 걸쳐진 시계 위에 앉아 있는 파리는 너무 오래되어 신선함을 잃기 시작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옆의 펜던트 시계 위에는 파리 대신 개미들이 모여 있다. 어느 생물체 위로 삽시간에 몰려들어 새까맣게 덮쳐드는 소름끼치는 개미떼가 연상된다. 이 개미떼는 인생의 시간을 갉아먹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생의 즐거움을 갉아먹는 시간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일까.

시간 앞에 인간은 언제나 정도를 벗어나 있다. 미치도록 바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지루하거나, 너무 일찍 왔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왔거나 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시간을 자기 것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그저 만인이 원하는 시간에 맞추느라 서로서로 닦달해가면서 살고 있다. 사실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그저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눈금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당신의 벽시계는 혹시 우러러보이는 장소에 권위적으로 붙어있지는 않은지.


이주은이 추천하는 관련도서

달력과 권력
이정모 저 | 부키 | 2002년 12월
꼭 필요하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은 것, 그러나 새해만 되면 누구나 반드시 구입하고야 마는 것, 우주의 긴 시간을 압축해 정리해놓은 달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하루에 한 번 흘끗 보고 넘기는 달력의 역사를 들려준다. 우리는 다이어리에 스케줄을 기록하며 스스로 시간을 조율한다 굳게 믿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1년을 365일로 고정시켜놓은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조율하는 시간이 정말 나의 시간인지 말이다.

천년의 그림여행
스테파노 추피 저, 서현주 등역 | 예경 | 2005년 1월
지난 천년의 시간을 지나며 그림은 어떻게 변화했을까를 살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형도일 것이다.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으로 이야기되는 800여 개의 작품이 등장하여 일목요연하게 천년을 정리할 수 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림만 죽 훑어보자. 당신의 머릿속에 시간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주은의 스타일, 삶의 태도>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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